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6)
  • 52화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불편한 물음표가 가득 생겼다.

    자혁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산책하지.”

    먼저 몸을 돌려 걷는 자혁을 따라 다연도 몸을 돌려 걸었다.

    예쁜 나무와 꽃이 있는 산책로를 걷고 있는 건 같았지만, 누군가를 마주친 전후의 온도가 달랐다.

    이런 일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면 좋으련만.

    그랬다면 다연은 다시 자혁의 팔짱을 끼거나 기댄 채 걸었을 것이다.

    다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뻔뻔하게 굴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발자국 떨어진 다연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지만,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걷기만 했다.

    이 침묵을 견디는 게 내기였다면 지는 사람은 다연이었다.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인사했잖아.”

    “말은 바로 해야죠. 우연히 만나 이름만 주고받은 게 다인데……. 당신이랑 아는 사이라면 정식으로 다시 소개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주미 씨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 같았지만요.”

    다연이 걸음을 멈췄다.

    “신경 쓰였어?”

    “네.”

    “잘 참는 거 같았는데.”

    주미를 생각하느라 다연은 아웃 오브 안중인 줄 알았더니 나름 다연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면서도 말 안 해주는 그 심보는 뭐예요?”

    그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었다.

    “나를 신경 쓰는 게 나쁘지 않아서.”

    다연이 원하는 대답은 해주지 않으면서 그가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리는 것만 같았다.

    다연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한강 기업의 구자혁 사장이 되어 딜을 하는 거 같아 몹시 불쾌했다.

    “됐어요. 안 들을래요. 식사 자리에서 직접 물어볼 테니까요.”

    다연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가 다시 몸이 돌려세워졌다.

    자혁이 다연의 양팔을 잡고 마주 서서 희미하게 웃었다.

    “화내지 말고.”

    “나, 화 안 났어요.”

    “믿음이 안 가.”

    다연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질수록 옅었던 그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맞아요. 놀리는 거 같아서 기분이 정말 정말 별로예요.”

    다연은 유독 끝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웃기만 했다.

    “그만 웃죠. 정말 놀리는 거 아니면 말이에요.”

    “놀리느라 웃는 게 아니야.”

    “당신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느끼면 조심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에게 잡힌 양손을 뿌리치며 다연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금도 봐. 웃기만 하고 주미 씨가 누구인지 말은 해주지 않잖아요.”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구자혁 씨가 신경 쓰니까요.”

    “잠깐 신경 쓰였지만,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어.”

    그의 말에도 다연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믿음이 안 가요.”

    “이유는?”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이긴 해도 이런 사소한 감정들은 숨겨두고 드러낸 적 없었어요. 처음이었어요. 당신이 이토록 신경 쓰는 거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질투인가?”

    다연의 눈썹이 일그러진 채 가운데로 몰렸다. 다연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그가 먼저 불쑥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 화날 거 같으니까. 하지 마.”

    정말 아닌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어. 스스로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전혀.”

    “하, 기가 막혀.”

    다연이 몸을 휙 돌렸다.

    뒤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렸다.

    “누구인지는 말은 해주지 않으면서 웃기만 하고, 질투라고 혼자 착각하고. 이상한 남자야.”

    어느새 다연을 따라잡은 자혁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 단장 딸이야.”

    “JK발레단 이수희 단장님 말하는 거예요?”

    자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은 주미에 대해 더 물을 수 없었다.

    * * *

    시간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산책의 끝은 자연스럽게 라운지였다.

    주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선 영상을 보고 있었다.

    -똑똑.

    자혁이 노크하듯 테이블을 두드리곤 다연의 의자를 빼주었다.

    주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행동이 옥상 정원에서와는 다른 모습이었고, 이번에도 당황한 쪽은 다연이었다.

    “배려 깊은 남편이 너였다니……. 내 입을 찢고 싶다.”

    주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조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자혁이 다연의 옆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너 들으라고 한 말 아니야.”

    자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연에게로 향했다.

    “전에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어요. 그게 자혁 씨인지는 모르고요.”

    “거제도 어디에서 만났어?”

    “등대에서요. 자혁 씨 커피 사러 갔을 때요.”

    옥상 정원에서와 달리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그림 그리는 와이프 배려해서 일부러 커피 사러 간 배려 깊은 남편이라고 칭찬을 했었지, 내가. 마음이 예쁘다고도 했었나?”

    “아마도요.”

    다연의 말에 주미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네가 말한 해안 산책로 한번 가봤는데 별거 없더구만.”

    “대충 봤겠지. 거기에 5분 이상 있었어?”

    “한가하게 거기서 5분을 낭비할 수 없지. 거길 가본 게 어디야.”

    주미가 말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다연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다색이 다 거기서 거기더만. 계절마다 다르긴 뭐가 달라. 안 그래요, 다연 씨?”

    “저도 그날 처음 본 바다라…….”

    다연이 말끝을 흐렸다.

    “그럼, 사계절 다 보고 말해줘요. 진짜 다른지 말이에요. 구자혁 말은 신뢰도가 떨어지거든요.”

    다연은 순간 ‘또 만나려고요?’라고 물을 뻔했다.

    아직 주미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것이 없는데 다연이 누구인지 아는 상대는 갑자기 훅 하고 다가오는 거 같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뒷걸음질 쳤다.

    “리조트는 어땠는지 왜 보고가 없어? 이용하기 불편한 점 없었어?”

