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자혁과 있다 보면 놀라거나 당황하는 쪽은 매번 한다연이었다.
주미와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주미의 출생에 대해 말하는데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쪽은 다연이었다.
구자혁과 주미.
뻔뻔하거나 달관한 듯 무심한 면이 비슷했다. 지나치게 솔직한 화법도.
“물론, 내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요. 그럼 구자혁과 승계 구도에서 라이벌이 되었으려나? 하하.”
“억울하거나……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한테 관심조차 없는 인간들 상대로 그래봤자 나만 손해잖아요. 나도 그쪽 관심 없어요.”
생부에 대해 이토록 쿨할 수 있다니 무언가 굉장히 주미다웠다.묻지도 않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말하려고 다연을 붙잡은 것은 아닐 테고.
다연은 주미가 왜 그토록 간절한 눈빛으로 시간을 내 달라고 했는지 궁금했다.
“할 이야기라는 게…….”
“기사 봤어요.”
“아…….”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던 다연의 손에 떨렸다. 그래서 다연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혹시……. 그날이요. 셋이 저녁 먹었던 날이요.”
주미는 말하기 힘든지 빨대로 음료를 한 번 빨아 마신 후 이어서 말했다.
“내가 구자혁한테 하는 말 들었어요?”
다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의 시간이 의미하는 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누가 봐도 거짓일 수 밖에없었다. 다연은 솔직하게 대답해야만 했다.
“……네.”
“하아……. 이번엔 진짜 나였네…….”
“네?”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다연의 대답에 주미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들은 것은 자신이었는데 오히려 주미가 미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주미는 다시 한번 빨래도 음료를 빨아서 마셨다. 그녀가 맛있다고 주문한 케이크는 두 사람 다 손도 대지 않았다.
주미는 창백한 안색의 다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기사 읽고선,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또 사람 여럿 죽겠구나 싶었어요.”
“…….”
“꼭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춰야만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니까.”
주미는 자신이 한 말에 의미를 덧붙였다.
“괜찮아요?”
“…….”
다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았고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다연은 이번에도 주미가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다.
“모르겠어요.”
“안 괜찮다는 거네.”
주미는 혼잣말처럼 툭 던지곤 손에 쥐고 있던 빨대로 얼음을 쿡쿡 찔렀다.
“그 자식이랑은……. 이야기는 해봤어요?”
“……네.”
“보나마나 저 할 말만 툭 던져겠지, 뭐. 안 봐도 훤해요 훤해.”
주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집에 있는 건 괜찮겠어요?”
“나왔어요.”
집을 나왔다는 말이 놀랐는지 주미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에요?”
“네.”
다른 질문과 달리 다연의 대답이 굉장히 빠르고 단호했다.
“두 사람의 시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림을 봤을 때는…… 좋아 보였어요.”
“…….”
“우리가 리조트에서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 내가 물어본 적 있었죠?”
다연은 그때 주미와 했던 짧은 대화를 떠 올려보았다.
“주변에 사랑에 빠진 사람을 못 봐서……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어떤 점이 좋아요? 어떻게 그 사람을 떠올리면 표정이 막 그렇게 예뻐지는 거예요? 아,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는 사람에는 저도 포함돼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나 좀 진지하거든요.”
주미는 그때도 짧은 순간 많은 말을 쏟아 냈었다.
“그때 말한 내 주변에 있는 사람, 구자혁이랑 제정신도 포함된 거였어요.”
“네.”
“아, 혹시 제정신도 알아요? 한강 병원?”
“……네.”
“이것들이 진짜. 하아.”
주미는 금방이라도 쫓아갈 듯이 화를 냈다. 빨대로 애꿎은 얼음을 쿡쿡 찌르며 주미는 거친 말을 내뱉었다.
“하여튼…… 그때 다연 씨가 했던 말이 나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충격이었어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울리지 않은 어휘를 붙여서 말하는 주미 때문에 다연은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대답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안아주고 싶은 거요.”
그날 제 말처럼 다연은 자혁을 꼭 안아주었었다.
“그 자식이 안아주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거 알아요. 그런데요…… 다연 씨가 구자혁을 좀 안아주면 안 될까요?”
“주미 씨…….”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다연의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실과 거짓이 섞이고 섞여서 오해가 커졌어요.”
“…….”
“난 오해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화내고 돌아섰어요. 그때의 난…… 무작정 화낼 곳이 필요했거든요.”
주미의 눈빛은 진지했다.
사고 이후, 주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변했다. 그 시선의 의미는 ‘불쌍하다’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촉망받는 발레리나가 한순간의 사고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으니 불쌍하게 보는 건 당연했다.
유일하게 눈빛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 있는 벽, 구자혁이었다.
그래서 주미는 모든 화를 자혁에 퍼부었다. 주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그냥 평소처럼 벽일 테니까.
