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76)
  • 69화

    지혜는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림을 봉투 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곤 다연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국에 있으면서 그린 ‘연인’ 말이야. 출간은 포기할 줄 알았어.”

    다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림을 시작할 때 자신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상하게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렸고,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긴장했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스스로 선을 그어두었는데도 그에게 흘러가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여백 위에 제 마음을 채우고 나면 그에게 가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다른 것으로 대체 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제 마음은 점점 넘치는데 자신처럼 넘치는 마음이 아니라 때때로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었다.

    서류상 부부일 뿐 그에게 정조나 의리 따위를 요구할 수 없는 사이였다.

    아니, 처음부터 마음 같은 것을 요구할 사이가 아니었다.

    계약서만 있을 뿐.

    그리고 결혼 계약에 사인하는 것이 쉬웠던 이유는 감정이 없어서였다.

    사인할 때와 달리 지금의 다연에겐 감정이 생겼으니 같은 마음을 가져달라는 것은 계약 위반이었다.

    정말 계약을 끝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나는 왠지 이 시리즈가 계속될 것 같아. 다음은 테마는 ‘이별’ 어떻니?”

    “그것보다…… 국제 커플 이야기를 그려볼까요? 여행지에서의 불같은 사랑 같은 거요.”

    “뭐?”

    다연의 농담에 지혜가 기가막힌 듯 웃었다. 다연도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웃으며 인사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산채 정식집 퇴촌댁한테도 인사를 했고, 몇 달 동안 상담해주었던 정신에게도 다녀왔다.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사하고 싶은 사람에게 인사를 했으니 이번에는 출국하더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없어야 했는데.

    이상했다.

    마음이 여전히 무거웠다.

    아무래도 외국으로 가는 건 이유를 떠나서 마음이 무거운 것이 당연한 것인가 보다.

    다연은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안주가 바닥을 보였다. 테이블 위에 빈 캔이 쌓이는 만큼 다연의 웃음도 늘었다.

    “내일 못 일어나서 비행기 확 놓쳤으면 좋겠다.”

    “새벽 비행기도 아니고 오후 2시 비행기를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요?”

    “내일 공항까지 배웅해줄게.”

    “아니요. 아무도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다연은 웃으며 말했다.

    “왜? 가지 말라고 붙잡을까 봐?”

    “아니요.”

    “그럼?”

    “나 좀 붙잡아 달라고 매달릴까 봐요.”

    진심을 말해놓고 다연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소파에 길게 누웠다.

    “침대 가서 편안하게 자.”

    “…….”

    침대에 눕더라도 편안하게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다연은 그대로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 * *

    다연은 공항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공항에 오기 전 진 회장에게 인사했었다. 이로써 한국을 떠나며 인사해야 할 사람에게는 모두 한 것이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연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몇 시간 째 고민중이었다. 아니 며칠째 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인사를 하지 못한 딱 한 사람.

    구자혁 때문에.

    오늘, 아니 몇 시간 뒤면 더는 켜보지 않을 전화기였다.

    다연은 결심이 선 듯 자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가 나올 때 쯤 오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해.]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어쩜 이렇게도 한결같은지.

    “저예요. 한다연이요.”

    [알아.]

    “다른 사람한테는 다 인사했는데……. 당신한테만 인사를 못 했어요.”

    [잘 가.]

    눈앞이 또 뿌옇게 흐려졌다. 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애써 참았다.

    “네, 저는 잘 갈 거예요.”

    [그래.]

    “인사했던 모두에게 잘 지내라고 했어요.”

    [잘 지내.]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는 마치 답을 정해놓은 사람처럼 다연이 하는 말마다 빠르게 대답해주었다.

    “네, 저는 잘 지낼 거예요. 그런데요. 구자혁 씨는 잘 지내지 말아요.”

    […….]

    “절대로……. 잘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다연.]

    “내 인사는 이거였어요.”

    다연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 * *

    전화는 끊어졌는데 자혁은 휴대폰을 그대로 귀에 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한쪽에 찌르르르 통증이 일었다.

    그녀의 말대로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내 외면했던 이유를 한다연이 마지막 인사로 제 심장에 새겨넣었다.

    한다연이 내 곁에 없으니까.

    -똑똑.

    노트 소리가 들리고 집무실 문이 열렸다.

    자혁은 그대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열린 문으로 뛰쳐나갔다.

    “사장님, 주주총회 시간이!”

