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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3/76)
  • 73화

    다연이 한국을 떠나 온 지 두 달이나 지났다.

    늦여름이었던 한국은 이제 가을이 되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다연은 불쑥불쑥 제 머릿속을 휘젓는 구자혁 때문에 힘들었다.

    비슷한 체형의 사람을 봤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다연의 모든 세포가 구자혁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바람에 실려 온 짙은 우드 향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를 기억했다.

    유난히 그가 자주 떠오른 날은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셀레나가 한국 그림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다면 정말 손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버스가 종점에서 멈추자 다연은 버스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내렸다.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며 다연은 오늘도 버릇처럼 뒤돌아보았다.

    피렌체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면 셀레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새로운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은 집을 비우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길에서 자신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연은 몇 걸음 걷다 뒤돌아보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10분 걸리던 길이 15분, 20분으로 느려지더니 다연은 이 언덕길을 끝까지 오르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며칠 전, 이곳에 함께 왔던 셀레나가 자꾸만 뒤돌아보는 다연에게 진담 같은 농담으로 물었었다.

    [다다, 어디에다 미련을 두고 온 거야?]

    [미련이라니 그런 거 없어.]

    [그럼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웃어넘겼던 말은 그날 이후 두고두고 다연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두고 온 미련은 아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고, 처음부터 기다리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지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다연은 골목 어귀에서 한 번 더 돌아보고선 곧장 눈앞에 보이는 돌담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다연의 지정석이 되어 버린 돌담에 걸터앉아 다연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올라오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아까 버스 타기 전에 맡았던 짙은 우드 향이 계속 다연의 폐부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휴우…… 하아.”

    다연은 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연은 셀레나가 챙겨준 커피를 꺼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연은 곧바로 후회되었다.

    스모크한 향이 짙은 커피는 구자혁의 집에서 마셨던 커피를 쉽게 떠올렸다.

    “내 취향이야.”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하던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말 한마디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긴장하던 제 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연은 결국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텀블러 뚜껑을 닫았다.

    “그림이나 그리자.”

    도구를 꺼내어 그림을 그리던 다연은 오늘따라 실수를 계속했다. 벌써 다섯 장이나 망쳐서 다연은 새 종이를 꺼내는 대신 엽서지를 펼쳤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생각하며 다연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소란스러워 고개를 돌리자 자주 보던 연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탈리아 말이라 다연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높은 언성과 화난 표정을 보았을 때 다투는 것 같았다.

    “다정한 연인이었는데…….”

    계속 보고 있는 것은 실례라 다연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과격해졌다.

    대놓고 볼 수 없어 다연은 그림을 그리는 척 고개를 숙였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싸우는지 점점 걱정되었다.

    연인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닿고 있었다.

    [Ti amo.]

    짧고 굵은 한 마디에 정적이 흘렀다.

    다연이 아는 몇 안 되는 이탈리아말이었다.

    [사랑해.]

    짧은 말이 가진 위력은 대단했다.

    조금 전까지 으르렁대며 싸우던 연인은 서로를 껴안고선 다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속삭였다.

    격정적인 싸움이 한순간에 핑크빛 멜로로 바뀌었다.

    “어떻게 사랑해 한 마디에 마음이 스르륵 풀리지? 이해 불가다.”

    꼭 붙어서 나란히 걸어가는 연인을 보며 다연은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싸우던 연인이 사라지고 피에솔레 언덕은 본래의 고요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이제는 그림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아 고개를 돌리던 찰나. 다연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다연이 늘 다니는 길 어귀에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날카로운 시선이 다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

    손에 들고 있던 워터브러쉬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저벅저벅.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연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구자혁이었다.

    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다연은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구자혁이 왜 하필 피렌체, 피에솔레 언덕에 있을까.

    다연이 입술을 지그시 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다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우드 향이 점점 더 짙게 느껴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워터브러쉬를 주워들어 다연에게 건넸다.

    “자.”

    마치 어제도 봤던 사람처럼 그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한국을 떠나 온 지난 몇 달간이 꿈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구자혁은 또렷했다.

    다연이 꼼작도 하지 않자 그는 파우치 위에 워터브러쉬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탐색하듯 집요한 시선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만한 얼굴을 하고서.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목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겨우 누르고서 다연이 물었다.

