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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76)

49화

다연은 보안 요원이 알려준 아카데미 룸으로 갔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여서인지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웬일이니? 그 새침데기가 진짜 올 줄이야.”

“입들 조심해. 다들 지난번에 봤지? 내 팔 쓰다듬고 팔짱도 끼는 거? 나 그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그건…… 주연 씨가 사실처럼 말해서 다들 깜박 속은 거였잖아요. 진성 호텔에서는 손이 빨갛게 됐었고. 전시회에서는 멀쩡해서 놀랐어요.”

다연은 일부러 문을 열지 않고 조금 기다려 보았다.

엿듣는 거 같았지만, 이것 외에는 그들의 진짜 속마음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여간 마석, 그 와이프…… 입 조심해야겠더라. 한강 기업에 괜히 밉보였다간…… 다들 알지?”

“그럼요.”

이곳에서도 재계 서열이 통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구자혁 아내라는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한번 누려보리라.

다연은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는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불쑥 찾아왔는데 내치지 않고 받아주셔서 제가 고맙죠.”

“다연 씨, 어서 와요. 지난번 전시회에서 보고 자주 보니까 얼마나 좋아.”

주 여사가 반가운 척 인사를 했다.

“집에 있는 게 무료해서요. 근처 왔다가 한번 와 봤어요. 꽃도 좀 사갈까 하고요.”

“잘 왔어.”

다연은 진짜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미소를 날렸다.

“저도 같이해도 되나요?”

“그럼, 조 선생. 생화 충분하죠?”

“그럼요. 저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제 옆에서 하세요. 자주 봐 드릴게요.”

이미 능숙하게 꽃을 꽂는 여자들과 달리 다연은 꽃을 자르는 법부터 배웠다.

지난번 파티에서 봤던 사람 중 빠진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제가 아직 인사 못 한 분이 계실까요?”

“없지. 그날 다 인사했잖아.”

“마석 건설, 한주연 씨랑도 인사했던가?”

다연은 고개를 슬쩍 저었다.

“아직이요.”

“이상하다. 그날 파티에 왔었는데…….”

“주연 씨가 그날 일이 있어 인사도 없이 먼저 간다고 했었잖아요.”

“아참, 그랬구나.”

주 여사는 기억이 났는지 손을 마주쳤다.

“그분은 꽃꽂이 안 하세요?”

다연의 기억하는 한주연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 싱싱한 생화가 가득 있는 이곳은 그녀에게 피하고 싶은 곳일 것이다.

“거기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여긴 안 와.”

예상대로였다.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다연은 넌지시 물었다.

“싹싹하지. 내조 잘하지. 젊은 사람인데, 아주 똑소리 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한번 뵙고 싶네요.”

마음과 다른 소리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연은 스스로가 놀라웠다.

“이거 끝나고 차 마실 때 한 번씩 오긴 하는데…… 오늘은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남편 챙기러 간다고 하더라고.”

주 여사는 아무런 경계 없이 말했다.

“주연 씨는 정말 대단해. 중요한 계약이 있거나 하면 직접 다 챙기니까 말이야. 우리 남편은 절대 회사 오지 말라고 하는데. 마 대표는 좋아하더라고.”

다연은 장미꽃 줄기를 자르면 귀를 쫑긋 세웠다.

“부도 직전이었던 마석이 결혼하고 나서 사업이 폈잖아요. 그때 결혼이나 하겠나 싶었는데…….”

“친정 살림 다 받쳐서 살렸는데 사업이 펴야지. 안 그럼 억울하지.”

“마나님 허락 없이는 화장실 휴지 하나 마음대로 못 건다는 말도 있잖아요.”

“지라시 내용이야 뭐 다 거기서 거기잖아.”

주 여사는 아차 싶었는지 다연이 있는 쪽을 힐끔 보며 다른 사람에게도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불과 얼마 전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던 사람이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모른 척 말간 얼굴로 꽃을 꽂고 있는 다연을 보며 다들 안심하는 거 같았다.

저 순진해 보이는 어린 여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싶겠지.

“다연 씨는 유학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공부는 끝났어?”

“아직 조금 남았어요.”

“저런, 젊은 부부가 너무 자주 떨어져 있으면 안 좋은데.”

주 여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결혼해서 어째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거 같아. 그러면 남자들 죄다 딴생각하는데.”

“구 사장은 그런 면에서 혼자 둬도 안심되겠어요.”

일신 기업이라고 했던가?

여자는 말을 하자마자 실수한 것을 인지하고 제 입술을 물었다.

다연은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이가 자주 와요.”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발을 뗀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술술 나왔다.

“그랬……어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연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대로 정육면체의 초록색 플로랄 폼에 꽃을 꽂는 데만 열중하다 보니 금방 완성되었다.

같이 차를 마시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다연은 샤인을 나왔다.

주연이 어디 있는지 정보를 들었으니 이제 만나러 가야 할 차례였다.

