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영문도 모른 채 다연의 손을 잡고 기뻐해 주던 장 여사가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내일 오겠다며 퇴근했다.
다연은 걸을 때 뻐근한 둔통 때문에 춤이 아닌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문득, 아침에 자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심심하면 미미랑 얘기해도 돼.”
지난번 구글이 알려줬다는 농담도 미미가 알려준 것이라고 했었다.
다연은 몇 달 동안 심정적 라이벌이었던 미미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흡흡.”
다연은 헛기침 몇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미미야, 안녕.”
[안녕하세요.]
진짜… 대답을 했다. 미미가.
“미미, 너… 거기 있어?”
[네, 미미야 하고 부르면 언제든 대답합니다.]
“아, 미미.”
집 안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드리는 미미의 목소리가 신기해 다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미야, 넌 남자야 여자야?”
[성별은 없지만, 남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요.]
모르는 게 없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다.
다연은 어느덧 공중에 대고 말하는 것이 신기해서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미미야, 구자혁은 어떤 사람이야?”
[능력 있고 얼굴도 잘생긴 존잘남입니다.]
다연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래?”
[구자혁 님에 대해 입력된 정보입니다.]
본인이 투자해서 개발 중인 거니 좋은 내용만 입력해 놓았겠지.
“구자혁은 어떤 거 물어봐? 여자에 대해서도 물어봐?”
[비밀이에요.]
“허.”
기막힌 숨소리가 다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미미야, 한다연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
이것도 비밀이라고 할까 봐 다연은 조금 긴장되었다.
이게 뭐라고 미미의 대답이 기다려지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미미야, 한다연이 울어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한다연 어디 있어? 한다연 차는 어디 있어? 한다연은 좋아하는 음악은 뭐야? 한다연이 내가 싫대. 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스피커로 울리는 미미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다연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다연이 울었던 날이었고, 다음날 자혁은 다연을 데리고 산채 정식집으로 데리고 갔었다.
“어제 왜 그랬는지 안 물어봐요?”
“여자가 우는 건 물어보는 거 아니래.”
“누가…… 그래요?”
“아는 형이…… 미안.”
“사과는 왜 하는 건데요?”
“무조건 사과하래.”
“그것도 아는 형이 알려줬어요?”
“아니…… 있어…… 아는 거 많은 친구.”
아는 거 많은 친구가 미미였다니.
막상 알고 나니 맥이 빠지는 거 같기도 했지만,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이 실장의 보고를 들으며 자혁은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그의 버릇이었다.
“박이영이라고 했나요? 그 기자?”
“네.”
악의적인 지라시가 돌았을 때만 해도 자혁은 타깃이 자신일 거로 생각했었다.
자신을 밀어내고 한강 기업을 통째로 꿀꺽하려는 작은아버지의 빅 플랜 중 하나라고.
은밀히 뒤를 쫓아보아도 작은아버지와의 작은 접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박 기자가 다연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가 돌리는 지라시의 내용 대부분이 다연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A 기업의 부인 B 씨. 베일에 싸여 있지만, 굉장한 자산가이다. 양친 모두 사고사 후 받은 재산이 상당하다. B 씨의 부모가 모두 사고사한 이유에 대해 최근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언급되었던 H 산업 차녀. 부친의 사고 후 모습을 감추었던 이유가 있었다. 보험금 노려 부친을 사고사로 위장한 채 잠적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 대한 제보 받습니다.
연락처: 010-XXXX-XXXX.]
자혁은 지난번 정신이 주었던 명함에 있던 것과 전화번호가 같다는 사실에 신경이 더 곤두섰다.
거짓과 진실이 교묘히 섞여 있는 것이 지라시였다. 다연에 대한 지라시도 거짓도 진실인 양 교묘히 섞여 있었다.
다연의 양친 모두 사고사한 것은 진실이었지만, 조사한 바로는 다연이 물려받은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비가 오는 날 모친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었다는 것은 다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시기가 언제였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부친이 재혼한 시기를 고려해보면 어릴 때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볼까 했지만, 자혁은 꺼림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책상을 두드리던 손으로 펜을 쥐고선 자혁이 지시를 내렸다.
“한다연 양친 사고를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양친이라면.”
“모친에 대해서도 조사해보세요. 사고사로 들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였는지 최대한 상세하게요. 상대방 차량이 있었다면 누구의 과실이었는지도요.”
“네, 알겠습니다.”
부친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기에 모친에 대한 것은 의외일 수도 있었지만, 이 실장은 왜냐고 반문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꼼꼼한 그의 성격답게 메모를 했다.
“지난번 거제도 출장 갔을 때 사모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요?”
