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76)

47화

은정의 전시회에서 나온 자혁은 다연이 차에 탈 수 있도록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다연이 몸을 기울인 순간 다연의 목을 감싸고 있던 스카프가 땅에 떨어졌다.

“아!”

다연이 손을 뻗으려 하자 자혁이 먼저 몸을 굽혀 떨어진 스카프를 주워 들었다.

하필 물이 고여 있던 곳에 떨어져 스카프가 엉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안 되겠는데?”

“어쩔 수 없죠.”

다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자혁은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잠깐 있어.”

자혁은 조수석 문을 닫고선 다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뒤 차로 돌아온 자혁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다연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하나는 뒷좌석에 툭 던져 놓았다.

“이게 뭐예요?

“풀어 봐.”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얇은 한지에 쌓여 있었지만, 촉감으로 천 같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황상 그것이 스카프라는 것도.

“괜찮은데…….”

“계속 신경 쓸 거면서.”

집이 아닌 곳에서 다연이 내내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 미술관 안에 있는 기념 숍에서 사 온 듯했다.

포장지를 펼쳐보자 여름용 하얀색 얇은 천 위에 묵으로 그린 거 같은 선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스카프였다. 물의 농도에 따른 자연스러운 그러데이션이 수묵화처럼 멋있었다.

다연이 입은 네이비색 원피스에도 잘 어울렸다.

“고마워요.”

다연은 스카프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스카프 한 장만 담긴 거라곤 쇼핑백은 조금 묵직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길쭉한 상자가 있었다.

“이거도 내 거예요?”

“설마 다른 사람 줄 걸 거기에 넣었을까.”

무심하게 말하면서 자혁이 피식 웃었다.

다연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우산이었다. 미술관 숍에서 사 온 거라면 아마도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비도 오지 않는데 다연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펴 보았다.

하얀색 천 위에 수채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연이 좋아하는 여행지 풍경이었다.

“비 안 와.”

언제 운전석에서 내린 것인지 자혁이 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무심하게 말했다.

다연은 우산을 빙그르르 돌리곤 까르르 웃었다.

“비 왔으면 좋겠다.”

다연이 우산을 다시 한번 빙그르르 돌리자 자혁이 우산 안으로 쑥 하고 들어섰다.

“어?”

갑작스럽게 몸을 숙이고 들어온 자혁 때문에 놀라 다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행히도 다연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미술관 주차장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자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밖이에요.”

다연이 뒤로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나라면… 우산을 잘 들고 있겠어.”

자혁의 얼굴이 비스듬히 꺾인 채 내려왔다.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맑은 날 펼친 우산 아래에서 햇볕만큼이나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더운 숨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치 자혁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다연은 힘을 주어 우산을 꼭 잡았다.

* * *

짙은 키스는 자혁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자혁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고선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어떤 말을 해도 봐주겠다는 말 오늘로써 종료야.”

[왜!]

전화 건 사람의 괴성이 휴대폰에서 새어 나왔다.

“용건.”

자혁은 짧게 말하며 몸을 돌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다연은 눈치껏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차 문을 닫고 차를 빙 돌아 운전석 문을 열고 앉았을 때는 통화가 끝나 있었다.

“가봐야 해요?”

“아니.”

자혁의 표정은 아직도 화가 난 듯 굳어있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요?”

“하아. 직원들이 매번 타이밍을 못 맞춰서.”

자혁이 차 시동을 걸었다.

다연은 머뭇거리며 우산을 만지작거렸다.

“나…… 능소화 보러 가고 싶어요.”

자혁이 차를 출발하려다 말고 다연을 돌아보았다.

전에 갔을 때 3주 뒤에 오자고 했었는데 거의 한 달이나 지났다.

“옆집은?”

거기서 자혁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있었다.

“나랑 하고 싶은 게 그거밖에 없어요?”

“어.”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부끄러움도 몰려와 다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일 너 안고 뒹굴고 싶지.”

“너무…… 노골적이라…….”

“아닌 척하면서 점잔빼는 건 나하고 안 맞아. 그러니까.”

“적응하라고요?”

“잘 아네.”

자혁이 차를 출발시키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다연은 허벅지 위에 놓인 우산을 정리해서 스트랩을 감은 뒤 상자 안에 넣었다.

우산을 보니 산채 정식집이 생각났다. 마당에 이런 종류의 우산이 걸린 게 생각났고, 지난번 능소화가 피면 볼 만하다고 했던 자혁의 말이 진짜인지 궁금했었다.

자혁의 반응을 보니 그의 호텔로 갈 게 뻔해 보여 다연은 눈을 내리뜬 채 우산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 고개를 든 다연은 놀라서 운전하는 자혁을 돌아보았다.

“이 길은…….”

산채 정식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대신, 집에 가서 봐.”

자혁이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예뻐 보였다.

다연은 손을 뻗어 자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이, 예뻐라.”

“하아, 너…… 진짜.”

자혁이 운전을 하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서, 보자, 너.”

한마디씩 끊어서 힘을 주어 말하는 자혁을 보며 다연은 제 입술을 물었다.

