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주연의 눈빛에 어린 살의가 진실해 보였다.
“그래, 무덤.”
지난번 진성 호텔 파티에서도 주연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 너도 같이 죽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아.”
“그 빗속 사고에서 너도 같이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주연은 일관되게 자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친하진 않았어도 원한을 살 만큼 나쁘지 않았었다.
원한이라면 주연이 아니라 다연이 가져야 했다.
새엄마와 주연에게 괴롭힘을 당한 쪽은 다연이었으니까.
더는 주연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떠올리며 다연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 불러내려고 그딴 소문 낸 거 아니었어요?”
다연의 기습 질문에 주연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비겁하게 뒤에서 그러지 말고 직접 찾아오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네가 순순히 만나줬겠어? 그 대단한 남편 뒤에 숨어 있던 세월이 자그마치 2년이야.”
주연은 다연을 노려보았다.
“아빠 재산 다 챙겨서 도망쳤을 때는 좋았겠지. 네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래,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해볼까? 그 돈 다 어디 있는지 말이야.”
아직도 돈 이야기였다.
정말 자신이 부친의 재산을 다 가지고 도망쳤다면 지금 굳이 주연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을 텐데.
“내가 정말 전 재산 들고 도망쳤다면, 스스로 여기에 왔을까요?”
“말장난하려 들지 말고. 내놔.”
어쩜 이렇게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하는지.
“내가 챙긴 재산도 없지만, 아빠 거라면 나에게도 지분 있어요.”
“뭐야?”
다연은 제 부친의 집무실이었던,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건물. 마석에 얼마에 매각한 거예요?”
다연의 말에 마진철과 주연이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 결혼식 일주일 앞두고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아참, 결혼식은 어떻게 했어요?”
“할 건 해야지. 인륜지대사인데.”
눈치 없이 해맑게 결혼식을 잘 치렀다는 마진철의 말에 다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표독스럽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모녀를 피해 도망치듯 비행기에 올랐던 날 그들은 결혼식을 치렀단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것이 무엇일까.
서러움이었다.
참으라고 해서 참았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껐다.
무엇이 되었든.
새엄마의, 주연의 말을 잘 들은 결과가 이거라니.
“내 뒷조사할 만큼 한 거 같으니까. 잘 알겠네요. 내가 빼돌린 재산 같은 건 없다는 거.”
“너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
주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한강 기업 구자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증거 남기지 않고 몰래 숨기는 거 얼마든지 가능한 사람이잖아. 한다연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일 정도로 꼭꼭 숨긴 능력자잖아.”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숨겼다고 믿고 있는 재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물어나 보고 싶었다.
“내가 빼돌렸다고 생각하는 재산이 얼마인데 이러는 거예요? 한 십억 정도 돼요?”
다연이 알고 있는 부친의 재산을 돈으로 환산하면 그 정도쯤일 거라 십억이라고 한 것이었다.
“삼십억.”
“뭐라구요?”
다연은 자신이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믿기 힘든 표정을 짓는 다연을 보곤 주연은 다시 한번 금액을 확인시켜주었다.
“삼십억. 이라고.”
그런 큰돈을 손에 만져보기는커녕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큰돈이…… 있었어요? 아빠한테요?”
부친의 재산 규모가 그 정도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사실이라면 빚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너도 아빠 장례식 때 봐서 알지? 빚쟁이 쫓아왔던 거. 이 건물 팔아서 겨우 빚 정리했어. 진철 씨 아니었으면 여기 죄다 빨간딱지 붙을 뻔했고.”
주연이 하는 말 중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회삿돈이랑 금고에 있던 돈이 몽땅 사라졌어.”
들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걸 내가 가져갔다는 건 억지예요. 있는 줄도 몰랐던 돈을 어떻게 숨겨요? 말이 안 되잖아요.”
“됐고. 빚 해결하는 데 쓴 돈이라도 내놔. 그 정도 능력은 되지? 네 남편 돈 많잖아.”
결국 원하는 또 돈이었다.
“상세 내용 보낼 테니 이자까지 해서 보내.”
주연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뭐야?”
“번호 찍어.”
주연의 날카로운 눈빛을 다연은 피하지 않았다.
“이상한 소문 더는 만들지 마요.”
“얌전히 번호나 찍어.”
주연의 휴대폰을 들어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주연에게 다시 건네주자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rr
다연의 휴대폰이 울리는 걸 확인한 주연인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전화 피하지 말고 받아.”
할 말 있으면 직접 하라는 것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였다. 주연의 전화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피할 이유 없어요.”
“이번에도 그 잘난 남편 뒤에 숨어서 잠적하면.”
“그럴 이유 없다고 했잖아요. 숨지도 않았지만, 말도 안 되는 오해는 풀어야 하니까 오늘 직접 온 거예요.”
“오해는 무슨.”
주연은 코웃음을 쳤다.
