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76)

57화

* * *

주미는 정신과 더불어 자혁이 유일하게 말을 섞는 사람이었다.

주미와 처음 말을 나눈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뒤쯤이었다.

매서운 눈빛 때문에 누구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던 자혁의 인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한강 기업의 유일한 손주라는 것이 알려지자 더욱 어려워했다.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자혁의 앞에 깡마른 여자아이가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네가 구자혁이야?”

날카로운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난 주미. 외자야.”

자혁은 들었던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구재식.”

뜻밖에도 주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자혁의 작은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자혁의 시선이 저절로 주미에게로 향했다.

“내 생부래.”

말을 하는 주미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 톤으로 추측하건대 마치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이게 숟가락이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감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다고.”

주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시락 가득 차 있는 오이를 먹었다.

주미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자혁을 찾아와선 오이나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아무도 주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혁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생아가 소위 스스로 다른 혈통이라고 믿는 귀족 학교에 입학한 것만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름도 ‘구씨’ 성이 아닌 그렇다고 모친의 성인 ‘이씨’도 아니었다.

이모부의 성을 가진 주미를 향한 적대감은 더했다.

그런 시선에 달관한 듯 주미는 채소를 먹으며 투덜거렸다.

“절대로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굳이 이 학교에 나를 집어넣는 우리 엄마도 참 구질구질하지 않니?”

자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미를 이 학교에 입학시킨 사람은 주미의 모친도 그렇다고 작은아버지도 아니었다.

바로 두 사람의 조부인 구 회장이었다.

알면서도 자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 엄마가 너랑 친하게 지내라는데……. 웃기지 않니? 그렇다고 너랑 얼굴 붉히며 지낼 이유도 없지만, 친하게? 미친.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행동만큼이나 거친 언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 목소리 톤이나 말하는 속도가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표정을 몰라도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자혁의 유일한 말벗이었던 정신이 학교에 온 날이었다.

주미를 본 정신은 그저 신기해했다.

“자혁이한테 친한 친구가 있었다니 놀라운데?”

“이 오빠 눈 이상한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친한 거야?”

“뭘 또 그렇게 열을 내? 아니면 그만인 거지. 매번 열을 올리는 네가 더 이상해.”

자혁의 변화를 알아챈 정신은 두 사람을 흥미롭게 보았다.

“사촌끼리 친하게 지내면 어때서.”

“사촌이라니……. 우웩. 토할 거 같아.”

말 한마디에도 격하게 반응하는 주미와 목소리 톤으로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자혁은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만은 격하게 거부했다.

“그럼 친구로 지내던가.”

“쟤랑 친구가 되느니 차라리 묵언수행 하는 비구니가 되겠어.”

“친한 친구도 아니다 사촌 사이도 아니다…… 그럼 너희 뭐냐?”

“나는 말하는 사람이고 쟤는 그냥 벽.”

한강 기업 장손을 벽 취급하는 사생아의 패기에 정신이 피식 웃었다.

“벽?”

“대부분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어쭙잖은 충고를 하거나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하려고 해. 쟤는 그냥 무시하거든.”

“무시당하면서도 왜 와서 말하는 거야?”

“진짜 벽 보고 말하면 미친 줄 알 거 아니야. 적어도 쟤 겉모습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쟤는 살아 있는 벽이야.”

주미의 생각이 재미있어서 정신은 피식 웃었다.

“자혁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비슷해.”

“뭐?”

“대본 없는 라디오 정도랄까?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정의 내리는 보편적인 언어를 거부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살아 있는 벽과 대본 없는 라디오로 그럭저럭 잘 지냈었다.

실력 있는 발레리나로 성장한 주미는 바빴지만, 한 번씩 불쑥 나타나 혼자 제 말만 쏟아내고 사라졌다.

그런 주미에게 자혁이 먼저 말을 건 것은 조부의 심부름으로 가평에 있는 문화재단에 갔을 때였다.

로비에서 거친 욕설을 쏟아내는 목소리가 하필 아는 목소리였었다.

그래서 자혁의 발걸음이 멈췄고 눈이 마주친 주미에게 딱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뭐야?”

“나 지금 서울 가야 해. 안 그러면 공연에 늦어. 네 차 내놔.”

자혁은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쟤 데려다주세요. 전 알아서 갈 테니까요.”

“도련님……. 비가 많이 옵니다.”

기사가 걱정하는 것은 빗속에 운전할 자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오시려고요.”

“택시든 뭐든 있겠죠.”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시던가요.”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주미를 차에 태운 채 떠났고, 도중에 사고가 났다.

사고로 기사는 죽었고, 주미는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태어난 김에 이왕이면 열심히 살아보려 했더니……. 내 팔자가 그렇지 뭐.”

