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76)

42화

정확도가 떨어졌다는 데도 자혁이 조용한 것이 이상해서 경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

“뭘?”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벌써 지랄했어야 하는 놈이 잠잠하잖아.”

사장에서 놈이라고 호칭이 바뀌었는데도 자혁의 입술이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 뭐 잘 못 먹었냐?”

경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자혁의 안색을 살폈다.

며칠 동안 부사장이 던진 불똥 처리하느라 집에도 못 갔다고 툴툴대더니 병이라도 난 건가 싶었다.

“이거 다음 달 오픈되는 모델하우스에 설치해야 해. 일정 차질 없도록 오류는 없는지 더 확인해봐.”

경수는 자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있어도 자혁이 더 말이 없자 경수가 먼저 물었다.

“정말… 할 말이… 그게 다야?”

경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더 있어야 해?”

경수가 피곤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선 자혁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보였다. 저 미소가 시작된 시점을 떠올려 보았다.

부인의 데리고 자선행사에 왔던 날부터 독설만 날리던 저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 있었다.

“다연 씨 잘 있어?”

자혁의 입술이 조금 더 크게 휘었다.

“그럼, 잘 있지.”

“너랑 한집에 사는데도 잘 있다고?”

경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낯선 두려움이 가득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다연이 떠올랐다.

“아, 네가 자주 집에 안 들어가니까, 괜찮겠네.”

그렇지 않고선 저 숨 막히는 자혁은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나더러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만 한대.”

“누가? 다연 씨가?”

자혁의 입술 끝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정확히 봤네. 다음에 만나면 얼른 도망가라고 해야겠다.”

경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혁은 노트북에 꽂힌 USB를 빼서 경수에게 던져주었다.

“나 바빠.”

“네가 안 바쁜 날이 있었어?”

“일찍 퇴근해야 해.”

자혁은 외부 일정이 있을 때가 아닌 이상 일찍 퇴근하는 경우가 없었다.

“어디 가?”

“집.”

경수의 표정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내가 지금 네 표정을 언제 봤냐면 말이야.”

자혁이 시선을 들어 경수와 눈을 맞추었다.

“얼마 전 결혼한 우리 팀 대리 표정이 너랑 똑같아.”

“멋있어?”

“그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할 수 있는 비결 좀 알려주라.”

경수의 표정이 경악을 넘어서 한심스럽다는 듯 바뀌었다.

오늘은 경수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봐줄 수 있었다.

어젯밤 경수의 문자가 아니었다면 다연은 아직도 미미가 자혁의 숨겨둔 여자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어제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급기야 경수가 있다는 것을 잊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너 소문대로 드디어 미친 거냐?”

급기야 미쳤냐는 소리까지 경수의 입에서 나왔다.

어젯밤 그의 공로가 어느 정도 인정되는 바. 며칠은 참아 줄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얼빠진 얼굴이야. 당분간은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봐줄게.”

경수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었다.

“병원 가자.”

경수가 어떤 말을 해도 자혁은 종일 웃을 수 있었다.

* * *

현관문으로 달려 나와야 할 다연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집 안 전체에 미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청하신 음악은 가수 김지희의 ‘회상’이 맞습니까?]

“어, 맞아.”

[지금 재생하겠습니다.]

잠시 뒤 잔잔한 발라드가 집 안에 흘렀다.

어제까지는 질투의 대상이었던 미미와 절친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한다연.”

“어? 언제 왔어요?”

그의 차가 정문을 지나면 인터폰 알람이 울렸다. 그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 다연이 무언가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해 조르르 달려오는 다연을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꺅.”

다연이 놀란 듯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한다연 님의 비명이 감지되었습니다.]

“미미야, 지금 한다연 소리 분석해.”

[분석 중입니다.]

자혁이 다연을 안고선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분석 결과, 갑작스럽게 놀란 경우로 웃음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와 미미! 대단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감사합니다.]

다연과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닌 제삼자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자혁은 다연이 느꼈을 감정을 본의 아니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다연이 자신이 아닌 미미에게 집중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혁은 다연을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몸을 겹쳤다. 놀란 눈을 한 다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혁은 빙긋 웃었다.

“미미야, 굿 나잇.”

[굿 나잇.]

미미의 퇴장에 다연은 아쉬운 듯 눈을 내리떴다.

“아쉽다. 더 놀고 싶었는데…….”

“어쭈, 이젠 나는 안 보이지?”

“내일 또 놀아도 돼요?”

다연이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끼는 장난감을 되찾으려는 아이의 눈빛이 이럴까?

“내가 뭘 할지 이젠 긴장도 안 하네.”

“테스트할 거잖아요.”

“그다음에 뭘 할 거 같아?”

“어른 칭찬.”

누가 널 이렇게 예쁘게 낳아주셨을까.