* * *

다연은 마석 건설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문 앞에 서서 건물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이 건물은 제 부친의 회사였던 ‘일성산업’의 사옥이었다.

몇 층까지 있는지 꼭대기까지 다 올려다보기도 힘든 한강 기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건물을 지었을 때 아버지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연아, 멋지지? 두고 봐라. 십 년 후에 이거보다 열 배 큰 사옥을 다시 지을 테니.]

제 부친의 눈빛은 자부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이 목표를 명확히 그리고 있었다.

8층 자리 건물을 지어놓고 회사 현판을 달던 날, 부모님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연도 그사이에 행복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었었다.

주소가 같아서 설마 했는데.

이곳이 마석 건설 사옥으로 바뀐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연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아.”

장례식장에 빚쟁이가 쫓아왔었던 맞지만, 이 부지가 마석에 매각되었다는 것은 우연치고 굉장히 꺼림직했다.

조금 무모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론 기습공격이 먹힐 때도 있다.

자혁의 말대로 더러워서 피하는 건데 무서워서 피하는 줄 알고 있는 주연에게 기습 방문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낼지 부딪쳐보고 싶었다.

다연은 샤인에서 만든 꽃바구니를 든 손에 힘을 주고선 1층 로비에 들어가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진철 대표님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하셨나요?”

전신을 훑어내리는 직원의 눈초리가 불손했다.

마치 대표의 내연녀쯤 되겠거니 하는 표정이었다. 더불어 간도 크네 하는 의미로 눈썹을 씰룩였다.

“제가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라…… 선약은 없지만. 한주연 씨 동생 한다연이라고 전해주세요.”

굳이 처제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주연의 이름을 듣자마자 직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연은 살며시 웃어 보이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작정 온 거라 마진철이나 주연이 자신을 모른다고 할까 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 모습 들키고 싶지 않아 다연은 일부러 안내 데스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잠시 뒤, 직원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올라오시랍니다.”

“몇 층이죠?”

안내 데스크 직원이 먼저 알려주기 전에 다연이 먼저 물었다.

설마 제 부친의 집무실이 있던 8층은 아니겠지,

“8층입니다.”

옅게 지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다연은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연이 이곳에 와 본 것은 2년 전 부친이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다연을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차에 새엄마와 주연이 오는 바람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었다.

그때, 제 부친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 것일까.

진 회장에게 맡긴 봉투 안에 다연에게 하려던 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을 했을 뿐인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다연은 2년 전과 비교해 인테리어가 바뀐 실내를 낯선 눈으로 살피며 비서가 앉아 있는 데스크로 다가갔다.

“마진철 대표님 만나러 왔습니다.”

“네.”

로비에 상주한 직원에게 연락을 받은 것인지 비서는 다연에게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고 곧장 대표실 문을 노크 두 번 뒤 열어주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연의 눈을 피하는 비서를 지나쳐 다연은 마진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딱 한 번 본 적 있는 눈빛이 유난히 흐렸던 남자와 마주하자 다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어쩔 수 없이 다연은 입술 끝을 슬쩍 올렸다.

“이거 진짜 다연 씨네. 아니, 이제 처제라고 해야 하나?”

느글거리는 말투로 친한 척하는 마진철을 마주 보고 섰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야. 악수라도…… 아참, 안 되지?”

“왜 안 되겠어요. 해요, 악수.”

다연이 먼저 손을 내밀자 마진철의 눈빛이 더 탁해졌다.

다연이 내민 손을 잡은 마진철의 손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어 불쾌했다.

살짝 잡았다 놓으려 하자 마진철이 다연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제 이렇게 잡아도 되는 건가 봐? 내가 그때 놀란 거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주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뭐 하고 있어?”

“여보, 다연 씨 이렇게 손잡고 있어도 멀쩡해.”

“이제 그만 놔주시죠.”

제 손 안에서 주물럭거리는 것이 불쾌해 다연이 손을 뺐다.

“형부가 처제 손 좀 잡아 보겠다는 게 어때서.”

다연은 테이블에 위에 꽃바구니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티슈를 뽑아 제 손을 닦아냈다.

“쟤가 나랑 진짜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잖아.”

주연이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다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긴 손님을 계속 이렇게 세워둬요?”

“어, 아니지. 다연 씨 거기 앉아. 당신도 앉고. 자세가 편해야 그간 회포도 편하게 풀지, 그럼.”

마진철은 처음 봤을 때와 일관된 모습이었다. 주연도 마찬가지로 다연을 싫어하는 걸 숨기지 않는 걸 보면.

부부가 참 닮았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가져왔어요.”

다연이 꽃바구니를 주연의 앞으로 쓱 밀었다.

주연은 얼굴을 굳힌 채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양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선 다연을 쏘아보았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요?”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제 발로 여기를 올 리가 없잖아. 네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데.”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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