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게 진 회장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내심 다른 의미로 정리를 바라고 있었다.
계약서 따위는 집어치우고 진짜 부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꼭 그래야 하느냐?”
“네.”
다연의 대답이 단호한 것을 보니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남녀 사이는 두 사람만이 아는 것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는 밀어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은 다연의 편이라고 자혁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자혁은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자혁을 따로 만나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 중에 진 회장이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다연에게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래, 알겠다.”
진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 미리 꺼내 놓았던 봉투를 들고 돌아와 앉았다.
그리곤 봉투를 다연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다.”
“감사합니다. 보관료는…….”
“나중에 말하마.”
안 받겠다는 말이 아니어서 다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주 어려운 걸로 받아낼 작정이다.”
“네.”
다연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비싼 것도 아닌 어려운 것이라니.
돈이 없는 분이 아니니 아마도 다른 것으로 받고 싶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이라던가 아니면 자혁이 매번 가져다주는 난 화분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진 회장이 원하는 보관료보다 제 부친이 남긴 것이 무엇일지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그것은 진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거라.”
“그동안 보관해주신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은걸요.”
다연은 진심이었다.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2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무언가를 보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다연은 진 회장이 정말 고마웠다.
“뭔가…… 아주 힘든 물건이 있을 것 같구나.”
“……네.”
다연도 진 회장과 같은 생각이었다. 제 부친이 무엇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봉투를 여는 순간 다연은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부친이 남긴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주연이 요구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이 돈이 됐든, 주연을 꼼짝 못 하게 할 증빙 자료가 됐든 봉투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저……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말해보아라.”
“혹시 구자혁 씨가 찾아오면…….”
“설마 비밀로 해달라는 게냐?”
“……네.”
아무 일 없었다고 했으면서 그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 너무 속이 보이는 말이라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리 진 회장이 말을 안 한다고 해도 자혁이 알아내려면 다연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들킬 때 들키더라도 쉽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제법 티가 나도록 진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연은 담담하게 제 뜻을 말했다.
“제가 한국에 없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신세를 졌더라고요. 계약 이상으로요.”
“필요한 일이었을 테지.”
두 사람의 결혼이 진짜로 보여야 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혁이 나서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다연을 외국으로 보낸 것이나, 주연이 찾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리고 지긋지긋한 소문들도.
그것들 모두 해결 하는 것은 다연이 아닌 구자혁이 필요에 의해 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해요. 그래야 하고요.”
한다연도, 구자혁도 양쪽 모두 완벽히 정리되길 바랐다. 그러려면 더는 구자혁의 신세를 지면 안 된다.
진 회장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겠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진심으로 인사를 한 후 다연은 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 호텔 룸으로 돌아왔다.
* * *
실내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여느 일식집과는 달랐다. 그간 고급 식당을 안 가 본 것도 아니건만, 이곳의 아우라는 강심장인 주연도 위축되게 했다.
두 번째 방문임에도 주연은 어색하게 앞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한주연입니다.”
예약자의 이름이 아니라 방문자의 이름을 말해야만 하는 곳.
“모시겠습니다.”
친절한 미소 외에는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종업원을 따라 미로 같은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가장 구석진 방문 앞에 멈췄다.
-똑똑.
예의상 하는 조용한 노크 뒤, 직원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주연은 다다미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이 세팅되어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술잔을 손에 든 남자는 주연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주연답지 않게 떨렸다.
두 번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카를 밀어내고 한강 기업 대표에 오르려는 야망을 품은 사람답게 눈빛에 예사롭지 않았다.
먼저 연락해온 쪽은 구재식 부사장이었다. 박 기자가 조금씩 퍼트린 지라시 내용에 구재식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었을 때였다.
구재식은 박 기자가 아닌 주연에게 연락을 했었고, 처음에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었다.
[청담동 애화, 5시.]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에 주연은 고민 끝에 나가기로 했다.
정말 구재식이 맞는다면 두 사람의 목적이 같을 것이고, 만약 구자혁이 판 함정이라면 자신은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의심을 품고 나간 자리에는 진짜 구재식이 있었다.
주연과 같은 배를 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기꺼이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구재식은 느긋하게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내려놓았다.