    오후에 있을 주주총회 일정을 보고하러 들어 온 이 실장의 목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절대로……. 잘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울음을 참는 듯한 다연의 목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솔직하게 말했던 그녀처럼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제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뻔뻔하게 그러고 싶었다.

    자혁은 미친 듯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 공항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두고 출국장으로 뛰었다.

    안내판을 확인하면서 다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연이 탄 비행기가 이륙 중인 것을 확인하고서도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휴대폰을 든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혁의 시선이 창밖으로 이륙하는 비행기로 향했다.

    * * *

    자혁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늦지 않게 주주총회가 열리는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이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혁의 곁에서 조용히 아까 하지 못한 보고를 마쳤다.

    그 모습을 보며 그곳에 있는 주주들이 수군거렸다.

    구재식은 오늘만 기다렸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자혁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도 오늘로써 끝이로군.’

    오늘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드디어 조카를 밀어낼 수 있다는 기쁨에 구재식은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한주연은 구린 일 처리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누군가를 함정에 빠트리는 일에 머리가 잘 굴러갔다.

    이번 모델하우스 화재에서 생각해낸 방법은 재식도 감탄할 정도였다.

    자신의 심부름만 하던 제 어미와는 차원이 달랐다. 재식은 마석 건설에 굵직한 일을 던져주는 걸로 주연과의 끈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자혁이 막지만 않았어도 재미있는 기사가 많이 올라왔을 텐데 그 부분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자혁을 사장 자리에서 쫓아낸 후 박 기자가 기사를 더 풀기로 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를 더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주주총회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자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바쁘신 와중에도 정기 주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작에 앞서 주주분께 보여드릴 영상이 있습니다.”

    조명의 조도가 서서히 낮아지더니 빔프로젝터에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구재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인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구재식의 차였다.

    날짜를 보니 2년 전쯤 남해에서 구자혁을 죽이기로 계획했던 시기였다.

    “저, 저건!”

    언제 왔는지 가드 두 명이 양쪽에서 구재식을 에워싸고 있었다.

    “멈춰! 영상 멈추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야! 이건 음모야!”

    “작은아버지. 영상은 끝까지 보시고 말씀하시죠.”

    자혁은 일부러 공적인 위치가 아닌 작은 아버지라고 불렀다.

    저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된다면 작은아버지가 일찍 부모를 여읜 조카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단순히 부사장이 사장을 치려 했던 그룹 내 암투에 그치지 않고 친족 살인 교사로 더 부각하고 싶은 것이었다.

    겨우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주주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선 재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양손을 주먹을 쥔 채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그만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아버지. 그러게 경영권은 저에게 주셨어야죠. 새파랗게 어린놈이 아니라.]

    이어서 요란한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구재식은 눈을 번쩍 떴다.

    친족 살인 혐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구재식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살인 교사 혐의 및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말하는 동안 구재식은 그저 멍하니 자혁을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어떻게…….”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양팔이 결박된 채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구재식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대회의실은 주주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웠다.

    자혁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작은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자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자혁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구재식의 편에 섰던 주주가 마이크를 잡았다.

    “얼마 전 모델하우스 화재 사건의 진범이 구자혁 사장의 부인이라던데 사실입니까?”

    “그것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영상을 마저 보시죠.”

    영상은 다연과 주연이 만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신발을 갈아 신는 장면과 그리고 신발을 버리는 다연의 모습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신발을 주연이 주워서 자신이 신었다. 모델하우스 앞을 서성이는 한주연의 모습이 짤막짤막한 영상으로 줄지어 이어졌다.

    “이 사람은 제 아내의 의붓언니로 부모님의 재혼 후 지속적으로 아내를 괴롭혀 왔습니다. 이번 화재도 구재식의 사주를 받았지만, 아내를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회의실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아프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계모와 의붓언니의 괴롭힘으로 생긴 질환이었지만, 현재는 완치되었습니다.”

    “구 사장도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어요. 사람 표정을 못 읽는다는데 우리도 더는 소문에 휘둘리기 싫으니. 오늘 속 시원하게 증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예상한 것이었지만, 막상 닥치지 자혁은 긴장되었다.

    진 회장을 바라보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혁은 잠시 눈을 감고선 숨을 골랐다. 눈을 감으니 다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놀라서 눈이 커진 한다연.

    까르르 웃는 한다연.

    그리고 눈물 흘리는 한다연.

    보고 싶었다. 한다연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