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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76)
  • 48화

    반찬을 상 위에 내려놓고선 퇴촌댁은 다시 주방으로 가서 밥과 국을 들고 왔다.

    평소처럼 음식을 내려놓고 나가는 게 아닌 다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밥 혼자 먹이지 말래.”

    “누가요?”

    “누구겠어.”

    다연이 옅게 웃었다.

    퇴촌댁이 먼저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보고 다연도 숟가락을 들었다.

    정갈한 나물 반찬이 맛있어 다연은 금방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빈 그릇을 치우고 난 후 퇴촌댁은 식혜를 내왔다.

    한쪽에 놓인 다연의 그림을 보며 퇴촌댁이 물었다.

    “구 사장이 회사 이야기는 안 하지?”

    “네.”

    다연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흘씩 일주일씩 집에 못 들어올 때가 있었어요. 많이 바쁜 건가 궁금해도 물어보진 못하겠더라고요.”

    “편히 물어보면 될 것을… 휴대폰 뒀다 뭐 해?”

    퇴촌댁의 말에 다연은 여전히 옅게 웃었다.

    편히 물어보라는 말에 다연은 우산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다. 자혁이 아닌 퇴촌댁에게.

    “우산을 매번 사다 준다는 게 빚이라고 하던데…….”

    “이 동네 살 때 매번 비 맞고 다니길래, 우산 몇 번 쥐여줬지.”

    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구자혁이 비를 맞고 다녔다고? 게다가 이 동네에 살았었다니.

    다연은 근처에 구 회장 별장 같은 것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은 있어서 안 받겠다고 버틸 때도 있어서 나중에 갚으라고 했더니, 지금 착실하게 갚는 중이야.”

    “네.”

    궁금증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다연은 더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 밥값은 안 받을 테니. 나중에 그림으로 가져와. 오늘 그런 걸로.”

    “능소화요?”

    다연이 테이블 밑에 내려 둔 엽서지를 들어서 퇴촌댁에게 보여 주었다.

    “그거 크게 한 장 그려서 와.”

    다연이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뭔가 거부할 수 없는 그물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연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네.”

    “내가 구 사장도 이렇게 낚았어.”

    이어서 퇴촌댁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연은 퇴촌댁이 불러 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보자던 자혁은 그날 집에 오지 못했다.

    * * *

    다음 날, 다연은 방에 틀어박힌 채 이리저리 검색해보았다.

    주연을 만나려면 지라시에 어떤 내용인지 알아야 했다.

    상세한 내용은 아니어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만나야 대꾸라도 하고 올 수 있으니까.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아도 한강 기업 올해 상반기 매출 흑자 4.6% 달성이라던가 새로 분양할 타운 하우스 이야기 같은 경제면에 실린 기사 외에는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구자혁 씨가 말한 위장 결혼 기사 찾아봤어요. 단 한 건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 기사를 그냥 나가게 뒀을 거 같아?”

    구자혁이라면 절대 자신이 본 지라시를 쉽게 노출되게 놔두지 않았겠지.

    “하아.”

    다연은 자신이 시간 낭비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지혜가 한참 여성지 편집부에 있을 때 지라시만 따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연은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바쁜지 뭔가 집중하고 있을 때 살며시 잠긴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이야?]

    “선배, 지라시 같은 거 어디서 보는지 알죠?”

    [알지…… 그건 왜?]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거 알아서 뭐 하게? 온갖 추잡한 소문이 죄다 뒹구는 곳이야. 보나 마나 너랑 네 남편 이야기도 있을 텐데……. 설마…… 너, 그거 확인하려는 거니?]

    다연의 침묵에 전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좋은 내용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이야.]

    “이미 들었어요.”

    [벌써?]

    지혜의 깊은 한숨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그리곤 작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안 들어가 본 지 한참 됐거든…… 작은 사건에 거짓말이 뒤섞여서 부풀려진 게 대부분이라 전부 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럼요.”

    [아, 여기 있다. 문자로 보내주긴 할 텐데…… 흐린 눈으로 봐라.]

    “네,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난 뒤 다연은 지혜가 보내준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방대한 양에 다연은 자신이 찾는 정보를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다 지난번 이 실장이 보여 준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얼마 전 아내가 유학에서 돌아온 A 기업 사장 부부. 알고 보니 끼리끼리 만남이었다. 성불구 남편과 타인의 손이 닿으면 발진이 올라오는 피부병 아내. 세상에 이보다 더 천생연분 커플은 없을 듯.]

    [세상에 이런 일이. 돌아가신 부친의 전 재산을 들고 도주한 H 산업 차녀. 알고 보니 A 기업 안주인으로 그동안 외국에 숨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든든한 뒷배 덕분에 신분 세탁에는 성공했지만, 목에 있는 빨간색 나비 모양 점 때문에 신분이 들통 났다.]

