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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76)
  • 53화

    자혁의 전용 룸으로 올라온 다연은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우연한 만남에서와 달리 주미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혁과 주미 사이에 흐르는 신경전은 이유를 막론하고 다연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피곤해 보여.”

    “네. 엄청이요.”

    자혁이 다연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다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저기……. 구자혁 씨.”

    “며칠이나 못 볼지 모르는데 좀 안아보자.”

    “그게 아니라…….”

    다연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인지 자혁이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다연이 자혁이 잡았던 손목을 살펴보자 발진이 올라와 있었다.

    전에도 괜찮았다가 발진이 올라온 적이 있었기에 다연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약 있어?”

    최근 발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다연의 가방 속에는 약이 빠져 있었다.

    “집에 있어요.”

    “병원 가자.”

    자혁이 다연의 손을 잡았다 아차 싶었는지 다시 놓았다.

    어김없이 발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곤 자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집에 데려다줄게.”

    “TF팀은 어쩌고요?”

    조금 전 룸으로 오면서 30분 뒤 회의할 거라 통화해놓고 그새 잊은 듯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지라시 내용을 의식해 다연을 데리고 인형 놀이까지 하는 자혁의 정성이 갸륵했다.

    “집에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자혁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기사를 호출했다.

    “집에 가서 전화해.”

    “네.”

    자혁은 로비까지 다연과 함께 내려왔다. 문 앞에 대기 중인 차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그때 직원이 다가와 자혁에게 종이 백을 내밀었다.

    “말씀하신 겁니다.”

    “고마워요.”

    다연이 뒷좌석에 타자 자혁이 직원에게 받은 것을 다연의 허벅지 위에 올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집에 가서 꺼내 봐. 심심하면 해. 첫사랑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루어질 거라는 환상은 버리고. 출발하지.”

    차가 출발하고 한참 뒤에야 다연은 종이 백을 열어 보았다.

    “아…….”

    옥상 정원에서 보았던 봉숭아꽃이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첫사랑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 * *

    자혁이 오늘 주치의 상담을 빼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주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담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은 인사도 없이 다연에 관해 물었다.

    “한다연 씨 오늘 상담 안 왔어. 무슨 일 있어? 지난번처럼 아파?”

    “지금 내 상담 시간이잖아.”

    “네 아내인 한다연 씨가 오늘 연락도 없이 상담에 안 왔다고. 남편인 구자혁 씨한테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자혁의 시선은 책상에 놓인 다연의 상담 기록지에 고정되었다.

    상담 일정을 매주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이긴 했어도 연락 없이 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다연은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제 피곤했는지 발진이 올라왔어.”

    “약 먹고 가라앉은 거 봤어? 아침에 얼굴 보고 출근한 거야?”

    제 아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정신이 신경에 거슬렸다.

    “다연 씨 몸 상태 알면 조심해줄 수는 없어? 왜 이렇게 무책임하게 구는데?”

    “책임질 거니까. 그리고 내내 괜찮았어.”

    다연의 안부가 궁금한 쪽은 자혁이 더했다.

    어제 그렇게 보내고 오후가 된 지금까지 아직 다연과 통화를 하지 못했다.

    혹시나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지고 봉숭아 물들이느라 잠을 못 잔 건 아닌지.

    이루어지길 바라는 첫사랑이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형은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같은 거 들어 본 적 있어? 봉숭아 물을 들인다거나 하는…… 뭐 그딴 거 말이야.”

    “뜬금없이 그건 또 왜?”

    “그걸 믿더라고.”

    “그러니까 누가?”

    자혁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있어? 없어?”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었냐.”

    정신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이 연애 중이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설사 그가 누군가를 사귄다고 했어도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유치한 장난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 형은 그런 거 할 사람이 아니지?”

    “그 순간에는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완전한 마음에 그런 미신에 의지하게 되는 거지.”

    역시나 정신과 의사다운 말이었다.

    자혁은 그동안 제 주변에 있던 사람 중 봉숭아 물을 들이는 일을 할 사람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없었다. 한다연 외에는.

    “봉숭아 꽃물뿐만 아니라 남산 타워에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걸렸잖아.”

    “그런 것도 해?”

    처음 들어 본 이야기였다.

    자물쇠라니. 거기에 사랑이라는 마음을 잠가놓기라고 하는 것인가.

    “사랑이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으니까.”

    “왜?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말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신의 시선이 따가웠다.

    “뭘 또 그렇게 한심하다는 듯 보는데?”

    “알면 됐다.”

    “뭘 알아?”

    정신은 일부러 자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 자연스럽게 표정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자혁이 자각하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사랑이 끝나면 아프니까.”

    자혁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

    정신은 열렬히 사랑도 해 보고 아픈 이별도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형, 사랑 같은 거 해 보지 않았잖아. 어떻게 알아?”

    “꼭 해봤다고 아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만나는 환자 중에 그런 아픔 때문에 오기도 하니까.”