    놀랍게도 자혁은 그때 주미가 등대에 왔었다는 건 몰랐으면서도 리조트에 머물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좋더라. 계단 없이 설계하느라 직원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더라. 내가 큰 도움을 준 건 알고 있지?”

    “숙박권 무한정 주는 걸로 보상했잖아.”

    계단 없이 설계한 이유는 리조트 안 어디든 휠체어가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테고, 거기에 주미의 조언이 많았을 거라는 것을 다연을 알 수 있었다.

    다연은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더 궁금했다.

    “자혁 씨와 많이 친하신가 봐요.”

    “아니요.”

    “아니.”

    친근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짧고 단호한 대답에 다연이 무안해졌다.

    “친구 아니에요?”

    “쟤랑요? 네버. 싫어요.”

    “쟤랑 친구를 하느니 차라리 친구 없이 사는 편이 나아.”

    “너 원래 친구 없잖아.”

    “누가 할 소리.”

    이 정도면 함께 식사할 사이가 아니지 않나?

    “그러면…… 무슨 사이예요? 옛사랑?”

    “한다연.”

    “하아…… 끔찍하네요.”

    억눌린 목소리로 다연을 부르는 자혁과 고개로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주미를 보며 다연은 말문을 닫았다.

    적어도 자혁이 말한 질투를 할 만한 대상이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구자혁이 나에 대해 말할 리는 없고……. 우정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흘렀거나 앞으로도 그럴 일이 절대 없는 사이라는 것은 확실해요.”

    참 어려운 사이였다.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무수히 많은 언어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지 궁금했다.

    “밥 정도는 같이 먹어도 친하지는 않은…… 그런 사이도 있군요.”

    “네.”

    주미는 밝게 웃었다.

    “만나면 꾹꾹 눌러둔 전투력을 풀 가동해야 하는 사이라고 해둘게요.”

    “아…….”

    “식사 끝나고 뒤돌아서면서 바로 잊어도 돼.”

    자혁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은지 주미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괜찮아요. 나도 그럴 거니까요.”

    마침 음식이 서빙되어서 다연은 이 이상한 분위기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음식은 맛있었다. 후식이 나오기 전 다연은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 * *

    주미는 다연이 자리를 피하자마자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너, 의도가 뭐야?”

    “그런 거 없어.”

    “내가 널 몰라? 보아하니 너나 나와는 다른 부류 사람 같은데…….”

    주미는 물이 든 잔을 들며 자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표정이 어때?”

    자혁이 눈을 내리뜬 채 대답했다.

    “굳어 있겠지.”

    “목소리로 추측하지 말고. 똑바로 나를 봐. 그리고 보이는 대로 말해.”

    자혁은 시선을 들어 주미를 바라보았다. 신중하게 주미의 목소리를 분석했다.

    “화난 얼굴.”

    “틀렸어. 난 네가 오답을 말하기 전까지 웃고 있었어.”

    “목소리는 아니었어. 한다연한테 말할 때와도 달랐고.”

    주미는 컵에 남아 있는 물을 다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전에 보았던 그림도 그랬고……. 두 사람 겉보기에는 보기 좋아 보이네. 아주 예쁜 그림 같아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제정신이랑 너. 한다연 씨 데리고 이상한 장난 하는 거면……. 너 가만 안 둘 거야.”

    “장난하는 거 아니야.”

    “다연 씨는 네 병에 대해 알아?”

    자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네 어머니한테 일러바쳤듯이 또 한 번 한다연한테 폭로라도 하려고?”

    자혁의 냉소에 주미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못 할 거 없지. 한 여자의 인생을 구하는 일인데.”

    “그래, 처음이 어려운 거지 두 번은 쉽지.”

    두 사람 사이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넌 아직도 내가 그랬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자혁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그렇게 아무도 믿지 못하니까. 네 병이 그대로인 거야.”

    주미가 씁쓸하게 웃었다.

    마침 다연이 돌아왔고 후식으로 상큼한 셔벗이 나왔다.

    주미는 미소를 지으며 다연을 바라보았다.

    “난 여기 셔벗 진짜 좋아해요.”

    “저도요.”

    주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자식이 잘해줘요?”

    “그런 건 나 없을 때 물어보는 거야.”

    “너한테 물은 거 아니잖아. 귀 닫아 그럼.”

    대화에 동참하기 어려워 다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말문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세심한 면이 있어요.”

    주미의 눈빛이 흥미롭게 빛났다.

    “퇴근할 때 빈손으로 들어오지 않고 뭘 자꾸 사 와요. 간식 같은 거요.”

    “구자혁이요?”

    주미가 놀란 듯 자혁에게 힐끔 보다 다시 다연에게 집중했다.

    “네. 대화할 때도 표정이 바뀌거나 하면 금방 알아차리고 다시 물어보고요. ‘말해봐’ 이러면서요.”

    자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다연이 슬며시 웃었다.

    “알 만하네요.”

    “주어, 목적어 빼고는 말하는 거, 별로라고 했더니 신경 써주더라고요.”

    “놀랍네요.”

    다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야, 미미.”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자혁이 화난 듯 주미를 부르는 말에 다연의 눈이 커졌다.

    “미미요?”

    “내 이름이 외자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별명이 미미인데.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지가 성질나면 꼭 그렇게 불러요. 저 자식이.”

    대화는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서로 날카로운 대화를 주고받을 거면서 왜 식사는 같이하는지 다연은 이해되지 않았다.

    주미와는 다음에 또 보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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