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밖으로 나오자 다연의 시선에 구자혁이 자신에게 붙인 사람이 보였다. 흐린 날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채 다연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기사인지 아니면 한주연이 붙인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차가 보였다.
다연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
다연은 구자혁이 고용한 가드에게 다가갔다.
“고생이 많으세요.”
“아, 네.”
당황하던 가드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구자혁 씨한테 저 좀 데려다주세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다연은 뒷좌석에 타기 전 반대편에 있는 차를 한 번 노려보았다.
‘이 사진 받고 한주연이 거품 물겠네.’
한강 기업을 방문하는 것은 오늘로 세 번째였다. 여전히 거대하게만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가드 때문인지 여기에 온 첫날처럼 모든 문이 프리 패스처럼 활짝 열렸다.
보안 문도,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도.
점점 올라가는 층수를 보고 있으니 다연은 마치 구자혁을 처음 만나는 날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양쪽으로 열린 문 사이로 이 실장이 보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실장은 여느 때처럼 정중했다.
다연은 가볍게 인사하고 그를 따라갔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다연이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는 구자혁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는 서류상 남편이.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집무실 안에 두 사람만 있었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난 날처럼 다연은 긴장감으로 명치 아래가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서류에 사인을 마친 그가 고개를 들어 다연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시선을 다연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다연을 마주 보며 섰다.
그날처럼 그가 오른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편입니다.”
마치 거래처의 누군가를 대하듯 무심하고, 오만하게.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던 모습까지 다 보았고, 몸까지 섞은 사이임에도 그가 참 멀게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란, 한순간에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는 사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앉지.”
다연은 그를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했던 말을 서둘러 꺼냈다.
“당신이 변호사랑 비행기 티켓 보낸 거 알아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다연은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얼른 다음 말을 이어서 했다.
“이혼 조정 신청서를 제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 두 사람 모두 법원 앞에서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 정도는 협조해주길 바랄게요.”
“원하는 게, 그게 다인가?”
“……네.”
그에게 할 말은 여기까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자 커다란 손이 다연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자혁이 느릿하게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3분.”
그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다연은 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앉지. 아무리 서류상이라고 해도 남편 사무실에 와서 1분 30초 만에 나가는 아내는 없을 테니까.”
강요와 빈정거림이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집요했다.
“앉지. 내 말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에게 잡힌 손목에 발진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이거 놓으면요.”
자혁은 손을 뗐다. 그리고 금새 붉어진 다연의 피부를 보며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터폰을 눌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비서가 물을 가져다주자 다연은 약통에서 약을 꺼내 먹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약이 잘 넘어가지 않아 다연은 물 한 컵을 모두 마셔야 했다.
“이제 할말 해요.”
다연은 발진이 올라온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가리곤 말했다.
“원만한 이혼 조정을 원한다고 했던가?”
“네.”
“내 조건은 이거야.”
그는 다연에게 위임장 하나는 내밀었다. 부친이 남긴 모든 일에 대한 처리를 법무법인에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연은 구자혁을 노려보았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 했을 텐데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지?”
“이것 보세요. 구자혁 씨.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다연은 양손을 말아쥐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고에 부모님이 죽은 게 내 잘못인가?”
“……!!”
너무 기가 막혀서 다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매번 마석 건설 그 여자한테 휘둘리고 함정에 빠지면서. 이번 일, 당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상관하지 마요.”
“어떻게 상관을 안 해. 아직은 서류상 내 아내인데. 지라시에 말도 안 되는 말이 사실인양 오르내리는 꼴을 더는 못 보겠거든, 내가.”
억울한데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오전에 진 회장이 내밀었던 비행기 티켓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얌전히 협조해. 당신이 여기 있는 거 하나도 도움이 안 돼. 굉장히 걸리적거려.”
“말을 꼭……. 이렇게밖에 못 해요?”
“싫어? 그러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서류상으로 완전히 남남이 될 때까지. 그리고 내가 이혼에 순순히 협조할 생각은 하지 마.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이라서 이 걸리적거리는 게 다 풀릴 때까지 이혼 안 해줄 수도 있어.”
결국, 다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한국에 있으려면 그의 집이었고, 그게 아니면 외국으로 가야 했다. 2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게 없었다.