하루는 체념했다가.

“내가 뭘 잘 못 한 게 있다고! 세상에 부모 골라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데 왜!”

분노했다가 절망하는 모든 것을 자혁은 정말 벽처럼 듣고만 있었다.

주미가 자신의 몸 상태를 조금씩 받아들일 무렵 구 회장이 처음으로 암 진단을 받았었다.

구 회장이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자혁도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주미와 구 회장이 한강 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할 무렵 처음으로 자혁이 조현병 환자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분노한 구 회장과 달리 주미는 배를 움켜잡으며 박장대소했다.

“그런 소문은 내가 나야 하는 거 아닌가? 맨날 혼자 떠들고 웃고 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하여간 재미있네. 벽한테 조현병이라니. 하여간 사람들 상상력은 끝내준다니까.”

본인의 일인데도 반응 없는 자혁을 대신해 주미는 마음껏 웃었다.

자혁은 주미의 목소리에 어느 순간 훈련한 거처럼 말하는 사람의 기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안 정신은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를 일부러 자주 만들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힘든 주미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이 힘든 자혁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정신은 자혁을 걱정하는 구 회장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을 주미가 듣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평소처럼 불쑥 자혁의 앞에 나타난 주미는 그녀답지 않게 질문을 했다.

“내 표정이 지금 어때?”

“뭐?”

“못 들었어?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말해보라고.”

목소리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자혁의 매서운 눈이 제법 오랜 시간 주미와 마주했다.

“정말이구나.”

“뭐?”

“사람 표정을 읽지 못한다고?”

자혁의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너도 구재식 그 인간이랑 똑같은 핏줄이 맞았어. 사람을 이용할 줄만 알고 믿지 못해. 아니 믿을 마음조차 없어. 그게 너야.”

그렇게 말하고 휠체어를 돌려 사라지는 주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았던 것 같다.

말하는 걸 보면 굉장히 화가 난 거 같은데 주미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것을 자혁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안 좋을 일이 한 번에 몰려오기로 작정한 것처럼 다음날 구재식이 자신의 부친인 구 회장이 항암제를 맞고 혼수상태에 잠시 빠졌을 때 호흡기에 손을 댔었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었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자혁이었다.

얼마나 욕심이 커야 자신의 아버지도 해칠 수 있는지.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졌다.

그 정점을 찍은 일이 주미의 사고가 자혁이 꾸민 일이 되어 소문이 퍼졌을 때였다.

주미와 그녀의 모친인 이 단장이 눈물로 호소한 인터뷰가 실린 것을 보고 자혁은 처음으로 주미에게 분노의 말을 터트렸었다.

“과연 구재식의 핏줄다워. 이런 식으로 거짓 인터뷰를 하고 네가 피해자인 양하면 뭐라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너, 이걸 정말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연기하지 마. 안 속아.”

그날을 기점으로 자혁은 치료에 전념하면서 경영 승계 준비에 돌입했다.

한강 기업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부인 구 회장이 일구어 놓은 것들이 구재식의 손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소문을 내도 흔들리지 않았었다. 한 번씩 위기가 와도 자혁은 굳건하게 버텨냈었다.

이제 다 와 가는데.

자신을 보곤 긴장하며 가시를 세우던, 메리가 나타나면 제 품속에 숨어들던 여자가 이렇게 자신을 배신할 줄은 몰랐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좁은 비행기 좌석 팔걸이를 올려 둔 자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자혁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 있는 시각, 다연은 진 회장의 집무실에 있었다.

진성 호텔에 투숙하는 게 이미 진 회장에게 보고가 되었는지 다연을 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 호텔 두고 우리 호텔에 투숙할 줄은 몰랐구나.”

진 회장의 말에 다연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됐어요.”

마침 비서가 차를 가져다주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멈췄다.

향긋한 차향이 퍼졌지만, 다연은 좋은 마음으로 그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비서가 나가자마자 다연은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아버지가 맡기신 봉투 받으러 왔어요.”

곧장 봉투를 내 줄 거 같았던 진 회장은 다연을 유심히 한 번 바라보기만 했다.

“그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진 회장의 시선만으로 다연은 괜히 찔렸다. 다연은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자혁이랑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니요.”

“아무 일도 없는데 우리 호텔에 묵는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게냐?”

다연은 입술을 살며시 말아 물었다.

“우리 호텔 창립 파티에서도 그렇고 지난번 전시회장에서도 너희 둘,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

“내심 두 사람이 이렇게 계속 부부로 사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누구보다 자혁과 다연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진 회장이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다연도 듣는 진 회장도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정리라면…….”

“계약 기간이 거의 끝나가요. 조만간 주주총회가 열리면 경영 승계 마무리되니까……. 저는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죠.”

진 회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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