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자혁은 몇 시간째 똑같은 음성을 듣고 있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자혁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곤 생수병을 집어 들고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을 삼켰는데도 답답한 마음이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한다연, 대체……. 하아.”
집에 연결된 미미의 전원은 아예 빼놓았고, 휴대폰 전원도 완전히 꺼두었다.
경호원이 다연을 놓쳤다는 이 실장의 보고를 듣고선 자혁은 손에 들고 있던 생수통을 집어던졌다.
자혁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은 이 실장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 다시 알아보세요. 최대한 빨리. 나 혼자서라도 먼저 갑니다.”
“……네.”
이 실장이 고개를 한번 숙인 후 나갔다 1분도 안 돼서 다시 돌아왔다.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웬만한 일로는 표정 변화가 없는 이 실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곤 조용히 태블릿을 내밀었다.
“이런 기사가…….”
자혁은 낚아채듯 태블릿을 받아들고선 기사를 읽어나갔다.
[사모님의 이중생활.]
제목부터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차에서 내리는 여자의 사진을 보았을 때는 생각의 회로가 멈췄다.
자혁의 차와 똑같지만, 색만 다른 차. 거기에 평소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한껏 차려입은 한다연의 모습이 분명히 찍혀 있었다.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도 있었다.
자혁은 아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소문에 휩싸였던 A 그룹 사장의 배우자, H 씨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산을 가로채어 해외로 도주한 것을 사과하는 척 꽃바구니까지 들고 왔지만, 의붓언니가 극심한 꽃가루 알레르기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남편과 상의해서 돈으로 보상하겠다는 약속하고 돌아갔지만, 현재까지 연락 두절. 의붓아버지의 빚까지 갚으며 키워준 은혜를 갚은 언니를 끝까지 배신했다.]
태블릿을 든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부부가 나란히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 그것을 핑계로 선처를 바랄 것이 불 보듯 뻔해 그녀의 민낯을 알리고자 한다.]
사진과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정신과 전문의’라는 팻말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기에는 다연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도 있었다.
“하아.”
자혁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동안 조카의 허점을 덮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A 그룹 부사장.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카의 정신 질환은 차도는커녕 앞으로도 나을 치료법이 없다는 게 주치의 전언이다.
주주들도 더는 사장의 정신 질환을 두고 볼 수 없어 이번 정기 주주총회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자혁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떨어트렸다.
-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액정이 깨졌다.
조각조각 갈라진 태블릿 화면 위로 캐리어를 들고 택시 앞에 서 있는 다연의 사진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믿을 수 없는, 하지만 이 기사를 읽는 모두가 믿을 수밖에 없는 글자가 아무렇게나 적혀 있었다.
[남편의 추락을 알아차린 그녀는 이번에도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남편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으로 기자에게 돈을 요구했다.]
-Rrrrrrr.
때마침, 자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얼른 손을 뻗어 발신자를 보았지만, 자혁이 기다리던 다연은 아니었다.
기사를 봤는지 정신의 전화였다.
받기 싫었지만, 자혁은 전화를 받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자혁아, 다연 씨가 다 알고 있어. 네 증상이랑 트레이닝 파트너로 부른 것도.]
휴대폰을 든 자혁의 손이 아래로 툭 떨구었다.
[자혁아, 자혁아!]
휴대폰에서 다급하게 자혁을 부르는 정신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당장,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 표 알아보세요. 당장요!”
자신이 한국에 없는 사이에 터진 기사, 그리고 연락 두절된 한다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기사가 반나절이나 포털 사이트에 노출된 것보다 자혁은 제 연락을 받지 않는 다연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 * *
구재식은 뉴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눈길을 확 끄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한주연이라고 했던가? 제법이야.”
“구자혁 쪽 사람한테 적이 많다는 건 우리에겐 좋은 일이죠.”
이수희 단장은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운 뉴스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이 단장의 말대로 한다연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자혁에게도 적이 되는 셈이었다.
두 사람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구재식에게는 이미 동지나 다름없었다.
“한다연이 진짜 그 한다연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 단장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공이 커.”
구재식의 칭찬에 이 단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한주연을 만나고도 구재식은 한다연의 정체를 계속 의심했었다.
그의 내연녀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삼십 년이 넘었다. 한다연의 신분을 정확히 확인한 것으로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무슨 수로 알아낸 게야?”
