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자혁은 천천히 눈을 뜨고선 주주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지 못한다는 소문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놀라고 영문을 모르겠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신지 인상을 찌푸리고 계시는 얼굴도 보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계신 분도 있군요.”
워낙 오래된 소문이라서 그런지 자혁의 말을 한 번에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구재식이 포섭해 둔 주주들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앞에서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숨기려고 작정한 사람의 표정을 제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혁은 숨기려고 했던 표정조차 다 드러났던 다연이 떠올랐다.
“조금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보여주듯이. 저는 매번 살해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매번 웃으며 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은아버지가 그 범인입니다.”
주주들의 눈에 동정의 빛이 어렸다. 그래서 자혁이 일부러 작은아버지라 강조하는 부분은 의식되지 않았다.
“제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드린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통장을 두둑이 채워드리겠다고요. 제가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사업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젊은 사장은 그 약속 하나만은 지금까지 철석같이 잘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도 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한강 기업의 대주주로서 그리고 경영인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니 제 아내에 대한 의문은 더는 언급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통장을 지켜야 하듯 제 아내를 지키는 일 또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자혁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 *
주주총회가 끝나자마자 자혁은 경찰서로 향했다.
구재식이 아닌 김태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유치장 철창을 사이에 두고 김태원이 당연하듯 요구를 해왔다.
“사실대로 진술 다 했으니까 이제 여기서 빼줘야지.”
“변호사 붙여줬잖아.”
“그 변호사가 나를 빼내 줄 생각을 안 하잖아. 빼준다고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죄를 짓고도 당당한 행동에 자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변호사를 붙여 준다고 했지, 감옥에서 빼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는데.”
“뭐, 뭐야?”
김태원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자혁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자혁은 그 손목을 잡고 한쪽으로 비틀었다.
“아, 아. 너 이 X끼, 이거 안 놔! 어차피 공소 시효 지났으니 너! 두고 봐.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너!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자혁은 힘을 더 세게 주었다.
김태원의 비명 소리가 더 커졌지만, 그 누구도 와보지 않았다.
“아, 내가 깜박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자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범인이 외국에 있었다는 게 증명되면 공소 시효가 멈춘다 하더라고.”
“뭐, 뭐야?”
“그러니까, 아무리 유능해도 상세하게 자백하고 증거까지 제출한 범인을 감옥에 빼줄 변호사는 없다는 얘기야.”
잡고 있던 손목을 거칠게 놓아주고 자혁은 뒤돌아 나왔다.
경찰서를 나오는데 이제 막 한주연과 모친이 연행되고 있었다.
저 모습을 한다연이 봐야 했는데.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억울하다고 악을 쓰는 모녀를 보며 자혁은 다시금 분노가 끓어 올랐다.
저들은 겨우 이 정도에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한다연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여태껏 숨어 살았다. 저들이 뭐라고.
“구자혁!”
문 앞에 서 있는 자혁을 발견한 주연이 경찰을 뿌리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자혁의 근처에 닿지도 못한 채 가드에게 제지당했다.
“한다연 어디 있어! 어디로 빼돌렸냐고!”
가드에게 벗어나려 수갑이 채워진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주연이 소리를 질렀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 자혁은 몸을 돌렸다.
“감히 나에게 누명을 씌워!”
자혁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연을 노려보았다.
서늘한 시선에 주연이 흠칫 하는 것도 잠시 주연은 다시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나가기만 해봐! 너희 둘! 갈가리 찢어 죽일 거야.”
자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내 말이 우스워? 두고 봐. 내가 진짜 죽이나 안 죽이나!”
“네까짓 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지은 죄가 없는데 내가 왜 못 나가!”
주연이 다시 자혁에게 달려들려다 이번에는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한주연 씨, 지금 연행되는 중입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누명이라고요!”
“그건 조사해보면 될 일이고. 우리가 증거도 없이 손목에 수갑 채운 줄 아십니까? 갑시다.”
자혁은 제 옆에 서 있는 변호사를 보며 말했다.
“고소장 하나 추가해. 살해 협박.”
“네.”
경찰한테 끌려가던 주연이 몸을 돌렸다.
“방금 살해 협박죄가 추가되었다는 걸 모르는가 보군. 더구나 경찰서 앞에서 내 변호사와 경찰관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 그건.”
이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자각한 주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아내도 죽인다고 했었지, 아마?”
“……!!”
“내가 위임장을 받아서 고소장은 두 장 날아갈 거야.”
먼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던 경옥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걸 본 주연이 이번에는 사정했다.
“한 번만…… 선처해줘.”
“소문 들어 알지 않나? 내가 그런 감정을 모른다고 말아야. 그쪽이 낸 소문이니까 잘 알 텐데.”
