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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76)

62화

놀랐고, 고민하는 것도 맞았다.

구자혁.

그의 이름 석 자가 다연의 가슴을 이토록 후벼팔 줄은 몰랐었다.

“이렇게 투명한 사람도 믿지 못하고 잃는다면 저만 손해지. 안 그래요? 그 자식은 뼈저리게 느껴야 해요.”

“…….”

“다연 씨가 버리고 싶으면 구자혁. 그 자식 그냥 버려요.”

진심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주미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까는…… 안아주라면서요.”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가 싶더니 주미는 다시 자혁에 대한 전투력을 올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구자혁이 좀 울었으면 해서요. 그것도 아주 많이.”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주미는 차를 출발시켰다.

“아, 아까부터 말해주고 싶었어요. 봉숭아물 예쁘게 들었네요.”

“아…….”

다연은 손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요즘도 그런 걸 하는 줄 몰랐네요.”

“누가……. 심심하면 해보라고 해서요.”

주미는 진성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다연이 앉은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한테는 보여줬어요?”

“……아직이요.”

다연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이고요.”

“…….”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다연은 차에서 내렸다.

“다연 씨.”

뒤돌아서려는 다연을 불러세웠다.

“예쁘다고 안 해주면 그 누구. 진짜로 그냥 버려요.”

“……네.”

다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 * *

룸으로 올라온 다연은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머릿속에서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연이은 충격에 다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하아.”

몸을 옆으로 돌리자 진 회장에게 받아온 봉투가 다연의 시선에 들어왔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엄마의 사고도, 부친이 남긴 봉투도. 그리고 구자혁도.

“하아……. 왜 이렇게…… 점점 힘드니…….”

아무래도 지금 당장 저 봉투를 풀어보는 것까지는 다연이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다연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비가 와서인지 아침이 되었는데도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자혁은 어젯밤 집에 들어와 소파에 앉은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잠들 수 없었다.

한다연.

자신이 호텔에 머문 시간 동안 그녀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었었다.

문을 열었을 때 놀라움과 작은 기대감을 보았다. 그리고 억울함으로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드는가 싶더니 서릿발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그녀의 표정들을 외면했던 건 구자혁 자신이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지금은 자신이 지나쳤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사의 출처를 파악하고 난 뒤에 다연을 찾아갔어도 될 일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와서 다연의 짐이 전부 사라진 것을 보고 자혁이 느낀 배신감은 이성을 추월했다.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데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다연을 몰아붙였다.

‘왜 그랬을까…….’

자혁은 집에 와서야 후회가 몰려왔다. 다시 그녀에게 갔을 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아.”

자혁은 차 열쇠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띠릭.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출근하는 장 여사와 함께 정신이 집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집에 계셨네요.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

“자혁아.”

두 사람의 시선을 받고도 자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 여사님,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장 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연 씨는?”

정신의 입에서 다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자혁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만나봤어? 어때 보였는데?”

“형이 왜 한다연 걱정을 하는 건데?”

굉장히 서늘한 음성이었다.

“내 환자니까.”

자혁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선 넘지 마.”

“구자혁.”

“자꾸 여자로 보지 마.”

“하아.”

정신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 여자야.”

낮게 으르렁거리는 자혁을 보며 정신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여자가 하필 내 환자라고.”

“모든 환자를 다 한다연처럼 대해? 아니잖아. 자꾸 여자로 보는 거 불쾌해. 미치도록 싫어. 그러니까. 신경 꺼.”

자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회사에 있어야 할 김 대리가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분양 모델하우스에 화재가 났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인명 피해는? 언제? 현장으로 가.”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이 실장님께 먼저 보고하고 선 조치 취했습니다. 이경수 팀장님이 지금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자혁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현장으로 가.”

자혁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 혼자 남겨진 정신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자혁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자마자 김 대리의 전화로 여기저기 지시를 내렸다.

“김 대리, 우리 쪽 사람들 모두 풀어서 주변 CCTV 확보하라고 해. 블랙박스 영상이랑 모두! 경찰보다 먼저 움직여야 해.”

자혁은 김 대리의 자세한 보고를 들을수록 몇 년 전 남해 리조트 건설 때와 똑같은 수법에 분노했다.

“이 실장 언제 귀국 가능하다고 합니까?”

“현지 시각으로 오늘 오후 5시라고 합니다.”

“이 실장 혼자?”

“아닙니다. 전원 귀국한다고 합니다.”