“그 여자 목에 있는 점을 봤어요.”
“그래?”
구재식도 한다연의 목에 있는 특이한 점이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보진 못했다.
그걸 이 단장이 봤다는 것만으로 이토록 빠르게 확인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예전에도 어디선가 본 거 같았어요. 얼굴도 낯익었고요.”
“예전부터 알던 사람인가?”
“제가 누구예요. 대한민국 발레계의 대모잖아요. 유소년 유망주 중에 내 손을 거치지 않는 아이 없어요. 한다연도 그 유망주 중에 한 명이었고요.”
이 단장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영상으로 봤던 유망주를 콩쿠르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었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른 아이는 실수를 반복하다 결국 도중에 포기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연뿐만 아니라 이 단장이 점찍어 두었던 유망주 모두 실망스러운 무대를 보여 주어 어렵게 시간을 낸 보람이 없었다.
콩쿠르가 끝나자마자 걸려 온 전화는 주미의 사고 소식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발레계의 대모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무수히 많은 자료 중에 한다연이 있다는 걸 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오래된 영상을 찾아보고도 이 단장은 믿기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그 유망주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영상을 보니 어릴 때 얼굴이 지금도 있었어요. 예쁜 외모에 발레 실력도 특출나서 눈여겨봤던 아이였죠. 상품성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봤던 날은 실망만 했었죠.”
“그랬군.”
구재식은 모니터 화면 속 사진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았다.
“당신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됐으니 이걸 잘 이용해서 구자혁, 그놈을 대표직에서 끌어내리는 일만 남았어.”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오랜 염원을 이루겠네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그간 몇 번의 기회를 날렸기 때문에 구재식은 끝까지 신중했다.
“웬일로 구자혁 쪽에서 대응이 늦네요. 새벽에 기사 올라오고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말이에요.”
“한국에 없어.”
말을 하는 구재식의 표정은 밝았다.
“태국으로 출장 갔다 하더군.”
태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편에 탑승자 명단을 보았지만, 구자혁은 없었다.
휴가철이 겹쳐 한국으로 오려 해도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예정대로 구자혁은 일주일 뒤에나 한국에 올 수 있을 것이다.
조각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구자혁이 손쓰기 힘든 상태에서 한 방 제대로 날렸네요. 한주연, 그 여자 일하는 거 정말 마음에 쏙 드네요.”
확실히 한주연은 전략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다듬으면 장기 말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유능했다.
“그런데 의외네요. 한주연이 알고 있다는 건 모친인 이경옥도 알고 있다는 건데……. 그 사람, 당신 사람 아니에요?”
그랬었다. 이경옥은 제법 쓸 만한 심부름꾼이었다. 민감한 돈거래에 요긴했으니까.
술집 작부에서 중견 기업 사모님으로 신분 세탁해줬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모른 척하다니 괘씸했다.
그동안 구재식이 부렸던 사람 중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려던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누구보다 이경옥이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신분 세탁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대로 두기에는 이경옥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 번 더 만나봐야겠어.”
“이경옥을요?”
더는 일할 수 없는 이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아니, 한주연을.”
제 어미가 한 짓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기사를 낼 정도로 일을 벌일 인물이라면 보통 눈치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만났을 때도 영특해 보였다.
한주연을 잡고 있으면 이경옥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구재식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비릿하게 웃었다.
* * *
무작정 공항으로 달려간 자혁은 몇 번의 허탕 끝에 취소된 비행기 표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자혁의 표정은 비좁은 비행기 좌석만큼이나 불편한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머릿속에는 읽고 또 읽어보았던 기사 내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다연이 왜 마석 건설을 찾아갔는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사에 올라온 사진은 기사를 올린 시각과 불과 몇 분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사진의 구도 또한 사전에 약속된 것처럼 한눈에 한다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자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태원 일이 해결되면 다연에게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었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정신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지 직접 말하려고 했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나와 대화를 해줘.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어. 당신 외국에 지내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아.”
“그거 알아요? 같이 놀 사람 없어서 놀아달라고 부른 거 같아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다연에게 왜 아이 같은 요구를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었다.
다른 누구에게서 듣는 것이 아닌 이번에야말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든 것이 엉켜 버렸다.
마치 몇 년 전 주미와의 일이 데자뷔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