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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76)

71화

다연은 한국에 가기 전 자신이 머물던 스페인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의 모든 것이 다연이 떠나기 전과 그대로인데 너무나 낯설었다.

그중 가장 낯선 것은 집 안에서 나는 향기였다. 다연이 좋아했던 은은한 쟈스민 향을 머금은 집 안에 돌아오면 편안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자신도 모르게 짙은 우드 향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흑.”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다연은 눈물을 쏟아냈다. 급기야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늦은 밤, 다연은 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다연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체크무늬 천이 덮여 있는 식탁이었다.

블랙과 그레이 톤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던 프로방스풍 식탁이 있을 구자혁의 집이 떠올랐다.

구자혁의 집도, 지금 자신이 있는 스페인의 이 집도 다연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주변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 다연은 다시 짐을 꾸렸다. 그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 * *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간 셀레나의 하숙집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떠나기 전 다연이 그려준 그림이 가장 낯선 것일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셀레나의 푸근한 미소도 그대로였다. 셀레나는 캐리어를 들고 들어서는 다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다다!]

[셀레나, 잘 지냈어?]

[그럼, 나야 언제나 잘 지냈지. 다시 보니까 정말 반갑다.]

다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셀레나를 안아주자, 그녀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다다, 사람이랑 닿으면 안 되잖아! 혹시 다 나은 거야?]

2년 전 잠깐 머물렀던 게 전부인데도 셀레나는 다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듯했다. 마치, 엄마처럼.

[그런가 봐.]

[축하해, 다다! 정말 잘됐어. 이제 남자랑 키스해도 되는 거야?]

셀레나는 다연을 안아주며 짓궂은 농담을 했다.

농담일 뿐인데도 다연은 저절로 구자혁을 떠올렸다. 다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

다연의 예상대로 셀레나는 왜 이곳에 왔는지를 물었다.

대답을 준비했던 것 같은데 막상 대답하려 하니 말문이 막혀 다연은 입술을 살며시 말아 물었다.

[다다는 여전하구나. 그냥 놀러 왔다고 하면 될 걸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을 해?]

[그러네.]

[잠시 여행을 쉬기 위해 여행 온 거라면 난 언제든 환영이야. 다다가 쓰던 방 비어 있어. 설마, 피렌체에 와서 다른 곳에 묵는 건 아니겠지?]

셀레나의 유쾌한 농담에 다연은 머릿속에서 자혁을 얼른 털어버릴 수 있었다.

[셀레나의 집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빈방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다행이다.]

[올라가서 짐 풀어.]

셀레나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다연은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다연이 머물렀던 방에 들어섰다. 짐도 풀지 않은 채 다연은 그대로 침대로 가 풀썩 누웠다.

얼굴을 파묻은 침구에서 셀레나가 좋아하는 장미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안도감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다시 이탈리아로 오는 데 긴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

너무 피곤한데도 다연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연은 억지로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림 도구만 챙겨서 광장으로 가 7번 버스를 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건데도 다연을 기억하는 버스 기사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그동안 있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2년 전과 똑같았다.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는 걸음이 조급했다. 다연은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언덕이 내려다보이는 담에 도착했을 때 다연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어떤 의욕도 없었던, 불행의 늪에 빠져 있던 다연을 일깨웠던 일상의 평온함은 그대로였다.

다연은 담에 위에 앉아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해 질 무렵 맛있는 냄새가 마을 곳곳에서 풍겼다.

“꼬르륵.”

다연은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에 얼른 셀레나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집에 와줘서 고마워. 다다.]

집에 돌아왔을 때 셀레나가 해주던 말도 똑같았다.

다연은 종일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2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다다가 왔으니 오늘은 라자냐를 먹어야지.]

[셀레나가 해준 요리는 다 좋아.]

성수기라서 셀레나의 하숙집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늘 고요한 집에 있다가 여러 나라에서 이곳으로 여행 온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니 다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끌벅적한 와중에 호주에서 왔다던 여자가 다연에게 물었다.

[저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하던데 맞나요?]

화가라는 말이 어색해 다연은 대답 대신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셀레나에게 팔면 안 되냐고 물어봤었어요. 단칼에 안 된다고 했어요.]

옆에 있는 셀레나를 바라보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신, 이 그림이 있는 책을 사라고 해주더라고요.]

[책이요?]

다연이 놀란 눈으로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일러스트집을 출간했다고 셀레나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곳을 떠난 이후 셀레나에게 따로 연락을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셀레나를 바라보자 해맑게 웃으며 책 한 권을 꺼내 놓았다.

다연의 첫 번째 일러스트집 이탈리아 피렌체 편이었다.

다연이 놀란 눈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셀레나…… 이걸 어떻게…….]

[어떤 한국인 관광객이 이 책을 보여주면서 다다가 그려준 그림이랑 똑같다고 하잖아.]

당연했다. 같은 사람이 그렸으니까.