“피하면, 너랑 한강 기업 둘 다 잘근잘근 밟아줄 테니까.”
실현 불가능한 말로 어깃장을 놓는 주연과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집에 돌아온 후에도 다연은 생각에 잠겼다.
제 부친이 사고 나기 전 행동에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금화했던 돈의 행방은 묘연했고, 갑작스럽게 진 회장을 만난 것도 수상했다.
그런데 그 모든 행동이 자기 죽음을 예상하지 않고선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봉투 안에…… 뭐가 있을까?”
“봉투라니?”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다연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언제 왔어요?”
“뭘 그렇게 놀라? 내 차 들어오는 알람 못 들었어?”
자혁이 재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툭 던져 놓고선 다연에게 다가왔다.
“그림 그릴 거 고민하느라…….”
다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핑계를 댔다.
산채 정식집에서 헤어진 뒤로 이틀만이었다.
자혁은 조금 날카로워진 눈빛이었다. 급한 일이라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었는 가 보다.
“일은 잘 해결됐어요?”
“해결 중이야.”
그가 무리해서 집에 온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내일부터 TF팀이랑 함께 호텔에서 철야 들어갈 거야.”
“아…….”
그가 말한 철야가 끝날 때까지는 집에 들어오는 게 힘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일 차 보낼 테니까 오후에 나와.”
“어디로요?”
“호텔.”
옆집이라는 말 대신 호텔이라고 했다.
다연은 문득 자신이 읽었던 지라시 내용이 떠올랐다. 그가 호텔에 데리고 나타났다는 여자의 신분을 확인시켜주려는 것 같았다.
“같이 식사하자. 보여 줄 곳도 있고.”
다연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눈들에 보여 주기 위해서겠지.
“네.”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던 계약서 조항대로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 없이 자혁은 곧장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라진 2층을 올려다보며 다연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자혁이 돌아오면 오늘 주연을 만난 것을 이야기하려 했었다. 그리고 제 부친이 진 회장에게 맡긴 것에 대해 상의해보고 싶었다.
자혁은 자신보다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가장 안전한 사람이 구자혁이니까.
한편으로는 이 계약에 있어서 자혁이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다연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무 민폐인가?”
언제까지 구자혁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진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자.”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 * *
샤워하고 나오자 자혁이 침대에 가로로 누운 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던 다연의 손이 멈췄다.
“할 말 더…… 있어요?”
자혁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난번 얘기했는데.”
그가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다연에게 다가왔다.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이던 다연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 느슨했던 공기가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새 까먹으면 안 되지.”
자혁이 다가와 다연의 손목을 잡고 희미하게 우시었다.
“테스트 먼저.”
무엇을 위한 테스트인지 알고 있었다.
시선은 다연에게 고정한 채로 자혁은 다연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갖다 댔다.
“집에 가서 보자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이틀 전 일이었고, 그 말이 아직 유효한 것인지 미처 몰랐었다.
“2층으로 곧장 가버려서…….”
“서운했나?”
“그런 거 아니에요. 일이 바쁜가 보다 했어요.”
정색하며 아니라곤 했지만, 사실은 서운한 것을 넘어 상처를 받았다. 그런 자신을 보며 다연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매번 계약이 끝나면 떠날 거라 말한 사람은 다연, 본인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
자혁은 얼른 다연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발진도 없는데 얼굴이 굳은 다연을 바라보았다.
“한다연.”
자신을 이토록 흔들리는데 구자혁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아닌 사람이랑 계약서가 동반된 결혼을 했어도…… 당신은 이랬겠죠?”
다연은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을 다연이 했다. 자혁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한다연이 아닌 다른 사람과 계약 결혼이라니.
조부가 다연을 서류상 아내로 언급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귀찮게 엉겨 붙지는 않겠네 였다.
물론, 서류상 아내 후보로 한다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부는 여러 명의 후보를 언급했었다. 그중에는 정략결혼을 추진하려고 했던 집안도 있었다.
그 모든 제안을 자혁은 단칼에 거절했었다. 어떤 이유로든 약점이 잡힐 빌미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한다연을 거론했을 때 자혁은 해볼 만하겠다 생각했었다.
한다연이 아닌 다른 여자와는 계약 결혼 자체를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
지금 다연이 별안간 던진 질문에 자혁이 솔직하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는 다연이 귀엽기도 했고, 밉기도 했다.
“어떤 대답을 원해?”
그와 몸을 섞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했으면서 자꾸만 확인하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아니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한다연.”
“흘러가는 대로…… 두자면서요.”
이 작은 머리로 얼마나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자혁은 다연의 젖은 머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럴 자신 있는데.”
자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한다연은 어때?”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혁의 눈이 더 짙어졌다.
“나도…….”
그럴 수 있어요.
다음 말은 자혁의 입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 온 자혁의 손이 뜨거웠고, 맞닿은 숨결은 더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