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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76)

74화

침대에 누워 구자혁 욕하는 데 시간을 보낸 다연은 고소한 냄새에 감았던 눈을 떴다.

식사 시간에 내려가지 않으면 셀레나가 걱정하기 때문에 다연은 귀찮아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나타난 구자혁 때문에 셀레나가 싸준 샌드위치도 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불쑥 나타나는 자혁을 상대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 할 것만 같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다연은 계단 중간에서 우뚝 멈춰 섰다.

[다다, 부르러 가려고 했었는데 시간 맞춰서 내려왔네. 컨디션은 어때?]

셀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다연은 대답해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다연은 떡하니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침에 내가 말했었지? 새로운 손님이 올 거라고. 인사해, 한국에서 왔대.]

그 남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물어 본 것이 아니었는데. 아마도 질문을 할 대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다시는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다연은 자혁에게 물었다.

“뭐가?”

한국말이 오가는 것이 신기한지 셀레나는 식탁에 앉은 자혁과 다연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자혁은 계단 중간에 서 있는 다연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휴가 중이라고 말했을 텐데.”

한강 기업 사장이라고 해서 휴가를 가지 말란 법은 없었다.

지구의 많은 나라 중에 그는 왜 하필 이탈리아, 그것도 피렌체로 휴가를 왔는지.

거기까지는 넘어가 줄 수는 있었다.

한강 기업과 제휴된 5성급 호텔이 피렌체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셀레나의 하숙집에 숙소로 정했다.

그의 노골적인 의도가 빤히 보였다.

“호텔 두고 왜 여기에 있어요?”

“내가 어디에 머물던 내 자유 아닌가?”

그가 집처럼 이용하는 호텔 스위트룸과는 셀라나의 하숙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달랐다. 방은 좁았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써야 했다.

셀레나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니면 나가서 사 먹던가 해야 했다.

그가 호텔에서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하던 모든 것을 이곳에서 스스로 해야 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도 구자혁이 왜 셀레나의 집에 머무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였다. 이렇게 노력했으니 다연이 받아 줄 거라고 좋은 머리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한결같이 뻔뻔했다.

매일 가던 피에솔레 언덕에만 가지 않으면 그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연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는 구자혁이었다.

매번 다연을 꼼짝할 수 없게 하는 구자혁.

“당신이 나갈래요? 아니면 내가 다른 곳으로 갈까요?”

다연의 말이 먹히기는 할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다연을 보려고 왔어.”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그 말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나도 거기로 간다는 뜻이기도 해.”

그는 다연이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명확하게 드러냈다.

두 사람이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을 본 셀레나가 다연을 바라보았다.

[다다,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이 맞아.]

셀레나의 물음에 그가 대신해서 대답했다.

중간에서 눈치를 살피던 셀레나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븐에서 음식을 꺼냈다.

다연이 좋아하는 라자냐를 양손으로 들어 보이곤 셀레나는 특유의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얼른 와서 앉아. 다다가 좋아하는 라자냐 했어.]

다연은 고민 끝에 계단을 내려왔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 다연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와 나란히 앉았다.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연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세 사람 모두 의식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셀레나의 집에서 볼 수 없는 조용한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식사 후 자혁이 작은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두면서 깨졌다.

“이걸 배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가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은 이번에 출간한 다연의 연인 일러스트집이었다.

연이어서 자혁이 꺼내놓은 것은 이번에 추가 주문이 들어왔다는 우산이었다.

[내 우산!]

셀레나는 우산 하나를 펼쳐 들고선 해맑게 웃었다.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근사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 옛날 귀족처럼 드레스를 입고 써야 할 거 같아.]

우산을 빙그르를 돌려본 셀레나가 신나서 웃었었다.

하지만 다연은 웃을 수 없었다.

국제 우편이 아닌 여행 가는 지인에게 부탁했다는 지혜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지인이 구자혁이었다니.

다연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선배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아무 말 안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선배가 당신한테 이걸 맡겼다고요?”

다연이 손가락으로 책을 톡톡 치며 말했다.

“휴가 간다고 했을 뿐이야.”

그래, 휴가. 구자혁은 지금 휴가를 온 것이다. 길어야 일주일이겠지.

그를 내쫓을 수 없다면 버텨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다연은 책과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혁은 다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지낼거라고 하더니 살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보았을 때는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작은 틈조차 없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뻔뻔하게 구는 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쁜 남자였나봐.]

