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다연은 소파 테이블 위에 두었던 빨간색 봉투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사모님 개인전 초대장 주셨어요.”
다연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듯 가져온 자혁은 안에 든 것을 꺼내서 직접 확인해보았다.
“일주일 뒤네.”
“그날 시간 돼요?”
“없어도 내야지.”
자혁이 귀찮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 회장을 만나는 게 싫다는 걸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진 회장님을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요?”
“싫은 게 아니야.”
“그러면요?”
“그냥.”
자혁은 대답하기 싫은 듯 보였다.
다연은 집요하게 자혁을 바라보았다.
“왜 자꾸 그렇게 봐?”
“내가 뭘요?”
자혁이 양손을 허리에 짚고선 다연을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거 같은 자혁의 눈빛에도 다연은 모른 척했다.
“하아.”
자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나 아무 말 안 했어요.”
다연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자혁이 다연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뭐라 말하기 힘든… 그 표정… 하아.”
“내 표정이 왜요?”
다연은 화가 난 것도 그렇다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함이라 할 수도 있는 표정이었다.
“하아.”
자혁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진 회장님 뵐 때마다…….”
자혁이 인상을 구기며 아주 어렵게 말을 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래.”
“아….”
생각하지 못한 말에 다연이 외마디 탄성이 새어 나왔다.
사람마다 건들면 힘든 이야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자혁에게 할아버지 이야기가 그런 거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이라는 말로 넘기려는 자혁을 힘들게 한 거 같아 다연은 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자혁은 낮게 한번 한숨을 내쉬곤 말을 덧붙였다.
“두 분이 유달리 잘 맞으셨어. 농담이든, 뭐든.”
자혁의 말에 다연도 돌아가신 구 회장을 떠올렸다.
고액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 이런 인연으로 묶이게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구 회장은 다연에게 대나무 숲과 같은 분이었다.
그 당시 다연이 힘든 일, 좋은 일 모두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다연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라 유럽 상공에 있을 때쯤 구 회장이 숨을 거두었다.
다연은 그 소식을 두 달 후에 들었고, 셀레나의 하숙집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을 나오지 못했었다.
대나무 숲이었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신 분. 죄책감과 상실감에 다연도 많이 힘들었다.
그가 아무리 오만하고 매서운 눈빛을 난발하는 사람이라도 조부 앞에서는 손주였을 터.
다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연은 자혁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나… 그동안 당신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자혁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자혁은 자신을 안고 있는 다연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연이 자신의 조부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조부의 소식을 뒤늦게 들은 다연이 일주일 동안 슬픔에 빠져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연의 늦은 사과가 마음에 아려 다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꼭 안았다.
* * *
배달하겠다는데도 굳이 직접 들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다연 때문에 자혁은 궁서체로 ‘축 전시회’라고 쓰인 핑크색 리본이 둘린 난 화분을 들고 있었다.
진 회장은 물론 오늘 전시회 주인공. 두 사람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다연의 인사말에 은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마워, 우리 한 선생 아니었으면 나 진즉에 그림 때려치웠어. 구 사장도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죠. 축하드립니다.”
자혁이 정중하게 말했다.
“두 사람 이러고 있으니 진짜 그림이네. 이쁘다. 이뻐.”
주인공답게 은정은 여기저기 인사를 받느라 바빠 보였다.
“저희는 그림 보고 있을게요.”
“그럴래? 천천히 보고 있어. 우리 그이 거의 다 왔대.”
자혁은 다연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림을 보았다.
“사모님이 당신을 왜 한 선생이라고 부르는 거야?”
자혁은 북적북적한 분위기에도 은정이 다연을 부른 호칭을 놓치지 않았다.
“그림 처음 배우실 때 제가 아르바이트하는 화실에서 시작하셨어요.”
“수묵화도 했었어?”
은정의 그림은 수묵화였다.
다연이 그리는 건 수채화였으니 자혁이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아르바이트였다니까요.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손 근육은 다르니까 선 긋기부터 연습하거든요.”
“지루하겠군.”
“네, 저는 그 지루한 작업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생이었고요.”
자혁과 마주 보며 웃을 때였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가 입구에서 요란하게 들렸다. 지난번 진성 호텔에서 다연에게 의도적으로 접촉을 하던 무리였다.
다연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혁에게 팔짱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자혁은 자신에게 팔짱을 낀 다연의 손을 내려 꼭 잡았다.
그 무리는 타깃을 만난 듯 두 사람에게 조르르 달려왔다.
“어머, 구 사장님. 여기서 또 보네요.”
“네.”
자혁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빛도 서늘했다.
그 기에 눌린 듯 여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연은 조금 긴장되었지만,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볼 때마다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거 보기 좋아요.”