집에서 보자는 저 말이 두려우면서도 짜릿했다.

* * *

산채 정식집 앞에 차를 세우자 멀리서 메리가 뛰어왔다.

다연이 문손잡이만 잡은 채 내리지 못하자 자혁이 안전벨트를 풀며 피식 웃었다.

“메리는 참 예뻐.”

메리를 칭찬하는 건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다연이 인상을 찡그리자 자혁이 낮게 소리를 내 웃었다.

“안아줄까? 아니면 따돌려줄까?”

여기 올 때마다 자혁에게 안긴 채 갔었다.

매번 바지를 입었던 때와 달리 오늘은 원피스 의상은 원피스였다. 그의 품에 안겨서 가기에는 불편한 옷이었다.

“후자요.”

“난 전자가 마음에 드는데.”

다연인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자혁이 다시 한번 낮게 웃으며 뒷좌석에 던져두었던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자혁이 메리를 유인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보고 다연은 최대한 조용히 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뛰어갔다.

“하여간 색시 물어갈까 봐 절절매요.”

다연이 들어서자마자 퇴촌댁이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퇴촌댁이 자혁을 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능소화 보러 왔어?”

“어떻게 아셨어요?”

다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고 있을 때 자혁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내려놓았다.

“능소화 그려진 건 없어서 아무거나 사 왔어요.”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자혁은 지정석인 방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퇴촌댁이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내는 것을 다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퇴촌댁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우산이었다. 다연이 받은 것과는 다른 그림이 그려진 우산이었다.

퇴촌댁은 가게 가운데 있는 마당으로 나가 우산을 펼쳤다. 우산에는 한옥이 그려져 있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거 사 왔구먼.”

“그냥 그늘막을 설치하세요.”

자혁이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무심하게 말했다.

“그건 멋이 없잖어.”

퇴촌댁은 찢어진 우산 하나를 접어서 한쪽에 툭 던져 놓고 자혁이 준 우산을 그 자리에 걸었다.

“예뻐요.”

“이거 다 구 사장이 사다 준 거야.”

다연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혁을 바라보았다.

“자혁 씨가요?”

“출장 가서도 한 번씩 사와. 저기 저건 싱가포르였던가? 거기에서 사 왔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우산이 예뻐서 눈여겨보았던 공간이었다. 그 우산을 자혁이 모두 사다 준 거라니 놀라웠다.

“오늘은 밥 뭐 줄까?”

“늘 먹던 거요.”

“색시 데리고 들어가 있어.”

퇴촌댁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자혁은 다연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창밖으로 능소화가 많이 피었지만, 시기를 좀 지나서인지 시들어서 떨어진 것도 많았다.

창밖을 보던 다연은 시선을 돌려 자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볼수록…….”

“멋있지.”

본인이 잘난 걸 이토록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겸손 같은 거 몰라요?”

자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우산 선물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선물이 아니라 빚 갚는 중이야. 그늘막 설치해준다는데도 싫대.”

자혁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 회장이나 퇴촌댁도 깊은 사이처럼 보였다.

물어보면 자혁이 말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연은 자혁에게 묻지 않았다. 그건 다연이 정한 선이었다.

자혁이 볼 만하다고 했던 능소화가 핀 풍경을 다연은 눈에 담았다. 이 풍경은 1년 후에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때는 한국에 없겠네.’

다연이 티 나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Rrrrrrr.

자혁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창밖에 머물던 다연의 시선이 자혁에게 향했다. 발신자를 본 자혁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잠깐만.”

자혁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서 통화하는 자혁이 미닫이문 사이로 보였다.

전화를 끊은 돌아온 자혁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 못 할 거 같아.”

“지금 가야 해요?”

“당신 집에 내려주고 가려면 지금 일어나야 해.”

다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퇴촌댁이 주방에서 나왔다.

“구 사장 혼자 가. 색시는 내가 택시 불러 태워 보낼 테니까.”

“하지만…….”

“가봐. 부사장이 또 무슨 사달을 냈는가 본데……. 오래 준비한 일, 끝맺음도 좋아야지.”

퇴촌댁의 말에 자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가봐요.”

“괜찮겠어?”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집 정도는 충분히 찾아가요.”

다연은 옅게 웃어 보인 후, 가방 안에서 그림 도구가 든 파우치를 꺼내 내놓았다.

“밥도 먹고 그림도 그리다 느긋하게 갈게요.”

다연이 웃으며 말해도 자혁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얼른 가봐.”

퇴촌댁이 손을 휘저으며 다시 주방으로 몸을 감추었다.

“집에서 봐요.”

“그래, 집에서 보자.”

자혁이 어렵게 몸을 돌려서 나가는 것을 보고 다연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신 구 회장이 했던 경영승계 마무리에 방해꾼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게 퇴촌댁이 말한 부사장이라면 자혁의 작은아버지였다.

괜히 심란한 마음이 들어 다연은 그림 도구를 펼쳤다. 엽서지를 꺼내 다연은 쓱쓱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구만.”

퇴촌댁이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