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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76)

64화

경옥은 오늘 구재식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넌지시 물었다.

“부사장님 계획은…… 어떻게 잘 진행되고 있어요?”

“곧 해결될 거 같으네.”

“죽이긴 좀 아까운 인물이긴 한데……. 어차피 남자구실 못 한다면서요.”

하루도 빠짐없이 조카인 구자혁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보고를 받았었다. 그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까지 빠짐없이 확인해 보아도 여자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디서 숨겨둔 아이가 튀어나올 것도 아니고……. 드디어 한강 기업의 구재식 회장님이 되시겠네요. 축하드려요.”

경옥의 말에 재식은 한쪽 입꼬리만 슬며시 올렸다.

“참 오래도 걸렸네요. 그러게 십 년 전에 죽었으면 좀 좋아.”

경옥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리고 지난번 재식이 시킨 일을 보고했다.

“소문은 의도한 대로 퍼트렸어요. 주연이 맞선보기 전에 한 사장한테 한번 떠봤더니……. 구자혁 사장을 조현병 환자로 알고 있더라고요.”

재식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잣말하는 것도 직접 봤다는데……. 구자혁 그놈, 정말 조현병이에요?”

“혼잣말하는 걸 보다니?”

“한 사장이 봤다는데……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왜요? 자세히 알아볼까요?”

“다음 주면 죽을 놈인데 뭐하러. 괜히 한 사장한테 의심받지 말고 놔둬.”

재식의 말에 경옥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물었다.

“이번에는 또 뭘 시키시려고요? 이제 저 아니어도 부사장님 잔일 해줄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요.”

“일하는 사람이 늘면 말하는 입도 늘어나는 법이지. 여기서 수족을 더 늘려봤자 나중에 골치 아플 게 뻔해. 자네만 해도 그렇잖은가?”

경옥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저도 나이가 있으니 이런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다음 주까지 여기도 큰 거 세 장 송금해.”

재식은 제법 묵직한 봉투와 함께 반으로 접힌 종이 쪽지도 건넸다.

경옥은 구재식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은행 계좌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못 보던 이름이네요. 누구예요?”

“트럭 기사야.”

“바뀌었네요. 예전에 그 사람은 벌써 치운 거예요?”

“아니, 어디로 튀었는지 찾을 수 없어.”

경옥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너무 티 나게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도망가죠. 그 사람도 쓸데없는 데서 패기 넘치네. 나처럼 충성하면 편하게 살 텐데…….”

구재식이 한쪽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이번에도 덤프트럭을 밀어버리는 거예요? 10년 전 수법이랑 같잖아요. 비도 안 오는데 이번에는 무슨 핑계로요?”

의심받을 것을 알면서도 구재식은 매번 같은 방식을 선택했다.

자신이 조카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같은 방법으로 해야 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게 구재식의 생각이었다.

“남해 리조트 공사 현장에 매주 내려가. 고속도로에서 빠지는 곳이 원래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라니 의심보다는 그러려니 할 거라는군.”

경옥은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원래 접혔던 모양대로 접어 가방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재식에게 받은 봉투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세어보지 않아도 구재식이 송금하라는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재식은 경옥이 안을 들여다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심부름 값은 넉넉히 넣었네.”

구재식은 송금 이력이 남을 만한 일은 모두 경옥에게 지시했다.

술집에서 처음 만난 경옥이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매번 심부름 값을 포함한 현금을 건넸고 경옥은 지금껏 실수 없이 심부름을 해냈다.

문제가 되면 언제든 죽여버려도 나서서 찾을 사람 없는 고아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경옥이 한 사장의 내연녀가 되었을 때 문제가 되기 전에 죽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평범하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경옥을 보며 죽이는 것보다 평생 부려먹는 게 낫겠다 판단했다.

“내일 오전 중으로 송금할게요. 매번 이용하는 그 은행이요.”

“수고하게.”

구재식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 * *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휴대폰이 다연의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주울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다연은 충격이었다.

덜덜 떨리는 양손을 맞잡자 그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다연은 제 부친의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남해엔 도대체 왜 갔는지 모르겠는데……. 거기가 원래 사고가 잦은 곳이래요.”

구자혁을 죽이려는 순간에 다연은 엄마를 잃었고, 10년 후엔 아빠를 잃었다.

어쩜 이렇게 꼬이고 꼬인 인연일 수 있는지. 일부로라도 만들기 힘든 인연이었다.