“기사 잘 봤네.”
“보셨군요.”
주연은 술이 든 주전자를 들어 구재식 부사장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박이영 기자라고 했던가?”
“네.”
“제법 쓸 만한 재주를 가졌어.”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뵈니 제가 다 기쁩니다.”
주연은 눈을 내리뜬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 박 기자가 따라붙은 것도 모르고 한다연이 제 발로 마석 건설로 찾아왔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사를 준비하던 중에 다연이 짐을 싸서 집을 나가는 장면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한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구자혁과 한다연을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트릴 기회를 드디어 잡은 것이다.
한강 기업의 주주총회를 보름 앞두고 터진 기사는 구재식 부사장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가 한강의 경영권을 가질 적임자임을 확인시켜 줄 기회였다.
“후속 기사는 언제쯤 낼 예정인가?”
“조만간 정리해서 올라갈 예정입니다.”
구재식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 기자,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 같은 장사꾼이 기자를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그건 그쪽에서 잘 알아서 해주게.”
부탁하는 모양새였지만, 속마음은 지극히 몸을 사리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재식이 연락을 하고자 했다면 박 기자에게 연락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제보를 받는다는 글을 연락처와 함께 여기저기 많이 올려놓았으니까.
그런데도 구재식은 주연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것만으로 구재식 부사장은 주연과 박 기자가 각본을 쓴 드라마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기획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조용히 돕는 숨은 조력자 정도만 하려 했다.
그래서 처음 다연만 타깃으로 잡은 드라마는 구자혁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번 일로 조만간 있을 주주총회에서 완전히 끌어내리진 못해도 타격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추진 중인 사업에 손실을 크게 입어야 해. 그래야 일이 쉬워지지.”
사방이 막힌 밀실인데도 불구하고 구재식 부사장은 구체적인 이름을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연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두 이해했다.
“분양이 시작되면 두 번째 기사가 나갈 것입니다.”
“명심하게. 절대 만만한 녀석이 아니야.”
세 번이나 죽음을 피해간 놈이거든.
구재식은 주연이 부어 준 술잔을 입에 대며 다음 말을 삼켰다.
참 질긴 목숨이었고, 질긴 악연이었다. 드디어 끊어 낼 수 있는 고지가 눈앞에 보였다.
구자혁 하나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었다. 제 형과 형수, 그리고 십 년 전 사고에서 죽은 사람.
한강 기업의 유일한 장손이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정말 힘들었는데 이제는 정말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제 부친인 구선호 회장이 살아생전에 자혁을 위해 결혼시킨 여자 덕분이었다.
하자 있는 녀석과 결혼까지 한 여자가 누구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참 재미있는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한다연의 모친이 죽었던 사고. 그리고 부친까지.
“이번 일만 성공해. 그러면 거기 회사도 중견에서 대기업으로 올라갈 수 있을 테니.”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는 누구나 할 수 있네.”
“네?”
“확실히.”
주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하지.”
구재식 부사장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박 기자의 말에 의하면 구재식은 갓 스무 살이 넘은 조카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고 했었다.
구자혁이 탄 차를 트럭으로 밀어버렸다고. 폭우로 인한 미끄럼 사고로 위장하려 했지만, 그걸 눈치챈 구자혁이 그 차를 타지 않아서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의 맛을 본 구재식에겐 열심히는 소용없는 것이었다.
확실한 것이 더 중요했다.
“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구재식은 한쪽 입매만 올린 채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애미보다는 영리하구나.”
주연은 거기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재식은 미소를 유지한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하고 가시게. 난 바빠서 먼저 가네.”
구재식이 나가고 난 뒤에도 주연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구재식이 굳이 제 모친을 언급한 이유는 확실했다. 자신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똑똑히 기억하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러니 허튼짓 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 시키는 대로 일을 확실히 마무리하라는 뜻이었다.
모친에 이어 자신도 구재식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주연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을 잡은 이유는 하나였다.
더는 삼류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노력해도 상류 사회로 갈 수 없었는데 누군가는 너무 쉽게 가 있었다. 불치병에 걸렸는데도.
“한다연……. 어쩌니. 내가 더는 그 꼴을 못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