셀레나의 호기심 어린 눈을 보며 자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보여?]

[아주 많이.]

셀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다가 2년 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혹시 그쪽 때문이었어?]

[아니.]

[그럼, 이번에는 맞고?]

자혁은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나가 뭔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나 있을 진 몰라도 내 도움 같은 건 바라지마. 다다가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이번이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만 알아둬. 그거 알아? 살아 있어도 산 사람처럼 안 보이는 거.]

셀레나는 자혁은 빤히 바라보았다.

[다다가 오늘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긴 해. 누군가를 아주 미워하는 얼굴이거든.]

셀레나는 우산을 접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에는 자혁이 배달한 일러스트집을 들고선 비닐을 뜯었다.

[나는 무조건 다다 편이야. 그런데 이거 한국말이야?]

여행 일러스트집과 달리 연인은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그걸 손으로 가리키며 셀레나가 물었다.

[응.]

[뭐라고 적혀 있어?]

[당신은 예쁜 꽃 봐, 나는 예쁜 당신을 보고 있을 테니까.]

셀레나의 눈이 커졌다.

[이런 달콤한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왜 다다를 저 지경으로 만든 거야? 혹시 다른 여자랑 바람피웠어?]

자혁은 피식 웃었다.

셀레나가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자혁의 얼굴에선 희미한 웃음마저 사라졌다.

마지막 장에 있는 그림은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글은 볼 때마다 자신의 심장 쿡쿡 찔렀다.

“자유롭고 싶어요. 당신의 성에 갇힌 채 당신이 보여주는 세상만 보는 바보가 되기는 싫어요.”

그것을 보고 처음 떠오른 것은 자신이 출장으로 집을 비웠을 때 다연의 마음이었다.

강제로 그녀를 가둔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차를 준비해 주긴 했어도 다연이 가는 곳은 한정되었었다. 스스로 가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한국으로 불러들인 순간부터 그녀를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창살 없는 감옥.’

마지막 저 그림을 언제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혁은 다연이 느꼈을 답답함을 저 그림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솔직한 마음도.

그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마지막엔 위임장을 받아 모든 것을 대신해서 정리했다.

모두 다연이 직접 했어야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한주연에게 그리고 계모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사람도 그녀였다. 그들이 벌 받는 것을 직접 봤어야 하는 사람도 한다연, 그녀였다.

하지만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망쳤다. 단 하나 한다연을 보호한다는 이유 하나로.

계약 기간 내내 자혁은 모든 것을 혼자서 견디고 처리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들어올 틈 같은 것은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다연에게 틈을 달라고 얼쩡거리고 있었다.

뻔뻔하게도.

“그래도…… 말은 걸어주네.”

자혁은 다연이 올라간 2층을 올려다보며 슬며시 웃었다.

* * *

구자혁의 휴가가 일주일이면 끝날 거라 생각한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종일 다연이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녔다.

숙소에 오면 일을 하는지 자혁은 노트북을 펼쳤다. 와이파이가 약하다는 핑계로 대부분 2층 거실에 있거나 1층 식탁에 있었다.

다시 말해 다연이 2층으로 가면 2층 거실에 있었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식탁에 있었다.

다연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 한 다연의 시선에는 매번 그가 보였다.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는 게 나을 거 같아 다연은 매일 가던 언덕에 가서 그림을 그리면 그도 한쪽에서 다연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못 본 척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열흘이 지나도 한국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구자혁 때문에 다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7번 버스에 내려 언덕으로 걷던 중 다연이 휙 뒤돌아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한국에 안 가요?”

다연은 차갑게 말했다.

“휴가라고 말했잖아.”

“언제까지요?”

“내 마음대로.”

그를 방해하는 사람이 사라져서인지 예전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 구는 것 같았다.

“나한테 걸리적거린다고 했었죠?”

다연의 말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구자혁 씨가 나한테 그래요. 많이 걸리적거려요.”

“알아.”

차라리 모른다고 하지. 안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기가 막혔다.

“그러려고 온 거야.”

“뭐라고요?”

“계속 걸리적거리면 한 번쯤 쳐다봐 줄 테니까. 지금처럼.”

“……!!”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고, 다연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뻔뻔해요.”

“알아, 걸리적거리는 거 못 참겠으면 발로 차버리든가 해. 아니면 안아주든가.”

“하아…….”

벽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알다시피 난 후자 쪽을 더 선호해.”

이제는 뻔뻔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연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뒤돌아서서 앞만 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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