    다연은 그중 몇몇 단어를 뽑아 검색해보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다연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A 기업의 부인 B 씨. 베일에 싸여 있지만, 굉장한 자산가이다. 양친 모두 사고사 후 받은 재산이 상당하다. B 씨 부모가 모두 사고사한 이유에 대해 최근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언급되었던 H 산업 차녀. 부친의 사고 후 모습을 감추었던 이유가 있었다. 보험금 노려 부친을 사고사로 위장한 채 잠적한 것이라고 한다.]

    천천히 읽어내리던 다연의 손이 떨렸다.

    예상보다 무서운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지난번 이 실장에게 부탁해두었는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다연이 받을 충격이 걱정되었겠지.

    “하아, 한주연……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다연은 침착하게 자혁에 관한 것도 찾아보았다.

    [그동안 성불구 설이 시달렸던 H 기업 K 사장의 쇼. 대낮 여자를 데리고 호텔에 나타나는 것으로 소문을 소문으로 잠재우려는 꼼수를 부림.]

    구자혁이 성불구라니.

    보여 줄 수도 없고…….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하기야, 다연도 믿었던 소문이었으니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다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것도 찾아보았다.

    [그동안 조현병 소문에 시달린 A 기업 사장. 알고 보니 안면인식장애처럼 사람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오랜 기간 비밀리에 트레이닝 파트너를 해온 사람이 비밀을 누설할까 봐 사고를 위장해 죽이려 했으나 실패. 그 트레이닝 파트너는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

    이건 자혁이 아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 다연은 다른 것을 찾아보았다.

    가령, 작은아버지와 관련된 것으로.

    [냉혈한 A 사장. 작은아버지와 끊임없이 경영권 다툼을 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작은아버지가 내연녀 사이에서 낳은 딸은 사고로 위장하여 죽이려는 끔찍한 일까지 벌였다. 죽이는 데 실패했지만,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작은아버지가 시작하는 사업을 교묘히 방해해 주주들의 눈 밖에 나도록 몰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게 자혁의 이야기라면 어떤 게 거짓이고 어떤 게 사실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읽어 본 것 중에 한강 기업 이야기라고 확신이 들었던 것으로 추측해보건대. 현재 여론이 절대 구자혁 편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연을 한번 만나야겠다.

    * * *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주연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다연이 떠오른 사람은 엉뚱하게도 주 여사였다.

    그날 다연이 흘러들었던 많은 말 중에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젊은 감각이라 가게 이름처럼 반짝반짝하네요.”

    “우리 매주 목요일에 꽃꽂이같이 하는데, 다연 씨도 와요. 예쁜 꽃도 보고 우리끼리 대화도 나누면 빨리 친해지잖아. 안 그래?”

    목요일 꽃꽂이를 한다고 했던가?

    거기가 어디라고 분명히 말을 한 거 같은데…….

    그날 파티의 꽃장식을 담당했던 곳이라고 했었다.

    다연은 진 회장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진 회장이 그 업체를 알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직원이 알겠지.

    “인으로 끝나는 거 같았는데……. 반짝반짝이라…….”

    쉽게 떠오르지 않아 다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샤인?”

    다연은 휴대폰을 켜서 샤인이라는 꽃집을 검색해보았다.

    소규모 꽃집이 아니라 정식으로 아카데미도 운영하는 곳이라 홈페이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업체 SNS에는 최근 진성 호텔 파티를 장식한 사진까지 올라와 있었다.

    다연은 주소를 확인하고 얼른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만큼은 드레스룸에 걸린 구자혁스러운 옷이 필요한 날이었다.

    흰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선 스카프가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맸다.

    다연이 거실로 나오자 청소 중이던 장 여사가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어머나, 예뻐라.”

    “괜찮아 보여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눈이 부셔요.”

    장 여사의 반응을 보니 이 정도면 먹힐 거 같았다.

    “데이트 있으세요?”

    “아니요.”

    “아쉬워라…….”

    지난번 구자혁과 포옹하고 있는 것을 본 이후 장 여사는 두 사람의 데이트를 자기 일처럼 바랐다.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가요. 기죽으면 안 되는 자리거든요.”

    “파이팅 하세요.”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장 여사는 힘을 주었다.

    다연은 싱긋 웃고 난 뒤에 샤인으로 향했다.

    샤인은 꽃시장이 있는 양재 근처에 있었다.

    아무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건물 입구에서 보안 요원이 다연의 차를 막아섰다.

    “실례하지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차종을 확인한 보안 요원은 정중했다. 자혁의 기준에서 적당한 차를 준비해 준 것이 이럴 때 유용했다.

    다연은 조금 긴장된 듯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구자혁 씨 아내 한다연이라고 해요. 주 여사님이 오늘 여기에서 꽃꽂이 수업이 있다고 해서요.”

    보안 요원의 눈이 다연을 날카롭게 훑어보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전을 했다.

    보안 요원이 다시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등록되지 않은 차량이라,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차는 저희가 주차하겠습니다.”

    “그래 줄래요?”

    다연은 운전석에서 내려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1층 아카데미 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다연은 제 모습이 너무나 앙큼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

    뻔뻔해지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서인지 진짜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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