정신이 구 회장에게 트레이닝 파트너 이야기를 했을 때 주미를 에워싼 감정은 배신감이 아니었다.
자신 마음속 깊숙이 넣어두었던 열등감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한강 기업 손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구자혁을 부러워하고 있었더라구요.”
한강 기업의 장손인 구자혁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생부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주미는 분노를 폭발시켰다.
주미가 정말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데도 더 화를 냈던 건……. 내 생부라는 사람과 우리 엄마는 누구보다도 구자혁이 죽기는 바라는 쪽이거든요.”
다연도 눈치채고 있었던 거라 이번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사고…… 사실은 구자혁을 죽이려고 누군가가 꾸민 일이었어요.”
폭탄 발언에 다연은 손에 쥐고 있는 찻잔을 엎을 뻔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주미는 담담하게 자신이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해는 늦은 장마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날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왔었고요.”
주미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소년 콩클 대회가 있었어요. 난 거기 꿈나무 아이들에게 잠깐 공연을 하러 엄마와 갔었죠.”
주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다연은 기시감에 몸이 점점 떨려왔다.
“알잖아요, 우리 엄마. 발레계의 대모. 무리한 일정이었어요. 빨리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가야 했는데……. 엄마한테 또 다른 일정이 생겨서 내 발이 묶였어요.”
다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그 자리에 구자혁 씨도 있었나요?”
“아니요. 그 자식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거기 문화재단에 왔었어요. 그것도 내 생부의 함정이었지만요.”
주미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음 말을 이어갔다.
“원래 그 자식이 나한테 말을 거는 녀석이 아닌데 그날은……. 하여간, 서울에 가야 하니까 다짜고짜 차를 내놓으라고 했더니 순순히 내놓더라고요.”
“그럼…….”
“네, 아까 납골당에서 봤던 아저씨가 그 자식 운전기사였어요. 나는 빼앗은 차를 타고 서울로 가던 중에 덤프트럭이랑 사고가 났어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비가 와서…… 그래서 사고가 났다고 알고 있지만……. 하아.”
주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 마취가 깨는 중인 걸 모르고 누군가가 말하더라구요. 왜 구자혁, 그 자식이 차에 타지 않았냐면서요……. 내 걱정보다 계획이 틀어진 것에 분노하더라고요.”
“주미 씨…….”
주미는 괴로운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편으론……. 그 자식이 아니라 내가 그 차에 타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 인간들은 절대 반성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힘들었겠어요.”
주미는 잠시 숨을 고르고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정말 힘들었던 건……. 그 자식을 죽이겠다고 꾸민 일에 무고한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는 거였어요.
한 명은 아까 봤던 운전기사 아저씨였고, 다른 한 명은…… 그때 전혀 무고한 차 한 대가 절벽 아래로 밀려 나갔어요.”
다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양손을 맞잡은 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손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주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차에 타고 있던 분도 돌아가셨어요. 우연인지…… 아저씨 맞은편에 모셔져 있더라고요.”
“……!!”
아까 주미가 꽃을 놓아둔 맞은 편에는 다연의 모친이 있었다.
사고가 난 날짜, 상황 그리고 장소 모두 똑같았다.
다연이 기적처럼 살아난 그 사고…….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 주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연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연 씨?”
제 이름이 몇 번이나 더 불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연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똑똑.
몇 번을 불러도 대답 없는 다연이 이상해 주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제야 주미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안 다연이 시선을 맞추었다.
“네?”
“다연 씨,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말하는 다연도 듣고 있는 주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집에 가서 쉴래요?”
“아…… 네.”
다연은 창백한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주미는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한 번씩 다연을 살펴보았다.
“아까 집…… 나왔다고 했죠? 한강 호텔이면 나도 거기 투숙 중인데, 같이 밥 먹을래요?”
“아니요…….”
다연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24시간도 안 되어 구자혁에게 들킨 것이 무슨 큰 비밀일까 싶어 솔직하게 말했다.
“진성 호텔에 있어요.”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나 보네.”
주미는 갈림길에서 진성 호텔이 있는 쪽으로 우회전을 했다.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다연 씨는 표정이 참 솔직해요.”
“네?”
“투명하다고 해야 하나…….”
다연은 운전 중인 주미를 바라보았다.
“내가 늙었다고 할 만큼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세상에 다연 씨처럼 얼굴에 제 마음이 다 드러나는 사람 못 봤거든요. 봤어도 내가 관심을 안 뒀을 수도 있고요.”
“제가요?”
“나 처음 만났을 때는 흥미로워하고 반가워하더니 호텔에서 그 자식이랑 만났을 때는 상당히 불편해하더라고요.”
신호 대기에 걸리자 주미가 다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은…… 놀랍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마음이 그대로 다 보여요. 그리고 구자혁. 이름만 나와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아래에 물기가 고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