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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76)
  • 72화

    한 달이 넘게 병원에 가지 않아서인지 주치의인 정신이 직접 회사로 찾아왔다.

    잠도 거의 안 잔다고 이 실장이 고자질이라고 했는지 정신은 테이블 위에 약병을 꺼내놓았다.

    “전에는 툭 하면 찾아오더니 요즘은 예약도 죄다 펑크내서 의사가 직접 찾아오게 만들다니. 불량 환자야.”

    “바빠. 용건만 하고 가.”

    자혁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결재 서류만 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정신이 일어나 자혁에게 다가왔다.

    “괜찮으면 괜찮다.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 말해야 할 거 아니야.”

    “거기 갈 시간 없어. 10분 뒤 화상 회의 프로그램 테스트해야 해.”

    자혁은 사인 하나를 마치고 다음 결재 서류를 펼쳤다.

    “말하기 싫어?”

    “약 몇 일 분이야?”

    “한 달.”

    “다음 주에 한 달 치 더 가져다줘.”

    자혁은 결재 서류에 몇 가지 체크하고선 반려함에 툭 던졌다. 그리곤 다른 서류를 또 펼쳤다.

    “남용하면 안 된다는 거 잘 알잖아.”

    “한 번에 먹겠다는 거 아니야. 어딜 좀 가야 해서 더 필요한 거야.”

    “출장 가는데 뭘 그렇게 약을 많이 가지고 가려는 거야?”

    자혁이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 한쪽에 툭 던졌다. 그리고 정신을 올려다보았다.

    “출장 아니고, 휴가.”

    “뭐? 휴가? 구자혁 입에서 나온 말 맞아?”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침없는 속도로 휠체어가 들어왔다.

    주미는 자혁의 책상 위에 서류철 하나를 거칠게 던졌다. 주미를 JK 재단 이사장에 임명한다는 서류였다.

    “야! 너 죽을래? 내가 JK 재단 이사장 같은 건 안 한다고 했지!”

    “그럼 JK 재단 해체하던가.”

    “야!”

    흥분한 주미와 자혁 사이를 정신이 가로막았다.

    “진정하고 우리 찬찬히 대화하자, 대화.”

    “저 자식이 말을 안 들어 처먹잖아!”

    주미의 목소리가 커서인지 아니면 들어 오기 전에 이미 부탁을 해서인지 비서가 얼음물을 가져다주었다.

    주미는 그것을 한 번에 마시곤 빈 컵을 다시 비서에게 건네주었다.

    JK 재단 단장이었던 이수희가 구속되면서 공석이 된 자리에 주미를 임명했더니 며칠째 성질부리며 거부 중이었다.

    그럼에도 자혁이 물러서지 않으니 오늘은 기어이 쫓아와 임명장을 집어던졌다.

    “해체 아니면 단장. 둘 중 하나 선택해. 더는 할 말 없으면 둘 다 나가. 회의해야 하니까.”

    자혁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늘하게 말했다.

    * * *

    정신은 주미와 호텔 라운지에 마주 앉아 있었다.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주미는 얼음물만 두 잔째 들이켜고 있었다.

    이수희 단장의 죄가 세상에 까발려지며 주미의 입장도 난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미가 JK 재단을 맡기를 거부하는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 때문이라면…….”

    “아니야.”

    정신은 주미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을 왜 그렇게 봐?”

    “자혁이 너 아니어도 지금 충분히 힘들어. 이번에는 네가 좀 봐줘라.”

    “그게 뭐!”

    정신의 말에 주미는 짜증 난 듯 얼음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입 안에 있던 얼음이 다 녹아 없어지자 주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 보니 다 죽어가던데…… 많이 안 좋아?”

    “지금 자혁이 걱정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내 이름이 제정신이야.”

    주미가 짜증 난다는 듯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중얼거렸다.

    “진짜……. 이름을 왜 그렇게 지어서는…… 하아.”

    “다 들려. 인마.”

    정신은 시익 한번 웃어 보인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께서 유명한 작명가한테서 비싼 돈 들여 지은 이름이야.”

    “그 작명가가 미래의 직업에 맞춰서 찰떡같이 이름을 지을 줄은 할아버지도 모르셨나 보네.”

    오랜만에 주미와 편안하게 마주 보는 것 같아 정신은 주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또또또. 직업병 나온다. 나 오빠 환자 안 하기로 한 지 오래야. 나 신경 쓰지 말고, 저 옆 건물에 있는 저 자식이나 어떻게 좀 해봐.”

    “글쎄다.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서.”

    “주치의가 아니면 누가 해?”

    정신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자혁은 휴가를 간다며 약을 더 가져다 달라고 했다. 주치의로 판단했을 때 구자혁에게 더는 약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어디로 휴가를 갈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자혁은 혼자서 산채 정식집으로 향했다.

    짙은 초록색이 옅어진 산에는 드문드문 노란색과 빨간색이 섞여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어김없이 메리가 달려왔다.

    “예쁜 언니 없어.”

    -컹컹.

    제 말을 알아들었는지 메리는 꼬리를 몇 번 더 흔들더니 식당으로 먼저 뛰어가 버렸다.

    자혁은 트렁크에서 큰 박스를 꺼내 들고 식당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자혁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퇴촌댁이 준 개껌을 입에 물고 제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왔어요.”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퇴촌댁은 인사보다 자혁이 들고 온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툇마루에 박스를 내려놓자 퇴촌댁은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아이처럼 좋아했다.

    “어디서 이렇게 이쁜 것을 구했을까, 엉?”

    “이걸로 빚 청산…….”

    말을 하던 자혁의 시선이 카운터 뒤쪽에 걸려 있는 액자에 고정되었다.

    “……끝이에요.”