    정신은 의사였다.

    자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미 만났어.”

    정신은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요즘 자주 만나네. 우연이야?”

    “거제도 출장이 잡혀서 데려갔는데 주미도 거기에 있었다고 했잖아. 다연이랑 이미 만났더라고. 어제는 다연이랑 호텔에서 마주쳤어.”

    정신은 주미를 만났다고 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 눈치 빠른 녀석이 한 번에 알아차리더라. 형과 내가 다연이를 트레이닝 파트너로 이용하고 있다는 거 말이야.”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 녀석이 첫 번째 트레이닝 파트너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혹시나 주미가 말할까 봐 내내 신경이 곤두섰고. 다연은 그걸 알아차렸고.”

    “무슨 말이야?”

    “내가 주미를 여자로서 신경 쓰는 걸로 생각하더라고.”

    “그렇다면 다연 씨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 오늘 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

    주미는 정신의 공식적인 첫 번째 환자였다.

    발레리나였던 주미의 사고는 끔찍했다. 사고가 난 차는 원래 자혁이 타려던 차였다.

    주미는 공연 때문에 서울로 와야 했고, 모친인 이 단장은 대회 심사 중이라 주미의 발이 완전히 묶였었다.

    그때 자혁은 자신의 기사를 내주었다. 그리고 빗길에 끔찍한 사고가 났었다.

    처음부터 주미를 자혁의 트레이닝 파트너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대인기피증이 심했던 자혁과 사고 후유증이 심각했던 주미, 그리고 이 둘을 오랫동안 봐 온 정신.

    셋이서 편하게 만나던 것이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주미에게 솔직하게 말하려던 날 들켜버려 오해를 풀 새도 없이 일이 꼬여버렸다.

    자혁의 병에 대해 의심만 하던 그의 작은아버지가 그 사실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했다.

    자혁은 그걸 폭로한 사람이 주미라고 생각했었다.

    “너 아직도 주미가 말한 거라고 생각해?”

    “…….”

    자혁이 침묵하는 의미는 혼란이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주미는 아닐 거야.”

    “형도 확신은 못 하네.”

    “자혁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믿어.”

    자신이 내뱉은 말에 주미가 한 말이 오버랩 되었다.

    ‘아무도 믿지 못하니까 네 병이 그대로인 거야.’

    자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다연 씨한테 사실대로 말하자.”

    “…….”

    “믿음이 중요한 사람이야. 너에게 가졌던 믿음이 깨지면 다연 씨야말로 고치지 못할 거야.”

    “나를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한다연을 걱정하는 거야?”

    “둘 다.”

    정신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둘 다 내 환자니까.”

    자혁은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환자 이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너 말하는 거야? 아니면 다연 씨 말하는 거야?”

    “둘 다.”

    “여유 있는 거 보니 아주 죽겠다는 건 아니구나. 너야말로 뭐가 두려워서 말 못 하는 거야? 경영권? 아니면 다연 씨가 떠날까 봐?”

    자혁이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주물렀다.

    정신이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한심하다는 눈빛까지 더해서.

    “그런데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뭘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는 건데?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오늘도 자혁은 자연스럽게 정신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본인이 자각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자혁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신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자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리하면 여기까지 한다고 하고선 줄행랑이야.”

    “바빠. 비행기 타러 가야 해.”

    “어디 가?”

    “태국.”

    자혁은 문을 열어 놓고선 몸을 비스듬히 돌려세웠다.

    자혁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들렸다.

    “회사 일 때문에 가는 거 맞아?”

    정신은 걱정되어 물었다.

    “회사 일이라……. 회사 일 맞지.”

    자혁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꾹 찔러넣고선 완전히 등을 보인 채 나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정신은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 * *

    다연에게는 TF팀과 철야에 들어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태국에 갈 예정이었다.

    오랫동안 추적해온 사람이 있었다.

    김태원.

    공연장에 가야 하는 주미에게 내주었던, 원래는 자혁이 타야 했던 그 차를 치고 간 덤프트럭의 운전사를.

    자혁은 오랫동안 그를 찾고 있었다.

    사고 후에는 주미의 상태가 워낙 심각해 그것에만 신경 쓰느라 정확한 사고 원인을 살펴보지 못하고 변호사에게만 맡겨두었었다.

    주미가 타고 있던 차 외에 절벽까지 튕겨 나간 차가 한 대 더 있었던 큰 사고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던 날이라 단지 운이 없었던 거로 생각했었다.

    그때 사고에 대해 다시 의심을 품게 된 것은 덤프트럭 운전자를 찾으면서였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운전자는 일부러 숨으려 작정한 사람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몇 년을 추적한 끝에 태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혁은 고민 끝에 직접 만나기로 했다.

    작은아버지, 구재식의 자금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구재식도 애타게 김태원을 찾고 있다는 것도.

    자혁은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다시 한번 다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자혁은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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