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76)
  • 66화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나오자 진 회장이 낯선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혜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회장님.”

    “몸은 괜찮은가?”

    “아…… 어떻게 아셨어요?”

    “내 주치의를 보냈으니까.”

    여기저기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다연은 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다연이 다소곳이 앉자 진 회장은 빠르게 말을 꺼냈다.

    “어제 봉투를 봤네. 허락 없이 봐서 미안하네만. 이번일 다연 양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여기, 내 변호사네.”

    “김준호입니다.”

    명함을 내미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연은 명함을 손에 들었다.

    “이분께 위임하고 다연 양은 원래 있던 곳으로 출국하는 게 어떻겠나?”

    “원래 있던 곳이요?”

    “스페인 말이네.”

    명함을 손에 쥐고선 다연은 생각에 잠겼다.

    계약이 끝나면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도망치듯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구자혁과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다.

    다연이 고민하는 사이 진 회장이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일주일 뒤다.”

    “……회장님.”

    “대여금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걸로 계모 쪽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게다.”

    다연은 선뜻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매번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도와주는 것이 진 회장 스타일이었다. 지금처럼 비행기 티켓까지 내밀 성격이었다면 자신에게 봉투를 건네준 날 그 자리에서 열어보게 했을 것이다.

    진 회장이 하루아침에 구자혁 스타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구의 부탁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다연은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회장님.”

    “그래, 다연 양. 뭐든지 말해. 내가 다 도와줄 테니까.”

    “그 사람이 부탁하던가요?”

    “그런 게 아니고, 이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내가 나선 게야.”

    진 회장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순순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물건을 주던 날도 내가 당부했을 텐데.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이야.”

    “네, 회장님은 늘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시는 쪽을 선호하시죠. 그날 말씀하셨던 것처럼요.”

    정곡을 찔린 듯 진 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회장님 곤란하실 텐데 제가 직접 구자혁 씨한테 말할게요.”

    “다연 양.”

    “걱정해주시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연이 옅게 웃으며 말하자 진 회장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자혁은 이 실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자혁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 실장의 보고가 계속될수록 두통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그러니까, 주미가 나 대신 내 차를 타고 간 날 사고의 사망자가…….”

    “사모님 모친 되십니다.”

    “하아.”

    자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제부터 내내 구겨져 있던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자혁은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12년 전 사고는 자혁에게도 충격이 컸었다. 그때의 일로 지금도 지라시에는 작은아버지의 사생아를 죽이려고 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연의 모친이 사망했다니.

    자신도 이렇게 두통이 심해질 정도인데 다연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실장은 다음 보고를 이어갔다.

    “부친 되시는 분의 사고 날짜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사장님이 남해에 가신 날짜와 시간이 같습니다.”

    그것만으로 그 사고가 자혁을 노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장님이 톨게이트를 나간 2분 뒤 사모님 부친의 차가 통과했습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까?”

    “주미 씨 사고를 조사할 때 김태원으로 혼동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혁이 이 실장을 바라보았다.

    “구재식이 부리는 사람이라 김태원인 줄 알았는데.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해 사고의 운전기사였습니다.”

    김태원도 구재식의 사주를 받아 사고를 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해 사고의 운전기사도 구재식과 연관된 사람이라니.

    놀라웠다. 그 사람을 만나서 확인해야 했다.

    우연한 사고였는지 아니면 계획된 사고였는지. 그리고 누구의 차가 타깃이었는지.

    “그 사람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평소와 달리 이 실장이 대답을 망설였다.

    “어디 멀리 있습니까?”

    “사망했습니다."

    기사가 죽었다니. 어제 보았던 영상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김태원처럼 잡아서 경찰에 넘길 수 없으니 이 일을 공론화할 수도 없었다.

    “김태원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경찰서에 들어가 자수하는 것까지 보고 받았습니다.”

    “진행 상황 챙기세요. 아직은 구재식 귀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네.”

    김태원이 한국에 있고 자수했다는 것을 알면 구재식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김태원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증거 없이 진술만으로 구재식을 처벌하는 것이 불가할 수도 있었다.

    이 정도라면 주주총회에서 구재식의 비윤리적인 행동에 직위 박탈 정도는 가능했다. 자혁은 구재식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원했다.

    하지만 김태원의 진술만으로는 잠깐의 이슈 정도로 끝나거나 자칫 작은아버지를 쳐내려는 조카의 계략이라고 수군댈 수도 있었다.

    “다른 증거는 어디까지 제출했습니까?”

    “돌아가신 회장님 병실에 설치했었던 AI 초기 장치에 남은 기록이 증거로 가능한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써야죠.”

