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6)
  • 59화

    주연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박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뒤따라가고 있어요.]

    “약점이 될 만한 거 하나 정도는 꼭 건져야 해요. 위험한 사람이니 정말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고요.”

    운전 중에 이어폰으로 받은 것인지 박 기자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조카도 죽이려 했던 사람인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차도 바꿔서 타고 있으니까요. 속도 붙고 있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박 기자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오늘 구재식을 만나러 오기 전 주연은 박 기자와 상의한 일이 있었다.

    절대 구재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조카를 쳐내기 위해 주연과 손을 잡는 것으로 보이지만, 구재식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면 기회를 봐서 화근이 될 만한 것들을 없애려 할 것이다.

    “구재식 부사장님,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엄마랑은 달라요. 이미 한배를 탔으니 끝까지 함께 하셔야죠.”

    * * *

    며칠을 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다연의 생각은 굉장히 순진한 것이었다.

    집을 나온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구자혁은 다연의 앞에 서 있었다.

    늦은 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연은 누군가 룸을 잘못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한다연, 문 열어.”

    문 너머로 구자혁의 목소리가 그리고 ‘한다연’이라는 이름이 똑똑히 들렸다.

    언제고 닥칠 일이라 다연은 순순히 문을 열었다.

    잠들었을 때조차 흐트러짐이 없던 구자혁인데 엉망인 모습으로 다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연을 지나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자혁은 등지고 선 채 주먹을 쥐고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하아.”

    다연의 말에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매서운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자혁은 휴대폰을 켜서 다연에게 건넸다.

    “기사, 아주 잘 봤어.”

    “무슨 기사요?”

    “모른 척하기로 한 건가?”

    영문을 몰라 다연은 자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가 내민 휴대폰을 받아서 그가 말한 기사를 읽어보았다.

    기사를 읽어내려갈수록 다연의 눈이 커졌다.

    “이게……. 어떻게…….”

    다연은 놀라움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마석 건설을 찾아간 것이 어떻게 잘못을 빌러 간 것으로 각색되었는지 기가 막혔다.

    그것도 모자라 다연이 구자혁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다는 마지막 글은 충격이었다.

    “연기가 참 많이 늘었어.”

    비아냥대는 자혁의 말에도 다연은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뒤에서는 의붓언니와 이런 줄도 모르고 깜박 속을 뻔했어. 그 순진한 얼굴에 말이야.”

    처음에는 구자혁이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연기를 했다고 하는지 그리고 주연과 무엇을 하는지도.

    기사를 다 읽고 난 뒤에 다연은 깨달았다.

    사진으로 짜깁기한 이 말도 안 되는 기사를 구자혁이 믿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연을 만나러 온 이유가 오해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님을.

    “나보다…… 이 기사를 믿고 있군요.”

    “적어도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구자혁과 말끔한 정리를 원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정리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허탈감에 다연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를 이용한 건 구자혁 씨가 먼저 아니었던가요?”

    “뭐?”

    “트레이닝 파트너.”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다연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자혁의 핏발 진 붉은 눈에는 자신과 같은 배신감과 허탈감이 뒤엉켜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게 왜.”

    다연은 순간 자신의 잘못 들은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너무나도 무감하게 되묻는 자혁의 말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 당신 본인 아닌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을 안 사람처럼 다연은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이 계약에 최선을 다했어. 협조하기로 한 거 아닌가?”

    자신은 이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다연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계약서가 오간 사이일 뿐.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결국 그 끝은 서류에 적힌 조항들만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네요. 제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구자혁 사장님.”

    “한다연.”

    “계약에 있는 비밀유지 조항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기자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못 미더우시면 사람을 붙이셔도 상관없습니다.”

    다연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본의 아니게 상호 믿음이 훼손되었으니 계약 종료일을 앞당겼으면 합니다.”

    “뭐 하자는 거야?”

    “자연스럽게 별거설부터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다연.”

    이름을 불러도 다연은 그의 눈을 외면한 채 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 * *

    자혁이 돌아가고 난 후, 멍하니 앉아 있던 다연은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주연이었다.

    전화받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안 받으면 자기 전화를 피했다고 할 것이었다.

    그리고 자혁이 보여 준 기사에 대해 주연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다연은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좀 나와.]

    다짜고짜 나오라니.

    [주소 보낼게.]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기가 막혔지만 다연은 주연을 만나 언제까지 이럴 건지 따지고 싶었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다연은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갔다.

