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수희 단장은 지난번 미술관에서 보았던 다연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일정 때문에 하 작가에게 인사만 하고선 차에 다시 올랐다.
기사가 시동을 걸 때쯤 자혁과 다연이 다정히 주차장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몇 번이나 봤던 모습인데도 거슬렸다.
다연의 목에 감긴 스카프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무심코 바라보다 이 단장의 눈이 커졌다.
정확히 다연의 목에 있던 점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다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디에서 본 듯한 인상을 받았었다. 다연의 목에 있는 특이한 점을 언젠가 본 적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에 잠겨 있느라 이 단장은 딸인 주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슨 생각 하느라 사람이 들어 오는 것도 몰라?”
“왔니?”
이 단장은 딸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발레 영상을 틀었다.
“내 얼굴 한 번 쳐다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사고 이후 이 단장은 딸을 보는 게 불편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간병인을 붙여두고 바쁘다는 핑계로 피할 수 있었는데. 퇴원한 뒤로는 집에서 마주치는 것이 서로 불편했다.
“지난번 대회에서 보았던 아이 중 유소년클럽에 추천할 만한 아이들 영상 메일로 보냈어. 확인해봐.”
“알았다.”
주미는 휠체어를 굴려 자신의 방으로 가려다 말고 멈춰 섰다.
“부사장님한테 전해. 지라시에 돌고 있는 거 내리라고.”
이 단장의 고개를 들고 주미를 쳐다보았다.
“능력도 없으면서 경영권에는 왜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어. 나 이용하는 거 싫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네가 사실대로 증언만 해줘도 일이 쉽게 풀리는 걸 왜 버티는 거야?”
주미가 아무리 부인해도 그들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주미가 얌전히 협조해 주길 바라는 이유는 하나였다. 주미의 생부이자 한강 기업 부사장이 경영권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놈은 와이프 품에 끼고 잘만 사는데 너는 억울하지도 않아?”
“내 사고 자혁이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 차를 왜 탔냐고!”
주미가 탔던 차는 원래 자혁의 차였다. 단지 재수가 없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사고였다.
“그놈 사람 표정 못 읽는다고 그거 하나만 증언해달라고.”
“난 모르는 일이고 했잖아.”
“무슨 수를 썼는지 와이프 표정은 잘도 알아맞히더라만… 내가 그놈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야. 두고 봐.”
주미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런다고 엄마가 한강 기업 안주인이 될 일은 없어.”
이 단장의 표정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그놈 차만 안 탔어도 이 꼴로 살진 않지.”
“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엄마한테 나는 내 생부라는 인간 바짓가랑이 잡고 있을 수단일 뿐이잖아.”
서로를 아프게 찔러대고 있었다.
주미는 집에 있는 게 싫었다.
“주주총회 때 와서 증언해.”
“증언할 거 없어.”
이 단장의 히스테리가 심한 걸 보니 자신이 사고 났던 날짜가 가까워져 오는가 보다.
본래 집에서 자주 마주치지 않는 모친이었지만, 당분간은 마주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것 같았다.
주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짐을 챙겨 나왔다.
“증언해.”
“경영권 가지고 싶으면 정정당당히 능력으로 가지라고 해.”
“쉬운 길 두고 왜 돌아가야 하냐고! 증언만 하라니까!”
“거짓 증언하면 감옥 가. 이 몸으로 내가 감옥까지 가야겠어?”
이 단장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호텔에서 지낼 거야.”
주미는 휠체어를 굴려 집을 나왔다.
* * *
자혁은 전날 말한 대로 그의 차를 집으로 보냈다.
다연이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구자혁의 차를 보낸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의 눈을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다연은 자혁이 보낸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다연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춘 것인지 자혁이 호텔 입구에서 차 문을 열어주었다.
반나절 만에 마주한 자혁의 얼굴은 까칠해 보였다.
“딱 맞췄네.”
자혁이 다연에게 손을 내밀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연은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일 잘하는 직원 많다더니…… 구자혁 씨 혼자 일 다 한 거 같은 얼굴이에요.”
자혁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일하라고 괴롭히는 사람이 좀 많네.”
자혁은 다연의 손을 잡고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두 사람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연은 의식하지 않았다.
“옥상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 꽃이 많이 피었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의 말이 순순히 다연에게 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다연은 어떤 꽃인지 물어보며 가 보자고 했을 것이다.
지라시를 읽어서였을까. 피로가 쌓인 얼굴로 룸이 아닌 옥상 정원에 가자고 하는 게 무대만 다른 인형 놀이처럼 느껴졌다.
내연녀를 데리고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닌 진짜 부부로 보여야 할 테니까.
그리고 계약상 다연은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연은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가요. 어떤 꽃이 폈는지 보고 싶어요.”
전문가의 손길을 받은 듯한 옥상 정원에는 자혁의 말대로 여러 가지 꽃이 있었다.
장미, 수레국화가 있는 곳을 자혁과 천천히 걸었다.
“어머, 이거 봉숭아네요.”