아릿한 통증이 일어 다연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조카를 죽이려는 잔혹한 작은아버지의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연은 구자혁에게…… 화가 났다.

그에게 향한 화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선 뻗어 나갔다.

급기야 계약 결혼을 제안한 이유마저 이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자락 남아 있는 이성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소리치고 있었지만, 다연은 그것을 외면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에게 무작정 화를 내고 싶었다.

-쾅쾅쾅.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연은 그 소리만으로 이 밤에 찾아온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오만한 남자.

“구자혁 씨……. 왜 하필……. 지금 와요.”

지난번 자혁이 왔을 때도 그는 벨을 누르지 않고 지금처럼 문을 두드렸다. 분노를 담아서.

다연은 울었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자혁을 보자마자 다연은 다시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입 안 속살을 깨물며 겨우 참아낸 다연은 비스듬히 몸을 돌려세웠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나요? 구자혁 사장님.”

다연은 온몸에 힘을 주어서야 겨우 떨지 않고 말 할 수 있었다.

“내가 다녀갔던 날 밤. 어디 갔었지?”

내쫓듯 그를 보낸 날이었다.

그가 나가고 난 후, 주연이 나오라고 연락했었다. 잘못된 기사에 대해 따져 물으려고 나갔지만, 소득은 없었다.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그날의 행방을 왜 묻는지.

더구나 이 늦은 시각에 찾아온 그의 행동이 다연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이유 불문하고 그에게 화가 난 상태였으니까.

다연은 조금의 친절도 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왜 묻는 거예요?”

“대답해.”

“명령하지 말아요.”

다연은 손을 말아쥐고선 차갑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지금보다 더 일그러졌으면 좋겠다.

“아, 제가 잠시 잊었네요. 우리 계약에서 ‘을’은 저였는데 말이에요. ‘갑’ 한테 무례했네요.”

“한다연.”

“그렇다고 ‘갑’이 명령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조항 또한 없었잖아요.”

가만히 서 있던 자혁이 다가와 다연의 양어깨를 잡았다. 짙은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비야냥대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거친 그의 행동에 겨우 진정시켰던 다연의 몸이 다시 떨렸다.

“내가 어디를 갔는지 왜 당신이 알아야 하는 거예요? 왜요? 당신이 붙인 사람들이 저를 놓쳤던가요?”

“지금은 당신이 화낼 상황이 아닐 텐데.”

자혁의 깊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날 모델하우스에 불이 났어. 휘발유가 담긴 워터브러쉬가 있었고.”

짙은 눈동자가 탐색하듯 다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차가워 다연은 그의 시선이 버거웠다. 그리고 아렸다.

그가 굳이 이 밤중에 찾아와 말하는 의미를 알아서인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연은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느낀 것이 맞는지.

구자혁, 당신…….

“설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다연은 목이 메어 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다연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다연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그가 다시 대답을 강요했다.

“어디에서 뭘 했는지 말하라고 했을 텐데.”

더 버티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한주연 만났어요.”

다연은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신발은 왜 버린 거야?”

“그걸……. 어떻게…….”

다연의 붉어진 눈이 커졌다.

자신이 신발을 버린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날 다연의 동선을 이미 그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놀라는 것은 잠깐이었다. 그가 지금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확신이 들었다.

확인하려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다연이 불을 낸 범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지난번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믿더니 이번에는 곳곳에 찍힌 CCTV를 믿고 있었다.

다연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불이 나던 시점에 당신이 버린 신발이 영상에 찍혀 있었어.”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모든 정황이 당신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다연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기자는 안 만난다고 하더니 한주연을 만나? 하아……. 그냥 가만히 있어 줄 수는 없는 거야?”

다연의 어깨를 놔주고선 그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화를 내고 싶었던 사람은 다연이었는데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트레이닝 파트너가 집을 나올 정도로 화낼 일인가?”

“구자혁 씨!”

“왜? 나랑 잔 거 때문에?”

-짝!

자혁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뺨을 때린 다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때린 사람은 자신인데 아픈 사람은 다연, 자신이었다.

그는 다연이 겨우 잡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처참히 잘라버렸다.

차가운 말만 쏟아내는 저 입으로.

“당신 정말 최악이에요. 알아요?”

“한다연.”

“이 손, 보여요?”

다연은 그의 뺨을 때렸던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 붉게 발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난 이제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구자혁 씨한테만 이래요.”

다연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당신이……. 정말, 끔찍해요.”

겨우 뱉어낸 말에 다연은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점점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다연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의식이 짙은 암흑 속으로 먹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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