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현지 가이드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하숙집에 들어간 뒤로 다연은 꼬박 한 달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 달 만에 나온 세상은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은 온기를 담은 봄으로 바뀌어 있었다.
천천히 산책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주인인 셀레나가 악센트가 강한 영어로 다연을 반겼다.
[무사히 집에 와줘서 고마워, 다다.]
하루, 이틀… 그렇게 산책만 하고 집으로 돌아오길 한 달을 넘게 해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연을 향해 셀레나는 웃어주었다.
[무사히 집에 와줘서 고마워, 다다.]
문득, 자신을 매번 환영해주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기던 날 다연이 물었다.
[셀레나는 왜 매번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다다가 집에 오면 고마워.]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데 괜히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알지 못하는 하숙생에게 말하는 버릇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이탈리에 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다연은 자신이 떠나온 날 구 회장이 돌아가신 걸 알게 되었다.
다연은 다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일주일쯤 되던 날 셀레나가 다연의 방에 들어왔다.
[다다, 내일은 7번 버스를 한번 타봐. 거기 종점에 내려서 전망대에 가봐. 멋있는 언덕이 거기에 있어.]
뜬금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보라는 말이 다연은 셀레나의 엉뚱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종점?]
[응, 종점. 가기도 쉽고 집에 오기도 쉽지?]
셀레나는 강요하지 않았고, 다연도 가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다연은 주문에 걸린 인형처럼 셀레나가 말한 7번 버스에 올랐다.
피렌체 곳곳을 달린 버스가 제법 넓은 광장에서 멈췄다. 버스에 탔던 많지 않은 승객이 모두 내리는 것을 보고 다연은 종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망대라는 것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다연은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걸었다.
숨이 조금 거칠어질 때쯤 전망대에 도착했고, 다연은 담벼락 근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흡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몸을 담벼락 아래로 돌렸다.
“아…….”
거친 호흡과 함께 탄성이 새어 나왔다.
봄기운으로 여린 싹이 돋아난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나무 사이로 피렌체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다연은 그 풍경에 이끌리듯 의자에서 일어서 담벼락에 걸터앉았다.
피렌체에 온 모든 사람이 찾는 두오모 성당도, 멋있는 조각품이 있는 광장도 다연에겐 무감했었다.
그런데 소박한 동네 어귀에 있는 언덕에서 보이는 이 풍경에 다연은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방향을 잃었던 다연을 깨운 것은 유명 관광지의 생기 넘치는 소란스러움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고요함이었다.
다음 불행이 또 기다리고 있다 해도 다연은 살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해 질 무렵 다시 7번 버스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온 다연은 이탈리아에 온 후 처음으로 지혜에게 연락했다.
지혜에게 부탁한 물감과 붓이 도착할 때까지 다연은 거의 매일 그 언덕으로 향했다.
물감과 워터브러쉬가 도착한 뒤에도 다연은 한참을 그곳에 가서 그림을 그리다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다연이 반년을 머물렀던 하숙집을 떠나던 날 셀리나는 다연에게 또 한 번 고맙다고 했었다.
[다다, 네가 여행을 다시 시작해서 기뻐. 그리고 고마워.]
[셀레나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왜 매번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거야?]
[난 우리 모두가 여행자라고 생각해. 이 집에 머물다간 사람 모두 나에겐 여행 동지야. 내 동지가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것만으로 난 고맙고 기뻐. 나도 여행을 계속할 힘이 생기거든.]
다연은 셀레나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
셀레나가 가보라고 했던 7번 버스 종점에 있던 평범한 언덕은 다연에겐 특별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내가 사랑하는 피에솔레 풍경이네. 고마워.]
거의 매일 간 곳인데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다연은 그 언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피에솔레.’
다연이 힘들 때 가장 생각나는 곳이 한국이 아닌 피렌체에 있는 셀레나가 있는 하숙집이었다.
떠나온 날 알게 된 그 언덕이 그리웠다.
* * *
다연은 피에솔레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들고 촬영용 책상에 앉았다.
“녹화 시작합니다. 준비됐어?”
다연은 카메라 밖에 강의 노트를 놓고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네.”
지혜의 신호에 다연은 자세를 가다듬고 녹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경주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그려보기도 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그리는 법과 광장 속 사람들을 표현하는 법도 지난 시간에 했었죠?”
다연은 조금 텀을 두고 옆에 놓인 그림을 카메라에 잡히도록 가져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받아보신 패키지에서 보셨죠? 오늘은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오밀조밀한 풍경을 그리는 법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연은 그림 옆에 그곳에서 찍은 사진도 카메라 앵글 속으로 가져왔다.
