소설리스트

75화 (75/76)
  • 75화

    다연의 지정석이 된 곳에 앉아 그림 도구를 펼쳤지만,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제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구자혁 때문에 다연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진짜 발로 차 버릴 수도 없고…… 하아.”

    다연은 돌담 올라앉은 채 몸을 반대로 돌리려 했다.

    무릎에 부딪힌 팔레트가 떨어지는 것을 손으로 잡은 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이미 몸이 돌담 아래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돌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아 다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겠구나 하는 순간 짙은 우드 향이 훅 하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단단한 가슴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자혁이 다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심 좀 하지? 돌바닥인 거 안 보여?”

    왜 그가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섰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난 구해줬어.”

    “거슬리는 사람 피하려다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요. 나한테 위임장 들이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회사! 가야죠. 도대체 여기서 왜……!”

    더 보고 있다간 보기 눈물을 왈칵 쏟을 거 같아 다연은 그를 등지고 섰다.

    언덕 아래를 내려보며 다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무심하자 했던 결심이 자신도 모르게 무너졌다. 원망하는 마음을 쏟아내서 뭘 어쩌겠다고.

    결국 다연은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걸어오는 자혁이 신경 쓰여 다연은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 내려 가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 뒤 셀레나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보기 싫어도 식사는 거르지 않았잖아. 다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다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셀레나가 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다연은 거짓말을 했다.

    [궁금한 게 많지만 더 묻지 않을게. 배고플 때 먹으라고 가져왔어.]

    [고마워, 셀레나.]

    셀레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연의 방을 나갔다.

    입맛이 없던 다연은 셀레나가 가져다준 쟁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 * *

    다연은 쟁반을 덮은 덮개를 들어보았다.

    가볍게 샌드위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한국산 컵라면이었다.

    “후우.”

    다연은 컵라면을 보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수출용이 아닌 한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이것을 누가 줬을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연은 컵라면을 한참 내려보다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밤중에 컵라면을 먹으려 내려 온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었다.

    자혁이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는 다연이 들고 있는 같은 컵라면 포장이 뜯긴 채 놓여 있었다.

    다연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갈까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한밤중 라면은 떨쳐내기 힘든 유혹이었다. 더구나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거른 인간에게는.

    다연은 식탁에 앉아 컵라면 포장을 뜯었다. 다연이 스프를 털어 넣자 물이 끓었다.

    자혁은 전기포트를 들고선 다연의 컵라면에 먼저 물을 부어주었다.

    다연이 바라보자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혹시 당신이 내려 오지 않을까 싶어서 물을 많이 넣었어.”

    “이런 것도 먹어요?”

    “해외여행 필수품이라고 추천해줬어.”

    예전에는 추천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직원이라고 대답하고 다연은 입술을 물며 웃음을 참았겠지.

    다연은 쓸쓸하게 컵라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는 여자가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 알려줬어.”

    “안 물어봤어요.”

    “택배비 대신 이걸로 줬어.”

    자혁이 컵라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 개 줬을 거 같아?”

    “…….”

    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물을 붓는 순간부터 라면의 냄새에 다연은 허기를 느꼈다.

    컵라면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큼직한 손이 가로막았다.

    “아직 3분 안 됐어.”

    “괜찮아요.”

    “하여간 성질 급한 건 여전해. 30초만 더 있다가 먹어.”

    다연은 맞은편에 있는 자혁을 바라보았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뭐든 물어봐.”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봤던 날에도 나한테 성질 급한 건 여전하다고 하는데…… 나를 언제 봤다고 그래요?”

    “보진 않았어.”

    “그럼 그런 말은 왜 하는 건데요? 우린 그날 처음 만났잖아요.”

    그 사이 30초가 지났는지 그가 컵라면 뚜껑을 뜯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도 뜯고선 다연에게 말했다.

    “불기 전에 먹어.”

    “대답…… 안 해줬잖아요.”

    “라면 다 먹고 말해줄게. 같이 차까지 마셔주면 더 좋고.”

    먼저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먹는 자혁을 보고 있자니 더는 허기를 참기 어려웠다. 이번 한 번만이라고 생각하며 다연은 젓가락을 들었다.

    라면을 다 먹자 그는 다연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차를 주었다. 티백 끝에 매달린 작은 종이에 ‘둥굴레차’라고 씌여 있었다.

    “이것도 심부름시킨 사람이 줬어.”

    “안 물어봤어요.”

