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혼자 왔어?”
퇴촌댁은 주차장을 힐끔 한 번 바라보고선 다연에게 물었다.
다연은 대답 대신 품에 안고 있던 포장지에 싸인 액자를 퇴촌댁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이거 때문에 왔어요.”
“이게 뭐야?”
퇴촌댁은 다연이 건네준 것을 받아들고선 물었다.
퇴촌댁의 표정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아 다연도 소리 없이 웃었다.
“지난번 말씀하신 밥값이에요.”
“이 맛에 낚는다니까.”
퇴촌댁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포장지를 풀었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그림을 보며 퇴촌댁은 탄성을 터트렸다.
“이야! 그림 솜씨가 제법이야. 이걸로 밥 먹고 산다더니 그럴 만해.”
퇴촌댁은 양손으로 액자를 들고 어디에 걸어둬야 좋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 내 방에 걸어 두고 싶은데. 자로고 이렇게 좋은 그림은 여러 사람이 봐야지.”
퇴촌댁의 칭찬에 다연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저기 카운터 벽에다 걸어야겠다.”
어디에 걸지 결정해서인지 퇴촌댁은 그림을 자혁이 매번 올 때마다 들어가는 방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밥 먹고 가. 이번에도 돈 내지 말고 그냥 가. 밥값은 그림으로 받을 테니까.”
진담 같은 퇴촌댁의 농담에 다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에는 받으셔야 해요.”
“아니야, 그림으로 받을 거야. 아니다. 앞으로 내가 밥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공짜로 밥 줄게. 마음 내킬 때마다 그림 한 장씩 그려줘.”
“어떻게 그래요.”
“나중에 유명해지면 그림값이 밥값보다 더 비싸질 거 아니야.”
퇴촌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연은 다시 여기를 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펐다.
다연은 늘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창밖에 보이는 담에는 능소화 꽃은 다 지고 초록이 더 짙어진 잎사귀가 완전히 덮고 있었다.
“당신은 예쁜 꽃 봐, 나는 예쁜 당신 볼 테니까.”
불쑥.
자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다연은 다른 방으로 옮겨가진 않았다.
떠나기 전 인사하러 왔듯이 여기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과도 작별 인사하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퇴촌댁이 내온 밥상은 언제나 정갈했다. 여러 가지 나물과 된장국을 다연은 소중하게 눈에 담았다.
“얼른 먹어.”
“잘 먹겠습니다.”
다연은 천천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식혜까지 다 마셨다.
다연은 두 손으로 밥값을 담은 봉투를 퇴촌댁에게 건넸다.
“오늘은 공짜 밥 먹으면 안 돼요.”
“공짜라니? 그림으로 받는다니까.”
퇴촌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앞으로 여길 못 올 거 같아서요.”
다연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는지 퇴촌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외국에…… 다시 가요.”
다연은 어렵게 말했는데 받아들인 퇴촌댁은 싱겁다는 듯 반응했다.
“난 또 뭐라고. 한국 올 때마다 한 번씩 들르면 되지.”
“오랫동안 안 올 거 같아요.”
“내가 죽기 전에는 한 번 오겠지.”
다연이 곤란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자 퇴촌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빚이 있어야 그거 갚을 생각에 여기 올 핑계라도 되지 않겠어?”
“아…….”
“그러니 이 돈은 안 받을 거야.”
참 이상한 논리에 설득당한 다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네. 빚 갚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한국에 올게요.”
“거봐. 내가 이렇게 사람을 잘 낚아.”
이제야 만족스러운지 퇴촌댁이 크게 웃었다.
밖으로 나오자 잠시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맞고 가기엔 제법 굵은 비가 내려서 다연은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우산은 있어?”
“주차장까지 뛰어가면 돼요.”
“이 비를 다?”
늦게 시작된 장마는 요란했다.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꼭 동남아의 스콜처럼.
퇴촌댁은 지난번 자혁이 미술관에서 사다 준 우산을 다연에게 건넸다.
“이거 쓰고 가.”
다른 우산도 많은데 퇴촌댁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던 우산을 다연에게 건넸다. 오늘 이렇게 가면 여기에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돌려줄 수 없을 거 같아 이왕이면 낡은 우산으로 빌려 가고 싶었다.
“다른 거 주세요. 금방 찢어질 거 같은 걸루요.”
“이게 뭐라고. 우산은 구 사장한테 또 받으면 돼.”
웬만해서는 뜻을 굽히지 않는 퇴촌댁이기에 다연은 머뭇거리다 우산을 받아들었다.
자신은 자혁에게 앞으로 우산을 받을 수 없지만, 퇴촌댁은 그가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받을 테니까.
작은 이기심도 있었다.
다연은 우산을 펼쳤다.
* * *
호텔로 돌아와 다연은 창가 앞에 젖은 우산을 펴놓았다.
옆에는 자혁이 다연에게 사준 우산이 있었다.
