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자혁이 비행기에 오르는 그 시각 다연은 한강 병원에 있었다.
정확히는 정신의 상담실에서 그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Rrrrrrrr.
다연의 휴대폰이 울렸고 [구자혁]이라는 이름이 정신에게도 잘 보였다.
“다연 씨…….”
당황한 정신은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다연은 태연하게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도 잘 아시죠? 제 남편이요.”
“…….”
정신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서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많으실 거 같은데…….”
정신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의 표정은 담담했다.
자혁이 함께 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지금쯤 공항에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재미있으셨나요?”
“다연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다연 씨 남편이 누구인지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다연은 그 시기가 언제였을지 생각해 보았다.
설마 구자혁이 피부 테스트를 운운했던 이유가 정신과 의논하고 난 뒤의 결과일까 싶었다.
남자와 여자의 은밀한 신체 접촉까지 주치의가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수치심과 더불어 모멸감마저 일었다.
“그 사람이 말하던가요?”
“아닙니다.”
그게 뭐라고 작은 안도감이 생겼다.
자신은 그와 키스한 것도 말했으면서.
정신이 구자혁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자신의 주치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얇아져만 갔다.
아직은 종이 한 장 두께만큼 남아 있는 것은 그간 다연이 상담하면서 느꼈던 정신의 진심이었다.
“다연 씨가 한국에 오기 전 사진을 봤습니다.”
사진이라면 다연도 보았던 사진 일터.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연을 알아봤어야 했다.
“가면을 쓴 사진이라 몰랐습니다.”
다연은 그 사진을 떠올려 보았다. 축젯날 광장에서 춤을 추던 게 찍혔었다.
목에 있던 점 때문에 춤추는 사람이 한다연이라는 게 들통 났었다.
“목에 있는 점 때문에 아셨군요.”
“……네.”
지워버릴 수 없는 제 몸에 표식 같은 점이 이번에도 문제가 되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말씀하세요.”
다연은 정신이 사실대로 말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구자혁 씨가 앓고 있다는 증상 때문인가요?”
다연은 이미 알고 정신에게 온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 트레이닝 파트너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만 다연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정신은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네.”
정신의 대답에 다연이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떴다.
“다연 씨…….”
“저기요, 선생님.”
다연은 정신의 말을 가로챘다. 흔들리는 시선을 겨우 붙잡아 정신에게 고정했다.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던 다연이 조용히 말했다.
“날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기꺼이 인형이 되기로 계약서에 사인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덜 비참했거든요.”
“다연 씨.”
“그런데 진짜 인형 놀이는 선생님이 하셨어요. 그 사람과 나를 손 위에 올려두고서요.”
“…….”
다연이 일어서서 상담실을 나가는 동안 정신은 넋이 나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젠장.”
뒤늦게 문을 열고 나가봤지만, 어디에도 다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운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자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방콕에 간다고 했던 자혁의 말이 뒤늦게 생각났다.
휴대폰을 든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 * *
기상이 좋지 않아 6시간이 훌쩍 지나 방콕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습한 열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휴대폰을 켜자 로밍 안내 문자가 수신되었다.
다연에게 전화를 하려다 시간을 보고선 그만두었다.
“사장님, 호텔로 이동하겠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항구 쪽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기선 두 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출장이라곤 했지만, 개인적인 일정으로 시간을 나흘이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우기가 시작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스콜은 그날의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갑시다.”
“네?”
웬만해서는 되묻는 일이 없던 이 실장이었다.
비가 언제 올지 모르는 우기였고, 한국과 달리 치안도 불안한 늦은 시각이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해요. 잡아놓으라고. 내가 갔을 때는 필요한 정보를 바로 들을 수 있도록.”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드는 이 실장을 보고선 자혁은 창밖을 보았다.
빗방울로 얼룩진 창문 사이로 비에 젖은 도시가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통이 일었다.
다연을 안고 잠들면 가라앉을 텐데.
불쑥 한다연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자혁의 머릿속을 차지해버리는 여자였다.
지금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서 창밖을 내다볼 때면 무심결에 생각났다.
까르르 웃고 있는 모습이거나 아이처럼 골을 내는 한다연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하려다 그만두었다.
우산을 빙그르르 돌리며 웃는 다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 왔으면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자혁은 양 입술이 슬며시 올라갔다.