무리의 시선이 맞잡은 손에 향했다. 주 여사를 포함한 여자들의 시선은 다연의 맨살이 드러난 곳을 보며 어떻게 한 번 닿을까 궁리하는 게 눈에 보였다.
네이비색 반팔 원피스를 입은 다연의 맨살이 드러난 곳은 지난번 파티보다 많았다.
다연은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언제봐도 피부가 정말 고우세요.”
다연은 손을 뻗어 주 여사의 팔을 슬쩍 쓰다듬었다. 적당한 친근감의 표시였다.
“나야… 뭐… 피부관리를 꾸준히 받으니까.”
주 여사를 포함해서 같이 있던 여자들의 어색한 미소를 보며 다연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다연의 손에 고정된 것을 보며 다연은 씁쓸히 웃었다.
“아, 지난번 반지 디자인에 관심 보이셨죠?”
다연은 반지를 낀 왼손을 내밀었다. 만질 테면 만져보라는 듯.
하지만 여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연의 손을 함부로 잡지 못했다.
“그, 그날 자세히 봐서 괜찮아요.”
자혁의 매서운 눈빛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무리는 그림을 보러 가겠다며 흩어졌다.
모두 멀찍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자혁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괜찮아?”
“살짝, 거부감이 들긴 했는데. 괜찮아요.”
다연은 자혁에게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저 사람들 당황했겠죠?”
“그건 그들 사정이고.”
자혁의 입술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제 다른 사람이 만져도 괜찮아?”
“모든 사람한테 괜찮은 건 아니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어요.”
병이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이니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자혁의 얼굴은 기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들 축하한다고 하던데… 당신 표정은 왜 그래요?”
“별로.”
낮게 깔린 자혁의 음성에 다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만 만질 수 있는 게 좋아.”
민망함은 언제나 다연의 몫.
다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손을 들어 부채질하며 다연은 혹시나 주변에 살폈다.
“옆집 가자.”
자혁의 사무실에 간 날 이후, 그의 호텔은 ‘옆집’이 되었다.
여기서 집이 가까울지 호텔이 가까울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가자.”
제발 그 입 좀…….
다연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멀어지려 했지만, 허리를 단단히 감싼 그의 손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보라 그래.”
이런 대화를 전에도 몇 번 오갔는데도 불구하고 다연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다연은 눈에 힘을 주고선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었구나.”
언제 왔는지 진 회장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다연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안녕하셨어요.”
“이제 오세요?”
인사를 하는 온도가 다연과 자혁이 완전히 달랐다.
가까이 다가온 진 회장은 자혁의 옆구리를 손으로 푹 찔렀다.
“어르신!”
자혁에게 큰 타격이 아닐 거 같은데 옆구리를 문질렀다.
“씹어? 그것도 내 연락을?”
“사회적 지위가 있으신데 제발 언어 순화 좀 하세요. 씹어가 뭡니까?”
“각오는?”
자혁은 자신이 가져온 난 화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정도면 충분한 거 같습니다만.”
이미 들어오면서 봤을 텐데도 진 회장은 다시 한번 유심히 보는 척했다.
“네 거래처 정보를 넘기는 건 어떠냐?”
진 회장은 자혁의 선물이 마음에 들면서도 그가 거래하는 곳이 더 궁금한 거 같았다.
“제 가장 큰 무기인데 절대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왜 저런 걸 못 구하는지 원.”
자혁이 진 회장과 어떤 거래를 할 때 무엇을 이용하는지 알 거 같았다.
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가지고 온 게 쉽게 구할 수 없는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되었다.
“한 선생, 이리 와봐. 소개해 줄 사람 있어.”
은정이 다연을 불렀다.
다연은 자혁에게 잡힌 손을 풀고선 은정에게 다가갔다.
다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혁을 보며 진 회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연 양과는 어쩔 셈이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하는 걸 진 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자혁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예쁜 아이고, 안쓰러운 아이다.”
자혁이 진 회장을 돌아보았다.
“네 편이 되어주기로 제 조부와 약속했다만. 너희 둘 사이의 일에선 나는, 다연 양 편이다.”
진지한 진 회장이 언뜻 보이는 거 같았다. 목소리도 진중했다.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과 그간 훈련으로 쌓은 것을 조합해보면 지금 진 회장의 이 말은 100% 진심이었다.
자혁의 시선에 은정의 옆에서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연이 보였다.
다연과 자신의 사이에 일이 생긴다라. 그럴 리 없겠지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다연이 자신을 떠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연이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선’이 자혁에게도 보였으니까.
그 선이 거추장스러우면 깨버리면 그만이니까.
아직은 깨버려야 할지 다연이 원하는 대로 유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다연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아직 정의하지 못했으니까.
진 회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아니요.”
자혁의 오만한 목소리에 진 회장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르신은 무조건 제 편이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