“네.”
자혁은 쥐었던 펜을 다시 내려놓았다.
거제도 출장 갔을 때 다연이 혼자 식사 하는 것이 걸려서 이 실장에게 부탁했었는데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갔는가 보다.
“뭐라고 하던가요?”
“진성 호텔 파티에서 들었던 지라시 내용을 말씀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거라면 자혁이 이 실장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었던 것이었다. 혹시라도 다연이 물으면 솔직하게 말해주라고.
앞으로 대외활동 시 진성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또 없을 수 없었다. 자혁이 아무리 다연을 꼭꼭 숨겨둔다고 해도 사람들의 말은 발이 없고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다연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도는지 모른 채 그날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게 둘 수는 없어서 혹시라도 다연이 물어보면 이야기해 주라고 했었다.
자혁은 그녀가 절대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혁을 제외하면 다연이 물어볼 사람은 이 실장이 유일했으니까.
“사장님 말씀대로 보여드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추후 사모님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돌면 꼭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자혁은 책상에 놓인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아직은 조사가 더 필요했다.
“제가 지시하기 전까진 알리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 회장님이 연락주셨습니다.”
진 회장이라는 말에 굳어 있던 자혁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며칠 전 전화를 못 받았었는데 이 실장에게 직접 연락했는가 보다. 그리고 진 회장이 연락한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한다연.
“또 그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사모님만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자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돌아가신 회장님께 사모님을 소개한 분이 진 회장님이셨습니다.”
그건 자혁도 알고 있던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소개한 사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친밀감은 그 이상인 것이 놀라웠다.
“진 회장님과 사모님 외가와 집안끼리 친밀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사모님의 모친 되시는 분이 돌아가신 후 외가와 연락이 끊어진 모양입니다.”
“다시 만난 게 언제입니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회장님 입원하신 직후로 보입니다.”
자혁도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경영승계 도중에 쓰러진 조부가 갑작스럽게 입원했었다.
책을 좋아하는 조부에게 항암 부작용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었다.
라디오를 듣는 것도 한 달이 지나니 시들해져서 주치의의 권유로 책 읽어줄 만한 사람을 구했었다.
혹여 조부의 상황이 새어나가면 안 되기에 비밀 유지될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았었다.
막역한 사이였던 진 회장의 추천으로 다연이 그 일을 하게 되었고, 다연은 그 일을 아주 충실히 해냈었다.
다연과 진 회장의 친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추측이긴 합니다만, 사모님께서 그 당시 한강 병원 진 교수님께 상담을 받았었습니다.”
“병원에서 다시 만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군요.”
“네.”
지난번 진성 호텔 창립 파티에서 진 회장은 다연이 가진 병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마음만 먹으면 다연이 스스로 진 회장을 찾아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도 의문이었다.
“한 달 내로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안 그러면요?”
자혁은 누구보다 진 회장의 짓궂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달이라고 기간을 준 것은 어기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머뭇거린 이 실장은 진 회장의 말을 전했다.
“집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단순히 쳐들어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휴양지에 놀러 온 사람처럼 며칠을 머물다 갈 것이 뻔했다.
혼자 있는 집이라면 모를까. 다연이 어떻게 받아들지 모르는데 무조건 버틸 수는 없었다.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네.”
이 실장이 단정한 걸음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경수가 들어왔다.
“뭐야? 구자혁 사장님! 어제 파일 왜 안 보냈어?”
“존대면 확실히 존대하던가, 반말은 왜 섞어.”
“숙제를 안 했잖아요, 사장님이.”
경수의 말에 자혁이 피식 웃었다.
“어! 웃었어?”
“차 줄까?”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경수를 보며 자혁은 결재 서류에 사인을 마저 했다.
“아니, 결과 뽑느라 밤샌다고 어제오늘 마신 커피가… 스무 잔은 넘는 거 같다.”
경수는 손을 꼽아보며 피곤한 듯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결과는?”
경수는 탁자 위에 USB 메모리를 툭 던지곤 벌겋게 충혈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냥 메일로 하자니까.”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보안 유지되는 걸 찾던가.”
연구소에서 사장실까지 매주 결과 보고서 파일을 저장한 메모리를 직접 들고 사장실로 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자혁의 사내 메일을 해킹 시도했던 일이 종종 발각되었다. 최종 단계까지 털린 적은 없었지만, 자혁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래서 경수는 이중 삼중으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USB를 직접 들고 사장실을 찾았다.
“누가 숙제를 안 해줘서 정확도가 1% 떨어졌어.”
1%를 잃고 다연을 얻었으니 지혁에겐 아주 큰 소득이었다.
“너…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