자혁은 머릿속으로 이 실장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했다. 연착 없이 제시간에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한국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었다.

김태원이 자수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막상 한국에 데려오면 생각이 바뀔 수 있었다.

김태원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구재식 부사장이 손을 쓸 수 있는 노릇이었다. 죽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김태원을 경찰서에 집어넣을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설사 유치장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구재식이 연루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그것만 확실히 되면 구재식이 김태원을 죽이든 말든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 * *

현장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피해 상황이 컸다.

감식반이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경찰과 이야기 중이던 경수가 자혁을 보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자혁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고 경위를 들었다. 집에서 여기로 오는 동안 김 대리에게 들었던 내용과 다른 것은 없었다.

조사를 마쳤는지 경수가 다가왔다.

“이 팀장, 피해 상황 어느 정도야?”

“전부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거 같아.”

“하아.”

대부분의 모델하우스가 그렇듯 나무 자재로 지은 건물은 화재에 취약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도 안전상 문제로 다시 지을 계획이었다.

그것보다 구재식에게 호락호락 당해주고 싶지 않았다. 거제도 리조트 홍보관 화재는 증거 부족으로 구재식을 처벌하는 데 실패했었다.

이번에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주변 영상은 어디까지 확보했어?”

경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변에 있는 게 없어. 내부에 있던 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경찰이 먼저 가져갔어. 메인 통제 PC도. 미미만 겨우 수거했어.”

“확인해 봤어?”

“아직. 회사 들어가서 미미한테 남은 데이터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그리고 이거.”

경수는 자혁의 주머니에 비닐에 싸인 무언가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감식반 오기 전에 주운 거야.”

“다른 건 더 없었어?”

“몰라, 미미 확보하고 이거 줍자마자 감식반이 왔어. 난 일단 회사 들어가서 미미부터 확인할게.”

경수가 먼저 회사로 돌아가고 자혁은 현장에 남아 직접 보고를 받고 지시했다.

자혁은 퇴근 시간이 다 될 무렵 회사로 들어왔다.

집무실에 들어와서야 자혁은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 보았다.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아 꺼내 볼 수 없었다.

“이건…….”

경수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고 했었는데 자혁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워터브러쉬.”

다연이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물건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다연은 작은 파우치 하나가 전부였다. 아주 작은 팔레트와 작은 스케치북 그리고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워터브러쉬만 있으면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었다.

‘여기에 물을 넣고 손으로 꾹 누르면 붓으로 물이 스며 나와요. 그래서 물이 없어도, 붓을 여러 개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그때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이 예술 활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수월하게 그릴 수 있도록 만든 그 기술이 지금은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물을 담는 곳에 연료가 될 만한 것을 넣고 붓끝에 불을 붙이면 용도가 전혀 달라졌다.

“화염병.”

-똑똑.

워터브러쉬를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이 열리고 경수가 들어왔다. 곧장 소파로 가서 철퍼덕 늘어지듯 앉아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곤 눈을 감았다.

“휴가 가려고 했더니…….”

자혁이 소파에 앉자 경수가 중얼거리며 상체를 세웠다. 경수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현장은 어느 정도 정리하고 온 거야?”

“김 대리 거기 두고 왔어. 미미한테는 뭐 좀 나왔어?”

“마지막 미미에게 남아 있던 영상 복원해본 건데……. 아무래도 방화 같아.”

“방화?”

자혁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되물었다.

“이거 봐봐. 각도 상 건물 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순간 작은 소음이 들려, 그리고 나서 불꽃이 일어나.”

경수가 태블릿 화면을 보며 설명했다.

각도 상 사람의 발만 겨우 보였지만, 누군가 건물 근처로 다가오는 것은 분별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계속 가면 막다른 길이잖아. 분명히 뒤돌아 갔을 텐데……. 되돌아간 영상은 없어?”

“없어, 불길이 일고 전기가 차단되는 것까지 보고 되돌아갔거나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서 갔으면 안 찍혔을 거야.”

자혁은 짧은 영상을 다시 한번 돌려보았다.

“아까 내가 준 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봤어?”

“본 적 있어.”

“뭐?”

“워터브러쉬. 그림 그릴 때 써.”

자혁은 그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가 알고 있다는 건 누군가 알려준 것 같았다.

잔뜩 굳은 그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표정을 보니 의심 가는 인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경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물어보려다 말았다.

추측만으로 범인으로 몰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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