“이곳은 이탈리아 피렌체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한데요. 여행 중에 이렇게 높은 곳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는 곳이 많을 거예요.”
다연은 어느덧 능숙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강의 하나를 녹화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다연은 녹초가 되어 미팅룸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자, 마셔. 허기지지?”
지혜는 주스를 가져다주며 맞은 편에 앉았다.
다연은 대답할 힘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리한테 뭐라도 사 오라고 해야겠다.”
“괜찮아요. 끝나고 밥 먹을래요.”
다연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전화 무음으로 해뒀니? 아까부터 네 가방이 반짝이는 거 같은데 전화 오는 거 아니야?”
다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방 안에 손을 넣고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3’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금방 다시 전화가 왔다.
다연이 빙긋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바빴어?]
오만한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다.
“방금 녹화 끝났어요. 아직 하나 더 남았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던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건데도 자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요한 회사 일도 많은데 이렇게 사소한 것을 기억해주는 게 좋아서 주책 맞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답하고선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때였다. 미팅룸 밖이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똑똑.
미팅룸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혜가 문을 열자 편집팀 막내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작가님 앞으로 샌드위치 배달이 왔어요.”
“뭐?”
“직원 전체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이요.”
지혜가 다연을 돌아보았다.
“혹시…….”
전화기 너머로 자혁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게 먹어.]
“정말…… 당신이에요?”
[회의 들어가. 집에서 봐.]
다연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이게 우리 거?”
“네.”
“고마워.”
지혜가 쇼핑백을 받아들면서 인사를 하자, 김 대리가 손을 내저었다.
“제가 산 것도 아닌데요. 인사는 작가님께 해야죠. 작가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김 대리가 나간 뒤에도 다연은 영문을 몰라 눈이 커졌다. 그 사이 지혜는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내 놓았다.
“놀랍다. 파전에 이어 샌드위치까지. 외조 제대로 하시네.”
다연은 제 앞에 놓은 샌드위치를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도 딱인지. 어마무시한 네 남편님 너한테 CCTV 달아놨다니?”
지혜는 조금 전 자신이 다연에게 주었던 주스 대신 배달된 음료와 샌드위치를 건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작가님.”
“선배까지 이러기에요?”
“보기 좋다. 너도, 어마무시한 남편님도.”
지혜가 웃으며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선 포장지를 벗겨 냈다.
“남편이 이런 이벤트도 할 수 있지 뭘 그렇게 황송한 표정이야.”
“그러게요. 아까워서 못 먹겠네.”
“내가 미친다.”
지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어 보이곤 샌드위치를 덥석 물었다.
다연은 지혜가 샌드위치를 반쯤 먹어치울 때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테이블을 치울 때였다.
지혜가 자신도 모르게 다연의 손을 살짝 스쳤다.
“어머. 다연아, 미안.”
지혜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쩌니? 마지막 녹화 다음으로 미룰까?”
그림 그리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녹화하는 거라 다연의 손에 발진이 올라오면 화면에 고스란히 보일 것이다.
당황한 지혜와 달리 다연은 지혜의 손이 스친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깐 스친 거라 다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선배.”
“어, 약 먹어야 하니? 물 가져다줄까?”
“내 손 좀 잡아 볼래요?”
당황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혜의 눈을 보며 다연이 웃으며 손을 덥석 잡았다.
“어쩌려고 그래!”
“테스트예요.”
“뭐?”
다연은 지혜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발진이 생기기 전 특유의 벌레가 기어가는 거 같은 느낌이 없었다.
다연은 나머지 손으로 지혜의 다른 손을 잡아 보았다.
“선배…….”
“다연아…….”
지혜는 믿기지 않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니지?”
“선배…… 나 이제 괜찮으려나 봐요.”
지혜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지혜는 다연의 손을 잡은 채 테이블을 돌아 다연의 앞에 섰다.
“우리 다연이 한번 안아보자.”
지혜는 다연을 꼭 안아주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축하해.”
“고마워요, 선배.”
좋은 소식도 전했고, 샌드위치 응원도 받아 마지막 녹화는 순식간에 마칠 수 있었다.
같이 저녁 먹자는 지혜의 제안을 갈 곳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다연은 출판사를 나왔다.
* * *
다연이 로비에 들어서자 보안 요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국에 도착한 날 이곳에 왔었지만, 한 번 본 사람을 보안 요원이 기억할 리는 없었다.
무작정 오긴 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다연은 망설였다.
구자혁의 아내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비서실 이기욱 실장님 연결 부탁드립니다.”
고민 끝에 다연은 이 실장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