    “증거로서 효력이 생기려면 저장된 전체 파일을 제출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 파일을 제출해야 한다는 말에 자혁은 다시 고민해야 했다.

    미미의 초기 모델은 바로 구 회장의 병실에 설치해 두었었다. 책을 읽어주는 역할을 주로 했었는데 몇 번 이용하더니 구 회장은 목소리가 부자연스럽다고 더는 이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했었다.

    비밀유지 조항을 어긴 사람도 있었고, 기계보다 더 기계처럼 책을 읽어주는 이도 있었다.

    구 회장이 가장 만족했던 고용인은 바로 한다연이었다.

    초반에는 약속대로 책을 읽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연과 구 회장은 친구처럼 대화를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나중에는 책은 아예 읽지 않는 날도 있었다.

    고용주로서 일을 하지 않는 거라 여겼지만, 구 회장의 표정은 더 밝아졌었다.

    ‘늙은이 욕심이라면 욕심이겠다만, 네 짝으로 어떠냐?’

    ‘결혼 생각 없습니다.’

    ‘경영권을 굳건히 하려면 결혼은 필수다.’

    ‘그러면 재벌이랑 결혼해야 하는데, 그건 안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너한테는 계산기 두드리는 안사람보다 저리 마음이 투명한 사람이 좋을 거 같구나.’

    ‘투명한 것은 모르겠고, 성격이 급한 것은 알겠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던 말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구 회장이 손주 며느리로 욕심내던 다연과 계약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체 파일에는 구 회장과 다연의 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작되지 않은 파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재식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려면 다연이 가지고 있던 블랙박스 영상 원본이 필요했다.

    큰 충격을 받은 다연에게 구재식을 벌 받게 할 테니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혁이나 구재식이나 마찬가지로 보일 테니까.

    혼란스러운 지금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그녀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보낸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길 바라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 *

    진 회장과 변호사를 돌려보내고 다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부친이 남긴 것을 헛되이 하지 않을까.

    벌 받아야 할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부친이 금고에 남긴 것은 원래 주인에게 가야 했다. 충격을 받았다고, 화가 난다고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연은 지혜가 챙겨주는 죽 한 그릇을 다 먹은 후 대여금고가 있는 은행 지점을 찾아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간 다연은 열쇠에 새겨진 것과 같은 번호 앞에 섰다.

    금고를 본 다연은 난감해졌다.

    대여금고는 다연이 가지고 있는 열쇠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리는 것이었다.

    봉투 안에는 비밀번호 같은 숫자는 없었다. 메모리 카드에도 동영상만 있었지 메모 같은 문서 파일은 없었다.

    “비밀번호라……. 혹시 내 생일인가?”

    다연은 조심스럽게 네 자리 숫자를 눌렀다.

    -삐삐삐.

    정답이 아니었는지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제 부친이 자신에게 힌트가 될 만한 말을 했었는지 다연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고가 나기 전 학교에 가려던 다연이 버스 정류장에서 부친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 부친은 평소와 달리 다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었다.

    그중 숫자와 관련된 대화가 있었던가?

    ‘네 엄마 기일 알고 있지?’

    ‘……네.’

    ‘네 엄마 기일 챙기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내가 지은 죄가 많다. 하여간 네 엄마 기일 잊지 말거라. 꼭이다.’

    있었다.

    숫자와 관련된 대화는 엄마의 기일밖에 없었다.

    다연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네 자리 숫자를 눌렀다.

    -띠릭.

    굳게 닫혀 있던 금고가 거짓말처럼 열렸다.

    기쁨도 잠시 금고 안에 무엇이 있을지 이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연은 심호흡을 했다.

    “후우.”

    다연은 금고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휴대폰이었다. 그 무렵 계모가 잃어버렸다고 했던 그 휴대폰.

    장부와 돈, 그리고 여기저기 돈을 보낸 내역서가 있었다.

    다연은 그것들이 계모가 구재식의 심부름으로 했던 일의 증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극히 일부분이겠지만 그들의 죄를 알릴 수는 있을 것이다.

    부친은 무슨 생각으로 이것들을 여기에 남겼을까?

    진 회장에게 열쇠와 메모리 카드가 담긴 봉투를 남겼을 때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블랙박스 영상을 봤을 테니까.

    혹여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이 증거들이 사실을 밝혀 줄 테니까.

    눈에 둔통이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아린 마음이 한숨에 섞여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한주연이 또다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모델하우스에 불을 낸 범인이 다연이라고 기사를 낼 수도 있었다.

    한주연도.

    구자혁도.

    참 이상하게 얽힌 인연이었다.

    다연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선 금고 안에 있던 것을 모두 가방에 챙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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