그 사이에 쭈그리고 앉으니 꼭 우산 속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우산 속 그림이 조명에 비쳐서인지 안락하게 느껴졌다.
“외국 말고 여기에 숨고 싶네.”
다연은 양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제 무릎 위에 기대었다.
자혁이 사준 우산이 보였다. 꼭 우산을 쓰고선 위로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면… 우산을 잘 들고 있겠어.”
불쑥 떠오른 기억에 다연은 제 입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촉촉했던 감촉과 뜨거웠던 숨결. 아직도 생생하게 제 몸 안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나눈 마음은 사라진 것만 같은데 몸의 기억은 아직도 짙고 뜨겁게 남아 있었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 다연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다리 사이에 파묻었다.
-뚝. 뚝.
굵은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구자혁이 떠올랐다.
미운데, 그가 정말 싫다고 말하고 돌아섰는데. 아직 마음까지 돌아서지 못 했는가 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불쑥 구자혁을 떠올릴지 알 수 없었다.
“하아. 정말 싫다.”
구자혁이, 그리고 한다연이.
다연은 그에게 받은 우산을 손으로 툭 한 번 치고는 일어섰다.
* * *
다연은 예약했던 날짜에 맞춰서 정신의 상담실을 찾았다. 놀란 표정의 정신을 보며 다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네, 다연 씨는요?”
“잘…… 못 지냈어요.”
솔직한 대답에 정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연은 자신이 그린 엽서를 내밀었다.
“인사하러 왔어요.”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입니까?”
“네.”
정신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에게 개인적인 마음을 가졌으니 자신은 다연의 주치의로서 자격 상실이었다.
다연의 마음에 자신은 없으니 남자로서도 자격이 없었다.
“선생님께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날 화를 내는 게 아니었어요. 화는 다른 사람에게 났는데 선생님께 화풀이를 했어요.”
“그게 제 일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 아픈 마음 들어주는 거요.”
정신은 다연의 주치의로서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정신과 의사로는 기억되고 싶었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처음 왔을 때 선생님은 저를 몰랐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 딱 그런 얼굴이셨거든요.”
“네, 솔직히 상담 기록지 보고 어려운 환자구나 싶었습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많이 답답하셨을 거예요.”
“이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 네, 정말 답답했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다연은 정신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제 괜찮은 겁니까?”
“네.”
한 사람만 빼고요.
다연은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스스로 치료법을 찾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다연이 내민 손을 잡고선 정신은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요.”
“선생님도요.”
인사를 마치자마자 다연은 미련 없이 뒤돌아 나왔다.
정신의 말처럼 잘 지내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 * *
문을 열자 지혜는 오늘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왔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을 테이블 위로 하나씩 꺼내놓으며 지혜는 활짝 웃었다.
반면, 다연의 눈은 동그래졌다.
“설마…….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지혜가 사온 것은 죄다 안줏거리였다. 꼼장어, 족발 그 외에도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로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너 내일 출국이라며. 스페인 가면 또 한국 음식 먹고 싶을 거 아니야. 꼼장어 많이 먹고 가라. 특별히 2인분 사 왔으니까.”
지혜는 캔 맥주를 따서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다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끼리 축배는 들어야지.”
“뭘로요?”
“스페인편 일러스트 출간, 온라인 클래스 개강 축하합니다. 이경주 작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집장님.”
조촐한 축하 파티였다.
지혜는 캔에 든 맥주를 절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덤덤히 안주를 먹는 다연을 보며 지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 맞다.”
다연은 한쪽에 두었던 봉투를 지혜에게 건넸다.
“술에 취해서 잊어버리기 전에 줄게요.”
“이게 뭐야?”
지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봉투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시작했으니 끝은 내야죠. ‘연인’ 시리즈 들어갈 일러스트 완성했어요.”
“이 와중에 그림이 그려지던? 하여간 미련한 건지 독한 건지.”
다연이 그린 그림을 보며 지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지막 장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것을 보며 지혜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게 두 사람의 엔딩이야?”
그런 거 아니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구자혁이 공항에 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
다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꼼장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당분간 그림 그리는 건 쉬려고요.”
“프리랜서의 좋은 점이 그거잖아.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거. 그러니까 그냥 즐겨. 그러다 돈 필요하면 다시 그림 그려서 보내고.”
“정말 그래도 돼요?”
다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내가 당장 아무거나 그려서 보내라고 하면 그럴 거야?”
“아니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니 최근 그린 그림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구자혁, 아니 그의 비서가 매월 보내주는 돈을 쓰고 싶지 않았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 다연이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그림은 첫 일러스트집이었던 이탈리아편과 한국에 와서 그린 ‘연인’이었다.
이탈리아편은 셀레나의 말처럼 모두가 여행자라면 다연은 자신의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렸던 것이었다.
연인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그렸어도 알지 못했던 그림 속에 담긴 마음이 다연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