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자혁은 범인의 모습이 더 자세히 담긴 영상이 보고 싶었다.
“혹시, 주변 상가나 차량 블랙박스 영상 좀 알아 볼 수 있을까?”
“벌써 알아 봤지. 이미 경찰에서 수거해 갔더라고.”
자혁은 짧은 영상을 다시 한번 돌려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정도를 봤을때…… 발이 작은 건가?”
“작지. 신발 사이즈로 봤을 때 235~240㎜정도 되더라.”
경수는 이미 거기까지 분석을 마친 후에 자혁에게 온 것이었다.
“그 정도 발 사이즈면…….”
“여자야.”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확신하는 이유는?”
경수는 화면 속 신발이 자세히 보이도록 크게 확대했다.
“저 브랜드는 여자 제품만 만든다더라. 특히 신발에는 저 브랜드 상징인 엠블럼을 오른쪽 왼쪽 다른 걸 넣는 게 특징이래.”
자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성 호텔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고, 하필 다연은 지금 그곳에 있었다.
다연이 쓰고 있어서 알게 된 워터 브러쉬가 현장에 있었고, 영상 속 사람도 여자였다.
다연에 대한 기사가 나간 직후 화재가 난 것도 구설수에 오르기 좋은 것이었다.
자신의 일을 훼방 놓는 방법은 이번에도 같았지만, 수단이 너무나 잔혹했다. 구자혁이 한다연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자혁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 * *
다연은 탁자 위에 올려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진 회장한테서 받아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다연은 쉽게 열어 볼 수 없었다.
“하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열지 않고 두기에는 한주연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열자, 열어.”
누런색 봉투를 열자 에어 캡으로 된 봉투 하나가 또 나왔다. 겉봉투를 여는 데 며칠이 걸렸는데 속에 있던 봉투를 여는 데는 몇 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메모리 카드와 은행 로고가 찍힌 열쇠였다.
봉투만 열면 쉽게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제 부친이 무엇을 남겼는지 알기 위한 열쇠에 불과했다.
“하아.”
이게 뭐라고 봉투를 여는데 그렇게 오래 고민했는지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메모리와 열쇠를 보고 있자니 난감했다. PC는 커녕 노트북도 없는 다연이 메모리에 저장된 것을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PC방이라도 가야 하나…….”
다연은 메모리를 들고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무엇이 저장되어 있을지 몰라 PC방에 가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쉬운 게 없구나…….”
메모리 카드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은행 로고가 있는 걸 봐선 대여금고 같았다. 이미 은행 업무 시간이 끝난 저녁이었다. 지금 찾아가는 것도 소용없었다.
“둘 다 내일 해야겠다.”
다연이 열쇠를 다시 봉투 안에 넣어놓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지혜였다.
다연은 손에 든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지혜가 손에 든 쇼핑백을 흔들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 언니가 먹을 거 사 왔다.”
지혜와 오전에 통화했을 때 다연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며 걱정하더니 먹을 것을 사 들고 찾아왔다.
문을 열어주는 다연의 얼굴이 엉망인 것을 보고 지혜는 테이블 위에 포장된 음식을 꺼냈다.
“밥이 아니라 죽 사 오길 잘했다.”
다연이 집이 아닌 호텔에 있는 것을 듣고도 지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른 앉지, 나 배고파.”
지혜는 아직 서 있는 다연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다연은 내키지 않았지만 천천히 앉았다.
“저녁 안 먹었어요?”
“너랑 같이 먹으려고 그냥 포장해왔어.”
“…….”
“일단 먹고 얘기하자.”
다연에게 숟가락을 건네주며 지혜는 먼저 죽을 먹기 시작했다.
배고프다고 했던 지혜는 죽을 반이나 남겼다. 반도 먹지 못하는 다연을 보며 지혜는 심란한 얼굴을 했다.
“금방이라도 쓸어질 듯한 얼굴을 하고선…… 조금 더 먹어.”
“선배 오기 전에 뭘 좀 먹었더니…….”
“피죽도 못 먹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누가 속을 거 같아?”
다연이 힘없이 웃었다.
“다 먹으라고는 안 해. 딱 절반만 먹어.”
지혜는 양팔을 교차에 팔짱을 끼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섭게 감시하듯 보면……. 어떻게 먹어요.”
“그 핑계로 안 먹을 생각하지 말고.”
“들켰다.”
다연은 어쩔 수 없이 지혜가 그만 됐다고 한 뒤에야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따뜻한 차를 건네주며 지혜는 다연의 눈치를 살폈다.
“죽이지만, 밥도 먹었고. 차도 마시고 있으니. 이제 무슨 일이지 들을 차례 같은데?”
오래 참은 것에 비해 지혜의 어조는 담담했다.
질문을 받았지만, 다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지난번 그 기사 때문이니?”
그 기사는 오해를 풀면 그만인 것이었다.
다연은 자신이 구자혁의 집을 나왔는지 생각해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 집에 있는 게 힘들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대답이 그래?”
다연은 심각한 얼굴을 한 지혜 앞으로 그동안 그린 그림을 내려놓았다. ‘연인’ 시리즈에 들어갈 그림이었다.
그림을 내려다본 지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 이거 받으러 온 거 아니야.”
“알아요.”
다연은 옅게 웃었다.
