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6)

65화

자혁은 쓰러지는 다연을 안아 들고선 침대 위에 눕혔다.

“한다연, 다연아.”

다연의 뺨을 두드려보았지만, 제 손이 닿은 곳마다 붉게 발진이 올라왔다.

“하아.”

병원으로 데리고 사는 것보다 정신을 부르면 수월하겠지만, 그것만은 정말 싫었다.

자혁은 고민 끝에 진 회장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모임 중에 전화를 받은 진 회장은 우선 주치의를 먼저 보내주었다.

의사와 간호사를 배웅하고 다시 다연이 있는 침실로 가던 중 그의 발끝에 무언가 툭 하고 걸렸다.

다연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녀의 휴대폰에는 메모리 카드 꽂힌 젠더가 연결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때 다연의 안색은 많이 창백했다. 울고 있었는지 다연의 눈은 붉어진 채 조금 부어 있었다.

몰아붙일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물어볼 것을.

“하아.”

자혁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그의 시선에 수상한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 들고 안을 보던 자혁은 은행 로고가 새겨진 열쇠를 보았다.

“대여금고 열쇠인데…….”

보통 1년 단위로 대여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닌 장기 대여금고는 이렇게 열쇠에 은행 로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메모리 카드가 들어 있었더 것 같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이 수상한 봉투 안에 열쇠와 다연의 휴대폰에 연결된 메모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자혁은 침실 쪽을 한 번 바라보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다연의 휴대폰을 들었다.

자혁은 다연의 휴대폰을 화면을 켜서 메모리 카드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블랙박스 영상인데……. 이걸 한다연이 왜 …….”

자혁은 블랙박스 영상의 날짜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2년도 훨씬 지난 날짜였다. 다연이 어디로든 출국시켜달라고 했던 시점과 비슷한 시기였다.

자혁은 그때의 기억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구 회장이 다연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던 시기쯤일 것이다. 그때 다연의 부친도 사고로 사망했었다.

그 시기에 다연은 차가 없었다. 그렇다면 블랙박스 영상은 다연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차에서 녹화된 것이라는 말이었다.

“한주연이 이걸로 협박을 한 건가?”

그게 맞는다면 마석 건설을 찾아간 것도 며칠 전 늦은 밤 주연을 만나러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녹화된 내용을 무조건 자신이 확인해야 했다.

자혁은 저장된 영상을 재생해보았다.

영상을 보는 내내 자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구재식과 다연의 계모로 추청되는 여자의 대화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이 영상을 다연이 보았다면 자신에게 먼저 말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다연은 자신에게 이런 영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화를 내고 있었다.

구재식 부사장과 자신이 한강 기업의 경영권을 두고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알면서도 다연은 말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 영상을 다연에게 전해준 사람은 누구일까?

한주연?

아니다. 한주연은 이런 영상이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없앨 사람이지 제 무덤을 스스로 파면서 다연은 위협하는 데 이용할 사람은 아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살과 스트레스로 쓰러진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지 얼굴이 더 갸름해져 있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크게 보였는데……. 그 눈에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자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으으…….”

다연의 신음 소리에 자혁은 침실로 들어갔다. 장마라 비가 오는 날이었고,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 보이는 다연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손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가 쓰러지기 전 자신에게 보여줬던 빨갛게 된 손이 떠올랐다.

자신이 어루만진 얼굴에 올라오던 발진은 주사를 맞아서 지금은 가라앉았지만, 또 한 번 그녀를 힘들게 할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자 다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한다연.”

반쯤 떠진 붉은 눈이 자혁을 보자마자 물기가 차올랐다.

“흑…….”

한다연이 우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12년 전 당신이 죽길 바라던 사고에서…… 우리 엄마가 죽었어요.”

“……!!”

“2년 전에도 당신을 죽이려 했던 곳에서……. 아빠가…… 죽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다연이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내가 죽을 차례인가 봐요…….”

다연의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

* * *

다연이 걱정되었는지 진 회장이 찾아왔다.

누워 있는 다연을 살펴보고선 무거운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다연만큼이나 안색이 창백한 자혁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네 얼굴은 왜 그 모양인 게야? 혹시 지난번 기자가 제멋대로 짜깁기한 기사 때문에 여즉 둘이 속끓이고 있었던 게냐?”

자혁은 대답 대신 봉투를 내밀었다.

“혹시……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른다면 곧장 이게 뭐냐고 물어봤을 텐데, 진 회장은 봉투와 자혁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시는군요.”

“다연 양이 주더냐?”

“여기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아셨습니까?”

진 회장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다.”

자혁은 진 회장의 표정과 행동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표정이 보이는 지금은 목소리만으로 분석하던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더 생생하게 진 회장의 현재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봉투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안의 내용물을 몰랐던 듯싶었다.

