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손쉽게 풀어 준 것이 의심스러워 태원은 곧장 짐을 쌌다.
현금과 자혁이 놓고 간 항공권과 여권까지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곤 숨겨두었던 차에 올랐다.
“구자혁……. 성한 동아줄일지 썩은 동아줄 일지 내가 어찌 알고 덥석 잡아, 잡길.”
그는 구재식에게 잡혔다가 겨우 도망쳐나 온 순간을 떠올렸다.
구재식이 사주한 놈들에게 잡혀서 얼마나 맞았는지 팔뼈가 부러지고 한쪽 눈이 뜨이지 않은 상태에서 죽을힘을 다해 탈출했었다.
그리고 베트남과 라오스를 거쳐 방콕에 숨어 몇 년간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구자혁이 나타났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태원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묶였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붉은 자국이 남긴 했지만, 멍이 들진 않았다.
“그 자식들……. 분명히 고수였는데.”
싸움을 잘하진 않았지만, 몸동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구자혁이 보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동작이 빠른 자들이었다. 자신을 기절시킬 수도 있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었다.
몸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상처 하나 없었다. 맨살에 줄이 쓸린 자국만 있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구자혁은 내가 필요하고, 구재식은 내가 죽길 바라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몸값 좀 올려볼까?”
태원의 입술이 비열하게 뒤틀렸다.
그때였다.
오토바이 여러 대가 태원의 차를 에워쌌다.
“뭐, 뭐야!”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위협하는 통에 태원은 차를 한쪽에 멈췄다.
가방을 품에 안고 빠져나갈 곳을 찾고 있었다.
-우지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조수석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싼 태원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깨진 창문 사이로 알록달록한 문신이 새겨진 팔이 불쑥 들어왔다.
“살려줘!”
태원은 다시 가방을 꼭 안고선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을 때릴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태원이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깨진 차창으로 들어온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오랜만이야.]
휴대폰에서 자신이 아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재식이었다.
“아! 안 돼! 살려줘.”
구재식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태원은 두려움에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억.”
-퍽.
갑자기 어둠 속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개중에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는 녀석도 있었다.
태원은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가방을 꼭 끌어안고 유리창이 모두 깨진 차 안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이 조용해지고 정면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하게 비췄다.
-저벅저벅.
검은색 그림자가 불빛 사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그림자는 압도적이었다.
“살려줬으니 이제는 은혜를 갚을 차례 아닌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구자혁이었다.
두려움이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로 태원은 차에서 뛰쳐 내렸다.
“가, 갈게. 한국.”
자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꿈적도 하지 않았다.
“데, 데리고 가줘. 하라는 대로 할게.”
자혁이 뒤돌아섰다.
“호텔로 데려가.”
몇 시간 전 자신을 의자에 묶었던 가드들이 양팔을 잡은 채 차에 태웠다.
살았다는 안도감 외에는 다른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차에 타자마자 자혁은 이 실장에게 지시했던 것을 확인했다.
“비행기 표는 어떻게 됐습니까?”
“가장 빠른 것이 사흘 뒤입니다.”
휴가철이긴 해도 방콕은 한국과 직항이 많은 곳이었다.
이 실장은 자혁이 불편할까 봐 국적기로 알아봤을 것이다.
“저가 항공도 상관없으니 가장 빠른 것으로 알아보세요. 지금은 빨리 한국으로 가서 김태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휴가철이라 전 좌석 매진입니다. 그나마 가장 빠른 것이 사흘 뒤 오후 2시 비행기입니다. 그리고 김태원은 밀착 경호를 지시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한국에 빨리 가고 싶은 이유가 꼭 김태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콕에 오기 전부터 다연과 전화 통화가 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미미에게 접속하면 다연이 집에 잘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 터지지 않는 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잘 보급된 한국이 벌써 그리웠다.
“호텔로 갑시다.”
“네.”
* * *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이 어스름하게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태원을 해결하러 이동했기 때문에 자혁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습기에 무거워진 재킷을 벗어 던지고 자혁은 그대로 침대에 엎드린 채 누웠다.
그런데도 자혁은 휴대폰에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앱을 켜고선 미미를 불렀다.
“미미야.”
곧장 들려야 할 미미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과는 인터넷 속도가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려도 미미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자혁은 침대 시트에 파묻었던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전원을 켜주세요.]
자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려 상체를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이 메시지가 뜨는 것은 집에 설치된 미미의 전원이 완전히 꺼져 있다는 뜻이었다.