[이 책을 보고 이곳에 여행 오고 싶었대.]

자신의 여행 일러스트집을 보며 진짜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니.

다연은 자신의 일러스트집을 보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에 가서 꼭 한 권 보내달라고 했더니 잊지 않고 보내줬어. 그리고 그리스, 프랑스 편도 보내줬어.]

셀레나가 꺼내놓은 제 일러스트집을 보며 다연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걸 보고 다다가 여행을 잘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다연은 뭔가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꼴사납게 눈물을 흘릴 거 같아 다연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피하듯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 * *

다음 날부터 다연은 매일 셀레나가 건네주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챙겨 들고 광장에서 7번 버스에 올랐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가다 보니 이제는 버스 기사들이 먼저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넸다.

다연은 오늘도 옅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버스에 내리며 인사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뒤따라오는 사람 한 명 없는데도 다연은 자꾸 뒤돌아보았다.

“앞만 보자, 앞만……. 하아.”

어느덧 다연의 지정석이 되어버린 담벼락으로 다가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불안정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이었다.

잠시 그 풍경을 즐기다 다연은 가방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

막상 워터브러쉬를 손에 들면 다연은 어떤 것도 그리지 못했다. 하얀 도화지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다연은 결국 멍하니 앉아만 있다 해가 질 무렵 셀레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이 넘도록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다연은 매일 그림 도구를 챙겨서 나갔다.

지혜에게 말했던 것처럼 다연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붓을 들고도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내가 당장 아무거나 말하고 그려서 보내라고 하면 그럴 거야?”

지혜가 농담으로 한 말에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했었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아무거나 그리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다연은 지혜에게 이메일이 아닌 전화를 걸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목소리의 지혜는 조금 잠겨 있었다.

[그래, 스페인은 여전히 좋아?]

“네. 여전해요”

다연은 이탈리아에 있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지혜가 여기저기 말할 사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는 괜찮아 보이네.]

“그럼요. 족쇄 같았던 계약도 끝내고 홀가분하게 왔는데 괜찮아야죠.”

[안 그래도 이메일 보내려던 참이야.]

여전히 목소리는 잠에 취한 듯해 보였지만, 지혜의 기분은 괜찮은 것처럼 들렸다.

[이번에 연인에 들어간 일러스트 몇 개 뽑아서 소품 제작하자고 영업팀에서 제안을 해왔어.]

반가운 소식이었다.

[온라인 강의 반응이 좋아서 추가 강의 요청도 있어.]

다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억지로라도 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못 하겠다고 거절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다연의 침묵이 길어지자 지혜가 먼저 말했다.

[지금 당장 하라는 거 아니야. 생각해보라는 거지.]

“……네.”

[우선 소품 제작해야 하니까 그거 먼저 결정하자. 정리해서 메일 보낼 테니까, 그중에 어떤 게 마음에 드는지 보구선 알려줘.]

“……네.”

다연은 조금 망설이다 짧은 대답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다연은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연은 지혜가 보내 준 파일을 보고 고민하다 인쇄 버튼을 클릭했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라 오랜 시간 혼자서 차지 할 수 없었다.

인쇄된 출력물을 가지고 다연은 식탁에 앉았다.

샐러드를 만들던 셀레나가 힐끔 보더니 물었다.

[새로 나올 책이야?]

[응, 내 그림으로 소품을 만들자고 해서…. 무엇이 좋을지 결정해서 알려 달래. 그래서 지금 보는 중이야.]

[어떤 게 있어?]

다연은 영업팀에서 제안했다는 소품과 자신의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우산, 컵 그리고 액자?]

귀 기울여 듣던 셀레나는 다연의 옆으로 다가와 그림을 보았다.

[나라면 우산.]

왜 하필 우산인지.

[왜? 여긴 비도 거의 오지 않잖아.]

[성수기가 끝나고 겨울이 오면 여기도 비가 올 거야. 우기처럼.]

셀레나는 다연의 그림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이 푸른 바다 그림이 한국이야?]

이번에 출간될 ‘연인’ 그림이었다. 제목과 챕터별로 들어갈 그림을 본 셀레나는 사람보다 풍경에 더 관심을 보였다.

다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국.]

[멋있어.]

셀레나는 다연의 옆에 있는 의자를 빼서 앉더니 그림을 다시 찬찬히 보았다.

[다다, 한국 풍경을 그려봐.]

[응?]

[그림 그리라고.]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에게 한국 풍경을 그리라니.

한국에 돌아가라는 말인가 싶어 다연이 눈을 깜박이며 셀레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다는 그림을 그려. 나는 저녁 만들 테니까. 그리고 소품 제작은 우산.]

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가서 샐러드를 마저 만들었다.

다연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그림 도구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렸다.

우습게도 다연은 마당에 작은 올리브 나무가 있는 이곳 피렌체, 셀레나의 집에서 한국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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