    자혁이 가져온 우산을 펼쳐보던 퇴촌댁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번에 많이 가져온 속셈이 있었구먼. 색시가 그래? 우산 많이 가져다주라고?”

    또 하나의 우산을 펼친 퇴촌댁은 정말 마음에 드는지 양손에 우산을 들고 마당 한쪽으로 갔다.

    그동안 자혁이 사다 주었던 많은 우산 대신 오늘 가져온 것으로 모두 바꿔 걸었다.

    그 아래에 서서 퇴촌댁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하늘이 정말 마음에 든 눈치였다. 다연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우산이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저 그림…….”

    “뭘 그리 놀라 색시가 그려준 그림이랑 똑같은 우산 가지고 와 놓고선.”

    퇴촌댁은 아직도 박스에 반 이상이나 남은 우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혁은 다연이 언제 이곳에 다녀갔는지가 궁금했다.

    “그 사람, 언제 왔다 갔어요?”

    “말 안 했어? 외국 가기 전에 그림 들고 왔다 갔어. 재주가 좋아. 그림이 마음에 쏙 들어서 앞으로 밥값 대신 그림으로 그려오라고 했어.”

    퇴촌댁이 짓궂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날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구 사장이 사다 준 우산 하나 손에 쥐여줬어. 구 사장 낚을 때처럼.”

    한결같은 퇴촌댁의 수법에 자혁이 피식 웃었다.

    “저 그림도 그렇게 해서 받은 거예요?”

    “그럼! 내가 사람 낚는 데는 일가견이 있잖아. 밥 줄까?”

    “아니요. 시간 없어서 바로 가야 해요.”

    자혁은 툇마루에서 일어나 다연의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뭐가 그리 바빠서 밥도 안 먹고 가? 회사 일이 아직도 많아?”

    “아니요. 공항에 가야 해요.”

    “또 출장 가?”

    공항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자혁은 다연의 그림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올 때 선물 사와. 우산으로 사 오면 더 좋고.”

    자혁이 몸을 돌려 퇴촌댁을 바라보았다.

    “빚 청산 다 된 거 아니었어요?”

    “이제까지는 빚이었으니까, 이제는 선물로 사 오라는 거잖아.”

    자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봤지? 이렇게 낚는 거야. 알겠어?”

    “네.”

    “출장 어디로 가? 오래 걸려?”

    퇴촌댁이 물음에 자혁은 슬며시 웃었다.

    “출장 아니고 휴가 가요.”

    * * *

    성수기가 지나 관광객이 빠진 셀레나의 집은 조용했다. 이곳의 장기 투숙객인 다연은 손님이 아니라 어느덧 셀레나의 친구가 되었다.

    요즘처럼 집에 둘만 있을 때는 셀레나와 외식을 하기도 하고 시장에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다연이 통통 뛰듯이 계단을 내려오자 셀레나가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좋은 소식이 있어서.]

    [무슨 소식?]

    다연은 셀레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탈리아식 진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다연은 구자혁이 떠올랐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왜 표정이 갑자기 변해? 커피 마실 때마다 그러더라. 커피가 입맛에 안 맞아?]

    다연은 불쑥불쑥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셀레나가 기대를 품고 있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

    [지난번 셀레나가 추천해 준 우산 말이야. 그거 다 팔려서 추가 주문이 들어왔대. 그래서 처음보다 2배로 제작한대.]

    [축하해. 다다. 그런데 나는 언제쯤 그 우산을 써 볼 수 있는 거야?]

    셀레나는 이제 곧 우기가 되면 쓰고 다닐 우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연의 그림으로 만든 우산을.

    [곧 도착할 거래. 스페인 편이랑 연인 일러스트집도 같이 보냈다고 했어.]

    스페인 편은 다연이 한국에 있을 때 인쇄된 것을 받아 보았었다.

    하지만 연인은 한국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챕터에 넣을 그림을 지혜에게 주었다. 그래서 다연도 연인 일러스트집 실물은 아직 보지 못했다.

    지혜가 국제 우편으로 보내려다 피렌체로 여행가는 지인에게 부탁했다고 했다.

    셀레나의 집은 피렌체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찾아간다는 두오모 성당 근처였다.

    고마우면 가이드라도 해주라는 지혜의 말에 다연은 흔쾌히 그러겠다 대답했었다.

    [이번 우기는 빨리 왔으면 좋겠어.]

    [셀레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아?]

    [아니.]

    셀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연은 아직 이탈리아에서 비 오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스페인과 그리스에서는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연은 비가 올 때쯤 다른 나라로 이동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한국의 장마처럼 비가 계속 오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예쁜 우산이 생기면 비 오는 날을 기다리잖아.]

    다연은 자혁에게 우산을 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스카프가 땅에 떨어져 엉망이 되어 우연히 스카프와 받은 선물이었다.

    다연은 그 스카프는 구자혁의 집에 두고 왔지만, 우산은 챙겨왔다.

    우산이 마음에 들어 비 오는 날에 트라우마가 있으면서도 다연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셀레나가 왜 우산과 비를 기다리는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신 셀레나가 다연에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오늘 다다 맞은편 방을 예약한 손님이 올 거야. 저녁에 다다가 오면 같이 저녁 먹자.]

    [알았어.]

    성수기만 관광객이 오는 것은 아니니까.

    다연은 새로운 손님이 묵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셀레나가 준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다연은 광장으로 가 7번 버스를 타려는 순간 짙은 우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버스에 오르지 않고 다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짙은 우드 향이 몸에 밴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다, 안 탈 거야?]

    버스 기사가 다연을 바라보다 물었다.

    [탈 거야, 타야지.]

    다연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잠깐 사이 급격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고작, 같은 향에…….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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