전원을 껐다 켰다는 앱으로 명령할 수 있었지만, 전원을 완전히 뽑아 버린 상태라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다연이 이상했다.
* * *
다연이 정기적으로 외출하는 요일이었다.
그리고 다연이 출판사에 들어가면 장시간 머무는 것을 자혁이 보호를 이유로 붙여 둔 사람도 알 것이다.
다연은 출판사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혜에게 전화를 했다.
[하이. 어쩐 일이신가?]
“언니, 혹시 누가 와서 절 찾으면 녹화 중이라고 말해 주세요.”
[뭐?]
다짜고짜 거짓말을 해달라는 부탁이 이해 안 되겠지.
[너 무슨 일 있어? 그 인간들이니?]
“나중에 설명할게요. 부탁드릴게요.”
다연은 전화를 끊고선 차에서 내렸다.
자혁이 신경 쓰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동안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존재를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어디 가는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연은 출판사 건물에 차를 두고 몰래 밖으로 나와 예약한 택시에 올랐다.
“한강 병원으로 가주세요.”
“네.”
여러 정황 보았을 때 다연이 정신과 상담하고 난 다음 오후가 자혁의 상담 시간을 확률이 높았다.
다연은 한쪽에 숨어서 정신의 상담실을 주시했다.
제발, 자혁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얼른 자신이 가진 의문이 해소되기를 바랐다.
정신의 상담실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남자가 나왔다. 다연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구자혁이었다.
“당신이…… 진짜 거기서 나오면……. 난 어떻게 해야 해요?”
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자혁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다연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아…….”
한참을 서 있다 정신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다연은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제 오후 한강 병원에서 자신의 주치의였던 정신을 만나고 집에 온 이후로 다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는 꺼둔 채 탁자 위에 올려두고 TV 전원만 껐다 켰다는 것을 반복했다.
-툭, 툭, 툭.
어제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 같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힐 무렵 시작된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무심코 눌러버려서 켜진 TV에서는 날씨 소식이 흘러나왔다.
[전국이 장마전선의 영향에 들어갑니다. 예년보다 늦게 시작된 가을장마는 전국 곳곳에 게릴라성 폭우를 동반할 예정입니다. 상습 침수지역은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기상캐스터가 알려주는 장마 소식에 다연은 창 앞에 서서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마네…….”
그 해에도 장마가 예년보다 늦게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미미가 선곡한 음악을 들으면 다연은 달력을 한 번 바라보았다. 며칠 뒤면 엄마의 기일이었다.
그동안 새엄마와 주연의 눈치를 보느라 챙기지 못했었다.
2년 동안은 도피하듯 외국에 있었다.
‘한국에 있으니까. 엄마한테 가봐야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연은 어느새 구자혁을 떠올렸다.
지금쯤, 아니 다연이 정신의 상담실을 나온 직후 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다연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구자혁과 자신이 함께 보낸 지난 몇 달간 시간의 의미가.
구자혁의 트레이닝 파트너이자 서류상 아내, 그것도 계약서로 움직이는 관계였다는 것.
다연은 쏟아지는 비를 건조한 눈길로 한 번 바라보곤 자신이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 가지고 왔던 그대로 짐 가방을 쌌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에 서서 다연은 책을 꺼낸 위치를 기억해냈다.
책 한 권만큼 비어 있는 곳에 다시 책을 꽂았다.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책장 가장 안쪽에 눈에 익은 표지가 보였다.
다연은 조심스럽게 슬라이드 책장을 한쪽으로 당기고 그 앞에 섰다.
“하아…….”
슬라이드 책장으로 가려져 있던 가장 구석진 자리에 다연의 일러스트집이 있었다.
한 권도 아니고 그동안 다연이 냈던 시리즈 모두 있었다.
첫 번째였던 이탈리아부터 가장 최근에 출간된 것까지.
“이게…… 왜…….”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자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연의 일러스트집을 구자혁이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다연은 자신의 일러스트집을 꺼내려 손을 뻗었다 다시 거두었다.
“꺼내 봐서 뭐 하겠어.”
다연은 다시 슬라이딩 책장을 원래 있던 위치로 옮겨 놓고선 서재를 나왔다.
자혁에게서 받은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지난번 미술관에서 자혁이 사준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다연은 망설였다.
“비가…… 오니까.”
다연은 고민 끝에 우산을 다시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우산을 펼쳤다.
캐리어를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고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