‘여기는 지금 우기니까. 우산 파는 곳은 많겠네. 이번에는 두 개 사야겠다.’
자혁의 입술 끝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 * *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 이 실장이 까만색 장우산을 펼쳐 들었다.
차 문을 열고 자혁이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잘 받쳐 들었다.
그때 멀리서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건장한 남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준비됐습니다.”
앞장서는 가드를 따라 허름한 실내로 들어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 한 남자가 의자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자혁이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한쪽 다리 위에 올려두고선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인기척에 숙였던 고개를 든 남자가 자혁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너, 너는!”
“반응 보니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으니 긴말하지 않겠어.”
“난, 난 몰라.”
자혁의 한쪽 입술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내가 뭘 물어볼 줄 알고?”
“뭐…… 뭐든. 나, 난 몰라.”
덥고 습한 실내에는 선풍기 한 대만 툭툭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자혁 때문인지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구재식.”
“흡.”
이름 석 자에 남자의 떨림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이곳으로 도망친 이유 아닌가? 구재식한테 죽기 싫어서.”
남자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내가 찾아냈는데 구재식이라고 널 못 찾아낼까?”
“원하는 게 뭐야?”
태어나고 자란 고국을 버리고 이곳까지 도망쳐 왔다.
여기서 또 도망친다고 한들 금방 잡히거나 자신이 했던 것처럼 사고로 위장해 죽일 것이다.
“자수해.”
“나더러 지금 감옥 가라는 거야?”
“지은 죄가 있으면 벌 받아야지.”
“뭐야?”
흥분해서인지 남자가 앉은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자혁을 안내했던 가드가 양어깨를 지그시 꽉 잡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지금 너한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거야.”
얇은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맞아. 그때 트럭으로 밀어버린 차는 원래 내가 탔어야 했지.”
남자가 씩씩거렸다.
“두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지.”
자혁의 운전기사와 절벽으로 떨어진 차를 운전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발레리나였던 주미의 다리가 망가졌다. 다시는 춤을 출 수도 스스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물론 김태원은 당시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았다. 합의금과 벌금으로.
“이제 와 자수를 내가 왜! 공소시효도 지났는데.”
“내 말 못 들었어? 네가 자수를 해야 살 수 있다고.”
“말 안 들으면 날 죽일 건가?”
김태원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널 죽이려는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너도 날 죽일 거잖아!”
“내가 왜?”
자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돈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놓고선 자기 죽음은 두려워하는 꼴이 비위가 상했다.
“네가 자수하면 구재식은 지금 자리를 내놓아야 하지.”
태원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계산하는 듯했다.
구재식이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앞에 있는 구자혁이 한강 기업의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자신을 죽이려는 구재식은 힘을 잃게 되는 거고, 자신이 죽여야 했던 구자혁은 힘이 더 강해진다.
“젠장.”
그때 자신이 밀어버린 차 안에 구자혁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텐데.
아니, 만약 그때 그 차에 구자혁이 타고 있고 죽이는 데 성공했더라도 구재식은 자신을 없애려 했을 것이다.
계속 이렇게 몸을 숨긴 채 도망 다니느니 자혁의 말대로 자수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이미 공소시효는 지났으니까.
“난 사람 죽이는 취미는 없어. 내가 돌아가면 널 풀어 줄 거야.”
“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풀어 줄 거야?”
“한국에 와서 자수하던가, 아니면 구재식 손에 죽던가. 어차피 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
자혁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느긋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비가 멈춘 것인지 실내가 고요해졌다.
“자, 자수하면 변호사 붙여줘.”
자혁이 눈짓을 하자 이 실장이 브리프 케이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혁이 앉았던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태원은 눈을 찡그린 채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았다.
비행기 표와 여권이었다.
“일주일 주겠어.”
자혁은 바로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고, 여전히 습하고 더웠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자 태원을 잡았던 가드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 올까요?”
“올 겁니다. 지시한 대로 하라고 하세요.”
“네.”
자혁의 작은아버지이자 한강 기업 부사장인 구재식은 김태원을 절대 그냥 둘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죽이거나 입을 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반드시 멀쩡한 상태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네.”
“그리고 비행기 티켓 앞당기세요. 최대한 빠른 것으로요.”
“네.”
태원을 직접 만나보니 일주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