“말하기 싫으니까, 이거 주고 얼른 보내자 싶은 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지혜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림을 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배를 움켜잡고 웃는 남자의 모습과 곤란한 듯 얼굴을 붉히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너 뭐 했는지 말 좀 해봐. 나도 같이 웃게.”
“그…….”
“너는 무조건 그런 거 아니라고 하겠지만.”
지혜는 다연이 하려던 말을 먼저 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참 예쁘네……. 설마 여기 있는 남자처럼 네 남편도 봉숭아물 들였어?”
“그림은 그림일 뿐 현실이랑 혼동하지 마세요.”
“아하, 그러세요? 그럼 네 손톱에 그건 네일받은 거니? 무슨 네일이 이렇게 천연색이야?”
짓궂은 지혜의 말에 다연은 자신의 손톱을 내려보았다.
“봉숭아꽃은 어디서 난 거야?”
“누가……. 줬어요. 심심하면 해보라고요.”
“오랜만에 본다. 봉숭아물 들이는 거 말이야. 예쁘게 들였네.”
지혜는 봉숭아물 들이는 연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한 번, 다연의 손톱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음 그림을 넘겨 보다 손이 멈추었다.
‘첫눈아, 빨리 와.’ 하는 부재를 단 그림에는 연인이 기도를 하는 모습이었다.
손끝에 비닐 같은 것이 칭칭 감겨 있는 양손을 포갠 채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남자. 그 남자의 발끝에 비닐 같은 것이 감겨 있었다.
무엇을 빌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지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치한데…… 참 예쁘다.”
“연인이니까요.”
이 예쁜 연인의 끝도 그림처럼 예뻤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다연의 목소리가 유독 쓸쓸했다.
“아참, 선배. 혹시 노트북 가져왔어요?”
“아니. 인터넷 해야 하니?”
다연이 한쪽에 둔 메모리를 손에 들었다.
“이거 좀 보려고요.”
“그거라면…….”
지혜는 가방을 뒤지더니 다연에게 작은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이거 연결하면 휴대폰으로도 볼 수 있을 거야.”
“아…….”
다연은 젠더를 손바닥 안에 올려놓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에 더 있는다 해도 네가 솔직히 말해줄 거 같지 않으니까, 이 몸은 이만 간다.”
지혜는 가방을 챙겨 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아참, 온라인 클래스는 편집 끝났어. 홍보 일정 나오면 알려줄게.”
“네.”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다연이 걱정되었지만, 죽이라도 먹은 것을 봤으니 지혜는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지혜가 돌아가고 다연은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찌뿌둥한 몸이 그나마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다연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메모리와 젠더를 휴대폰에 연결했다.
메모리에 저장된 것은 동영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상일까?”
다연은 조심스럽게 동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자동차 블랙박스로 녹화된 것이었다.
* * *
고급 세단이 한적한 곳에 미끄러지듯 멈췄다.
먼저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남자가 내리더니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녕하셨어요, 부사장님.”
보는 눈이 많아 조금 먼 곳으로 불러낸 것이 못마땅해서 경옥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경옥의 표정이나 말투가 어떤지는 관심 밖이라는 듯 재식은 본인 방식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사모님 놀이는 재미있으신가?”
“비꼬지 마세요. 이 생활도 적성에 맞아야 하는 거지. 한 사장 비위 맞추면서 적성에도 안 맞는 현모양처인 척하는 것도 죽을 맛이라고요.”
고상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 달리 경옥의 말투는 상스러웠다.
“술집 작부에서 중견 기업 사모님으로 신분 세탁에 성공했으면 얌전히 살아야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재식은 목소리를 낮췄다.
경옥은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주연이 아니었으면 우아한 사모님인 척 안 하죠.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그거 부사장님이 해준 거 아니잖아요. 그 사고로 전 부인이 죽은 건 100% 우연이었잖아요.”
“그 우연의 최대 수혜자가 너라는 걸 잊지 않았겠지.”
경옥은 그동안 재식을 도와 온갖 더러운 심부름을 했었다. 돈이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덧 즐기게 되었다.
“이 신분으로 너무 오래 살았어요. 슬슬 따분해지려고 해요. 그래서 말인데 주연이 결혼하자마자 정리해주세요.”
“어떻게?”
“사고로 죽이면 되잖아요.”
경옥은 귀찮게 달라붙는 모기를 죽이는 것처럼 쉽게 말했다.
“전 부인도 사고로 죽었어. 한 사장마저 사고로 죽으면 친딸이 의심할 수도 있어.”
경옥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웃었다.
“약도 없는 불치병에 걸린 애가 뭘 할 줄 아는 게 있다고요. 겁을 하도 줬더니, 저 아빠 일에는 관심도 안 가져요.”
“아직 학생이라고?”
“곧 졸업해요. 성인인데 알아서 살겠죠. 나는 돈만 챙기면 되고요.”
경옥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사옥이랑 사업체는 마석 건설에 넘기기로 했어요. 사위 될 녀석이 제법 쓸 만해요.”
마진철을 굳이 분류하자면 비열한 쪽이었다.
경옥과 주연이 계획했던 일에 동참시킬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주연이 자신처럼 우아한 척하지 않고 편히 살아도 될 사람이었다. 물론, 둘이 눈맞아서 임신부터 한 것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한 가장 큰 이유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