봉숭아를 보자 다연은 반가워 무릎을 접고 그 앞에 앉았다.
“아는 꽃이야?”
“그럼요. 어릴 때 봉숭아꽃이 피면 손톱에 물들이곤 했었어요.”
이해가 안 되는지 자혁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화장품 중에 손톱에 바르는 게 있잖아.”
“그건 인위적으로 만든 거고요. 이건 옛날부터 내려온 천연재료예요.”
다연은 꽃잎을 손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설마, 그걸 믿어?”
미신도 아니고 유치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자혁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펴졌다.
“여기 있는 봉숭아는 내가 어릴 때 봤던 거보다 꽃망울이 훨씬 큰 거 같아요.”
다연은 접었던 무릎을 천천히 피면서 일어났다.
그때 직원이 다가와 음료가 든 캐리어와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사장님, 말씀하신 거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자혁은 그것을 건네받고선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 앉지.”
오늘 인형 놀이는 야외에서 데이트하는 것이 콘셉트인 듯했다.
다연은 자혁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따듯한 커피는 다연에게 주고 자혁은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작은 종이봉투 안에 든 것은 먹기에 아까운 예쁜 모양의 수제 초콜릿이었다. 자혁은 초콜릿 하나를 다연의 입에 넣어주었다.
적당한 달면서 깔끔한 맛의 초콜릿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어요.”
“당연하지. 이거 만든 사람 내가 뽑았거든.”
오전 내내 고민하느라 웃을 일이 없었는데 자혁은 만나자마자 다연은 계속 웃고 있었다.
커피와 초콜릿을 먹고 자혁은 다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느릿한 걸음으로 정원을 걸었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
그의 말에 다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
왜 웃긴.
그가 자랑해 마지않는 직원이 만든 수제 초콜릿을 먹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다.
먹고 뒤돌아서서 또 먹을 거 이야기를 하니까. 웃을 수밖에.
“왜 이렇게 자꾸 뭘 먹이려고 하는 거예요?”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으.”
매번 민망한 말을 잘도 하는 자혁 때문에 다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부 테스트할까?”
“저기요, 사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직원들이 볼 수 있어요.”
자혁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맞는구나.”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웃음 사이로 끼어들었다.
“구자혁 맞네.”
이어서 들려온 말에 시선을 돌리자 주미가 있었다.
“또 만났네요.”
주미의 등장으로 다연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팔이 사라졌다. 그리곤 다연과 간격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자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주미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인사도 없네.”
“통화할 때는 여기 온다는 말 없었잖아.”
편안한 목소리 톤과 대화 내용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친밀한 것을 다연은 직감했다.
“또 보네요. 구자혁 와이프였다니……. 진짜 인연이었네요, 우리.”
“정말 그런가 봐요.”
“두 사람…… 아는 사이야?”
반갑게 인사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자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연히 몇 번 만났어.”
“거제도에서요.”
다연의 대답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조각품이 요즘 웃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길래 설마 했는데……. 방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네. 구자혁이 웃다니. 그것도 기분 좋게 말이야.”
다연은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하던 그가 굳은 얼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긴 어쩐 일이야?”
“호텔에 뭐 하러 왔겠니? 잠자러 왔지.”
“며칠이나 있어?”
자혁의 말에 주미는 슬며시 인상을 썼다.
“엄마 피해서 나왔어. 조금 있으면 그날이잖아.”
그날이 좋은 날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자혁의 인상이 눈에 띄게 굳었다.
“두 사람은 산책 중?”
“응.”
“예전에 네가 가 보라고 해서 와봤는데……. 이런 건 역시 내 취향이 아니네. 풍경이나 식물들 말이야.”
지난번 거제도 등대에서 주미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한 거 같았다.
“누가 여기를 추천해 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잠깐 보러왔어요.”
“계절마다 바다색이 다르다고 하는데….”
“바다색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역시 이런 풍경을 보는 건 내 취향이랑 안 맞네요. 바빠서 이만 실례할게요.”
그때 등대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추천해준 사람과 이곳 옥상 정원을 추천해 준 사람이 동일인이었고, 그 사람이 자혁이라는 것이 다연은 놀라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그때처럼 주미는 능숙하게 휠체어를 돌리며 말했다.
“밥이나 먹자. 오랜만에.”
주미에게 머물렀던 자혁의 시선에 다연에게 닿았다.
“나도 괜찮아요.”
식사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지극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주미의 등장으로 자혁의 분위기가 달라진 이유가 궁금했다.
“그럼 산책하고 라운지에서 봐. 난 시원한 에어컨이 절실해서 먼저 갈게.”
시간도 말하지 않고 주미는 휠체어를 밀었다.
주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준 다연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복잡한 표정으로 주미를 바라보는 자혁이 보였다.
다연이 보고 있는 줄 모르고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주미를 보자마자 다연을 안았던 팔을 풀었던 그의 행동이 마음 한구석에 체한 듯 걸렸다.
그에게 당당히 묻지 못하는 자신이 이 체증을 더 가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