    “잘 지낼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나 보군.”

    다연이 원했던 대답이 아닌 엉뚱한 말을 하고선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누구 말대로 못 지냈어.”

    다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등장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자신과 달리 구자혁은 여전히 여유롭고 오만했다.

    그의 집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

    걸리적거린다고 할 때는 언제고.

    다연이 안식을 취했던 자신만의 공간에 그가 불쑥 나타난 것이 불쾌했다.

    “여기, 왜 왔냐고 물었잖아요.”

    “휴가.”

    그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직접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휴가라니.

    다연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휴가라면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갈 데는 많잖아요. 아니, 휴가 같은 거 갈 시간도 없던 사람이잖아요.”

    날카로운 다연의 반응에 자혁은 여전히 희미하게 웃었다.

    “누가 여기를 추천하더라고.”

    그의 말대로 누군가 여기를 추천했다고 해도 다연과 마주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왜 하필 다연이 피렌체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곳에 구자혁이 왔는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정말 그래서 왔어요?”

    “어.”

    그는 한 발자국 옆으로 옮겨서 언덕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연을 바라보았다.

    “직접 보니까 정말 좋다. 추천할 만해.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그와 했던 어른 칭찬의 뜻을 알기에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많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진짜…….”

    뻔뻔해.

    “보고 싶었어, 한다연.”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더는 그를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연은 그림 도구를 가방에 넣고선 걸터앉고 있던 담에서 내려왔다. 충격 때문에 잠시 휘청이는 다연을 그가 잡으려 했지만, 다연은 차갑게 그의 손을 피했다.

    “당신이 이런다고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신한테 안길 거라 생각했다면, 착각이고, 오만이에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알아.”

    “알면 여길 오지 말았어야죠.”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잖아.”

    뻔뻔하고 오만한 구자혁을 피해 다연은 언덕을 내려왔다.

    다연을 따라오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다연은 무시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언덕에 올라올 때는 수도 없이 뒤돌아보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마침 출발하려는 버스를 보고 다연은 있는 힘껏 뛰었다. 버스에 올라타고선 다연은 기사에게 빨리 출발해 달라고 했다.

    [제발 저 사람이 타기 전에 출발해줘.]

    [다다, 무슨 일이야? 얼굴은 왜 그래?]

    [저 사람이 자꾸 쫓아와서.]

    버스 기사는 다급한 다연의 표정을 보고선 얼른 출발했다.

    버스를 향해 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자혁은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다연은 버스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해보아도 요동치듯 뛰어대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연은 넋이 나간 채 셀레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다연을 보며 셀레나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다다, 무슨 일 있어?]

    셀레나가 매일 하던 인사가 아닌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그냥 컨디션이 별로여서 일찍 왔어.]

    [많이 안 좋아?]

    [그냥 좀 쉬면 돼. 저녁 식사때 까지 나 좀 쉴게.]

    셀레나가 다가오려 했지만, 다연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왔다.

    기분 탓인지 은은한 장미 향이 감돌던 공간에 우드 향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다연은 구자혁 때문에 놀란 세포가 이상 반응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 방으로 들어가 다연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다연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깜박였다. 오늘 있었던 일이 제발 꿈이기를 바랐다.

    그를 노려보았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서인지 눈 주위로 둔통이 일었다.

    다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을 청해보았다.

    그를 마주한 단 몇 분에 몇 년치 에너지를 쓴 것만 같았다.

    굉장히 피곤한데 정작 잠이 오진 않았다. 그의 등장만으로 겨우 평온을 유지했던 제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하아… 진짜… 뻔뻔해.”

    다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재생목록에 있는 피아노 연주곡 중 아무거나 틀어놓고선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래층에서 말소리가 들렸지만 다연은 거기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머릿속에는 온통 구자혁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쁜 놈. 걸리적거린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보고 싶다고 하면 다야?’

    다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나쁜 말을 그에게 퍼부었다.

    ‘다시는 말도 안 할거야.’

    그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이상 피렌체 어디선가 그를 또 마주칠 수 있었다.

    다연은 다시는 그에게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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