“이미 조사해서 알겠지만, 나는 다연 양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다.”

“네.”

“모친이 사고로 죽고 연이 끊어졌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 다연 양 부친이 찾아와 그 봉투를 나에게 주고 갔다.”

자혁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보았던 영상은 한다연의 부친이 남긴 것이었다. 부인과 구재식이 나눈 대화를 듣고 그는 사고가 일어날 곳을 찾아갔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죽었어야 할 사고였던 것이 맞았다.

자혁은 다연이 있는 침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면…….

그녀가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한주연…….”

“그 사람이라면……. 다연 양 의붓언니가 아니더냐? 마석 건설 안주인말이다.”

그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생각하느라 진 회장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다연.

그녀를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숨겨야 할지, 정면 돌파를 해야 할지.

어떤 방법을 택하든 다연을 제 옆에 둘 수 없었다.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데, 제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하아.”

“한숨만 내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

자혁은 진 회장 앞에 다연의 휴대폰에서 뺀 메모리 카드와 열쇠를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 있던 물건입니다.”

“이건 대여금고 열쇠고. 다연 양이 쓰러진 걸 보니……. 이 메모리에는 아주 안 좋은 게 들어 있는가 보구나. 너도 보았느냐?”

“……네.”

진 회장의 인상 좋은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자혁이 자신을 붙잡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해줄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해줄 일이 무엇이냐?”

“내일 변호사 보내겠습니다. 어르신이 저 사람을 도와주는 걸로 해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신이라도 보내야 하는 게냐?”

“주주총회 전에요. 원래 지내던 곳으로 갈 수 있게끔 비행기표 보내겠습니다.”

진 회장의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스스로 정리하겠다고 하면……. 저를 부르세요.”

“어쩔 셈이냐?”

자혁은 결심을 굳힌 듯 진 회장을 마주 보았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어르신은 언제나 제 편이어야 해요.”

“자혁아…….”

“간호할 만한 사람 불렀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오기 전에 가보세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변호사 오면.”

“안다, 알아. 노인네 취급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진 회장이 가볍게 역정을 냈다.

진 회장이 나가고 얼마 뒤 지혜가 왔다. 오늘만 두 번째 방문이었다.

“아까 죽 먹는 거 보고 갔는데……. 병원까지 갔다 올 걸 그랬네요.”

누워 있는 다연을 보며 지혜가 후회되는 듯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자혁은 나가려다 다시 몸을 돌려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것을 지혜는 알까 싶어 물었다.

“혹시, 최근 아내가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그 어떤 때보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뒤돌아 나가는 자혁을 배웅하러 나가다 지혜는 무언가 생각난 듯 머뭇거렸다.

“저기…….”

자혁이 돌아보았다.

“다연이가 지라시 보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었어요.”

“지라시요?”

“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있으니 그걸 다 믿지는 말라고 했었는데……. 그리고 얼마 뒤 기사가 터졌고요.”

한다연이 지라시에서 어떤 내용을 보았을지 알 것만 같았다.

충격받을 거 같아 이 실장에게 나중에 알려주라고 했었는데, 거기에 있는 조잡한 말장난을 다연이 다 읽었다는 것이 난감했다.

다연에 대한 것이라면 본인 스스로 사실과 거짓을 판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혁에 관한 것은 다연이 판단이 불가했을 것이다.

자혁은 지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호텔을 나왔다. 그리고 이제 막 한국에 도착했을 이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혜가 가장 먼저 보였다.

구자혁이 왔었는데……. 그에게 이제 자신이 죽을 차례인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감이 없는 것을 보니 꿈인가 싶기도 했다.

“선배…… 언제 왔어요?”

“어젯밤에.”

다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조금 현기증이 났지만, 땀을 흘린 몸을 씻고 싶었다.

“힘들면 더 누워 있어.”

“아니요…….”

“그럴래? 그럼 일어난 김에 죽 좀 먹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죽이라니.

다연은 인상을 썼다.

“일단…… 좀 씻고 싶어요.”

“혼자 할 수 있겠어?”

걱정되어 물어본 것일 텐데 다연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다연이 힘없이 웃는 것을 본 지혜가 덩달아 웃었다.

“씻고 나와. 도움 필요하면 부르고.”

“네.”

욕실로 들어간 다연은 엉망이 된 제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뜨거운 물을 틀었다.

씻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했다. 그리고 어제 일이 조금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제…… 뺨을 때렸었지…… 내가.”

제 손바닥을 내려보며 다연이 중얼거렸다. 거기까지는 온전하게 기억났다.

그다음은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다연은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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