    다연은 차가 우러나게 티백을 흔들며 차갑게 말했다. 내리뜬 눈은 차가 든 컵만 내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다연은 지혜에게 이탈리아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산 때문에 통화할 때 지혜는 이미 다연이 스페인이 아닌 이탈리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되물을 틈도 없이 일 이야기를 하는 통에 다연은 자신 말했는가보다 했었다. 이제 보니 지혜에게 말한 범인은 따로 있었다.

    “여기에도 사람 붙였어요?”

    “아니.”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다연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와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미미가 알려줬어.”

    다연이 내리뜬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미라니요?”

    “당신 휴대폰에 미미 앱이 설치되어 있잖아.”

    다연은 IT 쪽 상식이 부족했던 자신을 탓했다. 출국하기 전 그 앱을 지웠어야 했는데.

    “아까 했던 질문, 아직 대답 안 했어요.”

    “그것도 미미가.”

    그의 집에 가서야 미미를 만났다.

    미미가 어떻게?

    “할아버지 병실에 미미 초기 모델이 설치되어 있었어. 이를테면 테스트 버전이었어.”

    다연의 미간에 세로줄이 그어졌다.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 사인했던 고용 계약서에 비밀 유지 조항과 더불어 음성 녹음에 관한 동의가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안전 차원으로 생각했는데 그걸 누군가 들어볼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구 회장의 병실이 다연에게는 대나무 숲과 같은 곳이었다. 서로 위안되는 이야기도 많이 했었고, 같이 욕도 많이 했었다.

    대표적은 지금 제 앞에 있는 구자혁.

    출장 가도 선물 하나 안 사 온다고 했었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빚이라는 이름으로 출장 때마다 퇴촌댁한테 우산을 사다 주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그가 다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고개를 들지 않아도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자꾸 그렇게 봐요?”

    “예뻐서.”

    “뻔뻔해.”

    “보고 싶었어.”

    라면도 먹었고 차도 마셨으니 더는 그와 마주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자신의 방으로 갔다.

    * * *

    셀레나가 챙겨주는 샌드위치와 커피는 자혁이 이곳에 온 날부터 2인분이 되었다. 각자 자신의 몫을 챙겨 피에솔레 언덕으로 향했다.

    돌담에 걸터앉자 그림을 그리다 한 번씩 고개를 들어보면 어김없이 자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다연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거나 대놓고 짜증을 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웃었다.

    그가 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났을 때 다연이 심각하게 물었었다.

    “한국 안 갈 거예요? 회사는……. 정말 이렇게 둘 거냐고요.”

    “걱정은 돼?”

    이 와중에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웃는 구자혁을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나 휴가라고 했잖아. 그리고 일해. 회의도 하고. 해야 할 일은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연을 따라왔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이탈리아에도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매일 따라다니는 구자혁 신경 쓰여 다연은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오늘은 일찌감치 그림을 접고 돌담 주변을 걷기로 했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날이면 자주 걸었던 곳이라 다연은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겼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저 멀리서 긴 꼬리를 흔들고 있는 네발 달린 짐승을 보기 전까지는.

    “설마…….”

    다연과 눈이 마주친 개는 꼬리를 더 세게 흔들며 뛰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다연은 뒤돌아 자혁에게 뛰어갔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채 숨으려 했으나 개는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연에게 달려들었다.

    “아니야…… 이러지 마…….”

    그의 허리를 잡고 빙빙 돌며 개를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연이 안기는 순간부터 몸이 굳은 구자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개 좀 어떻게 해봐요.”

    다연의 다급한 외침에도 그는 여유로웠다.

    “내가 왜?”

    다연이 빙빙 돌던 것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구요?”

    “저 녀석 덕분에 한다연이 나한테 안겼는데 쫓아낼 이유가 있나.”

    “이건…….”

    다연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자혁이 다연을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안고 싶었어. 한다연.”

    “지금 이러는 건 반칙이죠.”

    다연이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드는 개 때문에 다연은 그의 허리를 잡고 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재미있는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개는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해서 다연에게 달려들었다.

    “하아. 하아.”

    다연이 거친 숨을 내쉬는 것도 모자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자 자혁이 다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같이 밥 먹자. 그러면 저 녀석 해결해줄게.”

    “하아…… 진짜…….”

    다연은 자신은 안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안겨서 그런 눈빛으로 뜨거운 숨을 내쉬면.”

    “구자혁 씨. 지금 이러고 싶어요?”

    “나는 계속 이러고 있어도 돼. 하루 종일이어도 상관 없어.”

    농담이 아니라 그는 정말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쉬운 쪽은 다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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