    주연이 불러낸 곳은 다연이 있는 진성 호텔과 가까웠다.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한강 기업 로고가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구자혁이 떠올랐다.

    “하아.”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에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다연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알면서도 다연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막다른 길 끝에 택시가 멈추었다.

    작은 카페 안에 있는 주연이 보였다.

    다연은 택시에서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주연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다연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기사 뭐예요?”

    “뭐?”

    “모른 척하지 마요. 이중생활이라니. 그리고 내가 찾아간 걸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기사를 낼 수 있어요?”

    “아, 그거.”

    인제야 알겠다는 듯 주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연덕스럽게 구는 주연에게 구역질이 일 것만 같았다.

    “너한테 기자가 붙었을 줄은 나도 몰랐지. 한강 기업 사모님은 다르구나.”

    이실직고는 바라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비꼬는 건 정말 참기 어려웠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그 기사는 정말 모르는 일이라니까.”

    계속 발뺌하는 주연 때문에 다연이 한숨을 내쉬자 주연이 자신 앞에 놓인 음료를 밀어주었다.

    “주문하고선 입에도 안 댔는데 마실래?”

    “아니요.”

    다연은 음료를 다시 주연이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속 탈 텐데 사양하지 말고 마셔.”

    -탁.

    “앗 차가워.”

    주연이 조금 세게 밀어서인지 음료수가 그대로 쏟아졌다.

    “어머, 미안.”

    쏟아진 음료는 다연의 바지와 신발을 엉망으로 적셨다. 흰색 캔버스화가 엉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옷은 그렇다 해도 신발이 엉망이 됐네.”

    다연은 냅킨으로 옷과 신발을 닦아냈지만, 이미 다 젖어버려서 소용없었다.

    “아참, 오는 길에 신발 하나 샀는데. 이걸로 갈아 신을래? 너, 나랑 사이즈 같잖아.”

    “됐어요.”

    “나 때문이잖아.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그냥 좀 신어라.”

    주연은 상자에서 신발을 꺼내서 다연의 발 옆에 놔주며 말했다.

    계속 거절하는 것이 더 민망한 상황이라 내키지 않는데도 신발을 갈아신었다.

    “잘 어울린다.”

    이런 칭찬이야말로 주연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기사…… 언니 짓인 거 다 알아요.”

    언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나서 다연은 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니라니까.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기자를 붙여 붙이길. 그리고 나는 그날 네가 온 거 비서실에서 알려줘서 안 거야.”

    늦은 시각이었고 카페 안에는 다연과 주연, 두 사람밖에 없어서인지 주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억울해하는 표정과 말투에도 다연은 진심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늘 왜 불러낸 거예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해서.”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밤중에 불러냈다는 것이 다연은 허탈했다.

    “네가 피하지 않겠다고 한 거 테스트도 할 겸 해서.”

    그러면 그렇지.

    아무런 의도가 없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올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다연은 피로감을 느꼈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일어날게요.”

    “태워줄게.”

    “아니요. 혼자 갈래요.”

    다연은 단칼에 거절하고 카페를 나왔다.

    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다 비가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곤 잠시 걷기로 했다.

    터벅터벅 걷는데 주연에게 받은 신발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편하지 않았다.

    결국, 다연은 음료에 젖은 자신의 신발을 꺼내 다시 갈아신었다.

    그리고 주연이 좋아하는 고가 브랜드의 신발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하아.”

    다연은 종일 한숨을 내쉰 것 같은데도 숨이 제대로 트이지 않고 답답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이 올 때까지 다연은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몇 날 며칠 그렇게 있을 거 같았던 다연의 정적은 휴대폰 알람으로 깨졌다.

    [엄마 기일]

    배터리가 바닥을 보이던 휴대폰은 그 알람을 끝으로 완전히 전원이 꺼져버렸다.

    까만 화면을 한참 바라보던 다연은 휴대폰의 마지막 알람을 무시할 수 없기에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샤워를 하면서도 다연의 정신은 어젯밤 자혁이 찾아왔었던 시점에 멈춰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 당신 본인 아닌가?”

    귓가에 그의 말이 끊임없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그가 찾아와 준 것을 반가워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구자혁에게 바란 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트레이닝 파트너를 이용한 것에 대한 사과? 아니면 옆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을까?

    다연 자신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떤 고민을 하든 구자혁은 자신을 믿지 않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어차피 정리해야 했던 사람이잖아. 잊자. 한다연. 잊자.”

    다연은 애써 잊으려는 듯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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