자혁은 몸을 완전히 돌려세우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띠링.
오후 7시가 되자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개강]
자혁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켜고 한 손으로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다 멈칫했다.
“나 부탁이 있어요.”
“내 앞에서 이거 안 끼면 안 돼요?”
불쑥 떠오르는 목소리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움켜쥐었다.
“하아.”
깊은숨을 내쉬고선 휴대폰 앱을 켰다.
미리 신청해 두었던 다연의 온라인 클래스가 개강하는 날이었다. 첫 번째 강의가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경주입니다.]
긴장한 듯 미세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다연인데.”
목소리라도 들으니 숨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한 번 결제하면 5개월간 들을 수 있다고 했던가?
“5개월…….”
자혁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중얼거렸다.
* * *
화재가 났던 모델하우스 철거가 끝난 현장을 확인한 자혁은 차에 타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유선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선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눈을 지그시 감자 다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이경주입니다.]
“한다연인데.”
[오늘은 다섯 번째 수업인데요. 배운 대로 연습 많이 해보셨나요?]
자혁이 다시 눈을 뜬 것은 회사 앞에 차가 멈추었을 때였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경수를 호출했다.
“미미 체험단 보고서야.”
결재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경수는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만족도 조사 결과가 아주 좋아.”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내가 만들었지, 내가.”
경수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가볍게 툭툭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내가 뽑았고.”
“나 욕 좀 해도 되냐?”
“나, 사장이야.”
경수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오랫동안 속 썩이던 작은아버지는 구속되어 죗값을 받을 것이고, 회사는 아주 잘 굴러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안 괜찮을 이유가 없었다.
“나도 듣는 귀가 있어. 주주총회에 다연 씨 일까지. 그런데…… 너 진짜 괜찮아?”
자혁의 대답이 믿어지지 않는지 경수가 한 번 더 물었다.
“이제 다른 프로젝트 들어가자.”
자혁은 일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경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미미2 만들라는 얘기는 아니지? 미미 이제 세상에 내놨어. 업데이트도 해야 하고…….”
“미미 말고 사내 프로그램.”
“그건 전산팀이 따로 있잖아.”
“화상 회의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자혁은 막무가내였다. 인상을 잔뜩 구기는 경수 앞에 그는 서류 하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내가 원하는 거 정리해 둔거야.”
서류를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고 경수는 인상을 더 구겼다.
“화상 회의는 시중에 있는 프로그램도 많잖아. 그냥 그거 사서 쓰자, 응?”
“한 달 준다.”
“미쳤어! 가장 기본적인 것만 만든다 해도 한 달인데. 네가 얼굴만 보이는 걸로 만족할 인간이냐고. 분명히 이것저것 넣어놨을 거 아니야.”
미미를 만들라고 했을 때도 경수는 지금과 같은 반응이었다.
절대 못 한다고 우는소리를 했지만, 경수는 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것도 자혁이 제시한 기간 내에 모두 해냈었다.
“시중에 있는 프로그램 다 써봤어.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니야. 그러니 네가 만들어. 전자결재 시스템도 손 좀 봐야겠더라.”
“하아. 미미 만족도 결과만 나오면 휴가 준다더니. 이건 뭐 회사에서 살라는 이야기잖아.”
경수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원들 데리고 호텔 컴퍼런스룸으로 들어가.”
“거기가 호텔이냐? 창살 없는 감옥이지.”
경수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자혁이 정리했다는 서류를 펼쳐보았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 그러네.”
자혁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 책상으로 가며 단호하게 말했다.
“구자혁, 네 머리는 철저하게 사업용으로만 돌아가기고 프로세스 된 거야? 사람이 쉬기도 해야지. 제발 휴가 좀 가자.”
경수가 앓는 소리를 했다.
“휴가는 내가 먼저 가야지. 사장인데. 휴가 빨리 가고 싶으면 빨리 만들어. 그럼 너도 휴가 갈 수 있어.”
“너 진짜 미친 거야? 그런 거야?”
“내가 너라면 이럴 시간에 빨리 가서 만들겠다.”
자혁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의자에 편히 기대었다.
휴대폰을 들어 온라인 클래스 앱을 켰다. 그리고 다연의 강의를 길게 꾹 눌러 재생시켰다.
경수가 거친 욕을 하며 나가는 것 같은데 자혁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경주입니다.]
“한다연인데.”
[드디어 마지막 수업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 피오솔레 언덕에서처럼 놓은 곳에서 내려보는 풍경을 그려볼 거예요.]
자혁의 모든 일상에 다연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귓가에 울렸다.
예년보다 늦었지만, 더 지독한 비를 쏟아냈던 장마가 끝났는데도 자혁의 불면증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