“선택해. 여기에 사인하고 출국하든가, 아니면 나와 한집에 있든가.”
“당신이…… 정말, 싫어요.”
그는 대답 대신 위임장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싫은 사람과 한집에 있는 것보다 출국이 더 쉽겠군.”
다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인했다.
사인을 마치자 더는 그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다연은 가방 안에 있는 것들을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오늘 금고에서 꺼낸 것과 메모리 카드까지도.
다연은 일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얼굴 볼일 없길 바래요.”
다연은 차갑게 돌아서 집무실을 나왔다.
등 뒤로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변호사 오라고 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 *
다연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대놓고 가드가 붙었다.
그가 내민 위임장에 사인을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주고 왔어도 다연에 대한 그의 믿음은 겨우 이정도였다.
보호를 가장한 감시.
“모시겠습니다.”
자혁과 대화에서 그나마 있던 기운마저 소진해버려서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다연은 순순히 가드가 열어준 차 안에 올라탔다.
호텔로 돌아온 다연은 쉬는 대신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2년 전처럼 인사도 없이 출국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산채 정식집 사장인 퇴촌댁이었다.
다연에게 밥값 대신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었다.
하얀색 종이를 펼쳐 놓고선 다연은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워터브러쉬를 손에 들었다.
다연의 손이 움직일수록 흰 여백 위에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다연은 며칠 동안 호텔 안에서 그림만 그렸다.
* * *
다연이 집무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자혁은 냉정해지자고 자신에게 계속 주문을 외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다연의 눈에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위임장에 사인하던 작은 손의 떨림이 계속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하아.”
자혁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다시 힘없이 아래로 툭 떨구었다.
방해된다고 자신이 직접 다연에게 말했었다.
“어쩌려고……. 하아.”
다연에게 달려간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내놓고 간 것들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벌 받을 수 있도록. 자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자혁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인터폰을 들었다.
“TF팀 30분 뒤 회의 소집합니다.”
자혁은 모델하우스 화재 사건의 진범도 찾아야 했다. 심증으로는 누구의 짓인지 알았지만, 확실한 물증과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녀를 잃은 슬픔에 울 시간 따위는 없었다.
* * *
다연은 어디선가 메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차에서 내릴 때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메리의 꼬리가 저 멀리서 보였다.
가드에게 메리 좀 쫓아주세요라고 부탁할 수 없어 다연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퇴촌댁에게 줄 액자를 품에 꼭 안고선 다연은 메리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들키지 않고 반 정도만 가면 나머지 거리는 메리가 뛰어온다고 해도 식당 안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연은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살금살금 걸었는데도 메리는 다연을 보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메리야, 제발…….”
다연은 가게 쪽으로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까이 다가온 메리는 반갑다고 꼬리는 흔들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조금 멀리 떨어진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
한참을 서 있어도 메리는 다연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다연은 조금씩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리는 거리를 유지한 채 다연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다연과 눈이 마주치면 흔들고 있던 꼬리가 모터가 달린 것처럼 더 세게 흔들어주었다.
그런데도 메리는 지난번처럼 다연에게 격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착하네, 메리.”
칭찬이라는 걸 알아들었는지 메리가 꼬리를 흔들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메리는 다연이 알던 모습으로 퇴촌댁에게 달려들었다.
“메리가 이 이쁜 누나랑 잘 지내는 법을 알았구나. 기특한지고.”
다연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 퇴촌댁이 메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었다.
“잘 지내는 법이요?”
“말 못 하는 짐승이어도 아는 게지. 반가운 마음에 달려들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줘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 말이야.”
“아…….”
“이렇게 서로 잘 지내는 법을 알아가는 게지.”
다연은 메리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자신을 반가워하는 메리의 마음을 다 받아 줄 수 없어서. 마치 짝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은 마음을 품게 해서.
“사람도 그렇잖아.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랑 잘 지내는 법을 알 턱이 있나.”
“……네, 그렇죠.”
“자꾸 보고 겪다 보면 아는 게지. 이 사람은 이렇구나, 저 사람은 저렇구나.”
퇴촌댁이 간식으로 개껌을 주자 메리는 꼬리를 흔들며 껌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에 올 때 메리 줄 개껌 하나 사 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는데 퇴촌댁은 다연을 보자마자 다음을 이야기했다.
다연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