자혁은 다연의 손목 안쪽 살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윽, 간지러워요.”

자혁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다연이 간지럽다고 한 것을 발진이 올라오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보다.

“발진이 올라와서가 아니라…….”

다연이 말을 하면서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놀랐어요?”

“당연히.”

그는 다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연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자혁 씨가 이렇게 여린 면이 있는 줄 몰랐네요.”

그가 고개를 들고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다치는 게 싫고, 아픈 것도 싫어. 누가 그러는데 두려움이래.”

다연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테스트에 충실해야겠지?”

그는 다연의 목 안쪽을 살펴본 후 다연의 귀밑에 입술을 묻었다.

다연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온몸으로 스미는 것 같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몸속에서 열꽃이 피어났다.

다연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하아. 오늘은…….”

참아 달라는 말을 하려 했었다.

고개를 든 자혁의 입술이 다연의 입술과 맞물리면서 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었다.

아래쪽에 뻐근한 둔통이 느껴져 다연이 다리를 비틀었다.

더운 숨이 섞인 키스가 이어질수록 뻐근한 둔통은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열기로 바뀌었다.

자혁이 손이 옷 사이로 들어왔다. 뜨거운 손이 천과 피부 사이를 스쳐 지날 때마다 짜릿한 감각에 심장이 저릿했다.

하아.

단단한 가슴을 다연이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고 나서야 자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자혁의 입술이 목을 따라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티셔츠 사이를 파고든 자혁의 입술이 어느덧 속옷 사이로 들어왔다.

다연이 다급하게 자혁의 머리를 들어 올려 열기가 서린 붉은 눈을 마주했다. 다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안 될 거 같아요.”

“알아.”

자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몸이 떨어지자 춥지도 않은데 한기가 이는 것만 같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혁이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려주고 다연을 일으켜 주며 말했다.

“손만 잡고 잘게.”

* * *

마지막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다연은 며칠 전 다시 그린 그림을 지혜에게 내밀었다.

일러스트집을 출간할 때 제외했던 그림이라 지혜도 보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여기 좋다.”

지혜는 다연의 첫 번째 출간작인 이탈리아 편을 유독 좋아했었다.

지혜가 좋다고 고른 것 역시 이탈리아였다. 피렌체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선배는 유독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거 같아요.”

다연은 강의 내용이 정리된 노트를 펼치며 웃으며 말했다.

“노노!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경주 작가님이 그린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거야.”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 지혜의 입에서 나오자 다연이 시선을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네가 그린 그림이 참 묘해. 외로움도 있고, 해방감이라고 해야 하니? 긴 여행 끝에 편히 쉬는 느낌이야.”

지혜가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때는 말 못 했는데… 어마무시한 네 남편 덕에 너 무사히 출국하고 난 뒤에 연락이 끊겼었잖아.”

“그랬었죠.”

도망치듯 출국한 뒤에 다연은 두 달이 넘게 휴대폰조차 켜지 않았었다. 새로 만든 휴대폰이었고, 번호를 아는 사람은 이 실장밖에 없었다.

휴대폰에도 지혜와 이 실장의 연락처만 저장되어 있었다.

“네가 연락해와선 물감이랑 보내 달라고 했을 때 진심 기쁘면서 울컥하는 거야. 아… 얘가 살아 있구나, 싶었거든.”

“그렇게까지 걱정 끼치고 있는 줄 몰랐어요.”

그동안 지혜가 말한 적 없기에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줄 몰랐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네가 메일로 보내온 그림을 보는데. 마음 졸였던 게 탁하고 풀리더라.”

“선배가 보기엔 내가 그만큼 불안해 보였던 거잖아요.”

지혜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많이 불안해 보였거든.”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다연의 착각이었다.

다연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을 뿐 지혜는 한국을 떠난 직후 그녀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점점 생기가 차오르던 그림에서 최근엔 외로움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야. 이번 스페인 편에서처럼.”

다연의 그림을 가장 많이 보았고, 가장 오랜 시간 봐 온 사람이니. 지혜의 느낌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네 그림에서 다시 이탈리아 편에서 느꼈던 안정감이 보이는 거야.”

“안정감요?”

“왜 그런 거 있잖아… 여행 내내 너무 좋았는데 집에 오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씩 웃게 되는 그거.”

은연중에 다연이 한국에 온 것에 안도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네가 한국 편도 그린다면 나는 이탈리아 편만큼이나 애정하게 될 거 같아.”

지혜는 강의 녹화를 위해 카메라를 세팅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연은 탁자 위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 *

2년 전 다연은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의 불륜, 끔찍한 엄마의 사고.

거기다 동화 속 못된 계모와 의붓언니를 완벽히 현실화한 새엄마와 주연.

유일한 핏줄이었던 부친의 죽음.

마치 예정되었던 것처럼 차례차례 다연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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