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연은 장 여사에게 잡힌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발진이 올라올 거라는 생각에 다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장 여사는 다연의 손을 놔주었다.
“보리새우를 넣었고 아욱국 끓였더니 얼마나 구수한지 몰라요.”
국을 뜨면서 장 여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다연은 아무 말 없이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욱은 원래 가을에 나는 게 가장 좋대요. 입맛에 맞으면 제가 가을에 또 끓여드릴게요. 모시조개 넣어도 좋아요.”
여느 때처럼 다연이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조용했다.
장 여사가 국을 놓아주며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연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한참이 지나도 발진이 올라오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도 믿기지 않아 다연은 수저도 들지 않은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모님?”
장 여사의 목소리에 다연은 고개를 들고선 손을 내밀었다.
“장 여사님, 제 손… 아까 제 손잡으신 거 맞죠?”
“그랬죠? 제가… 실수한 건가요?”
다연이 울먹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죄송한데 제 손 한 번만 더 잡아주실 수 있나요?”
다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인지 장 여사는 다연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선 토닥여주었다.
“손잡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요.”
발진이…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다연은 다른 손도 내밀었다.
“이 손도요.”
장 여사는 미소를 지으며 다연의 다른 한 손도 잡아주었다.
“갑자기 속상한 일이 떠오른 거예요?”
자상하게 물어오는 말에 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눈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니요. 너무 좋은 일이 생겼는데… 믿어지지 않아서요.”
“그렇다면 축하할 일이네요, 사모님.”
자세한 내막을 모르면서도 장 여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너처럼 그런 사람 중에 남자랑 자고 난 뒤에 나았다는 사람도 있대. 밖에 나가 원나잇 한번 해봐. 혹시 아니? 섹스 한 번에 씻은 듯이 나을지 말이야. 그전에… 온몸으로 발진 올라와 아낙필라시스로 죽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주연이 자신을 놀리느라 했던 말이었는데 자혁와 몸을 섞고 난 뒤에 정말 발진이 사라졌다.
다연은 이 병이 시작될 무렵의 일이 떠올렸다.
고이고이 묻어 두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었다.
* * *
다연은 학교를 마친 후 엄마가 운영하는 학원으로 향했다.
방과 후 아이들을 대상으로 미술과 발레를 가르치는 학원은 날이 갈수록 수강생으로 넘쳐났다.
그 중심에는 다연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속된 조기 교육으로 다연은 미술과 발레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대회마다 상을 휩쓸었다.
다연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 나간 발레팀이 대상을 받게 되자 인근 지역에서 학원생들이 몰려들었다.
다연보다 위 학년 아이들이 예술 중학교에 입학에 성공하면서 소문을 듣고 온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다연과 몇몇 학원생이 대회에서 상을 받고 예술 중학교에 진학하자 발레와 더불어 미술학원도 학원생이 몰려들었다.
취미로 해보라며 부친의 권유에 시작된 학원은 어느새 예중, 예고 입시로 유명한 학원으로 성장했다.
학원생 대부분 발레면 발레, 미술이면 미술 한 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다연은 아니었다.
둘 중 하나만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양쪽 모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아닌 미술 선생님인 수아가 다연을 반겼다.
“다연이 왔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선생님, 엄마는요?”
“잠깐 집에 다녀올 일 있으시다고 하셨어. 금방 오신대.”
걸어서 오 분 거리가 집이었다.
다연은 하교 후 곧장 학원으로 왔다. 다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발레 수업 때 입는 레깅스를 찾아보았다.
땀에 젖은 발레복을 매일 빨아서 담아두는 가방이 없었다.
“찾는 거 있니?”
“발레복 가방요. 안보이네요.”
다연의 가방은 미술 선생님이어도 알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엄마가 집에서 안 가져오셨나 보다. 한번 전화해 볼래?”
다연은 전화기를 들고 집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음이 오래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 받으시니?”
“네.”
20분 뒤면 수업 시작이었다.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를 계속 기다릴 수는 없었다.
콩쿠르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이상 다연은 연습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했다.
평소보다 시간을 단축했다는 생각에 다연은 거친 숨을 모아 쉬며 집 안을 들어갔다.
엄마의 신발이 놓여 있고 낯선 신발이 나란히 있었다.
아빠는 제주도 출장 중이라 일주일 뒤에서나 집에 온다고 했었다.
다연은 이상한 느낌에 숨을 죽였다.
집 안에선 낯선 소음이 들렸다.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자신의 숨소리와 비슷했다. 아팠을 때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소음에 집 안으로 들어가는 다연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한 발 한 발.
발소리를 죽인 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낯선 소리는 안방에서 들렸다.
다연의 발걸음은 안방 근처에서 멈추었다.
“하아.”
지나치게 다정한 여자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자신의 엄마였고, 남자는 아빠의 운전기사인 김 씨였다.
“부부 침실에 나와 있으니까 어때?”
“뭘 물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묻는 여자의 수줍은 목소리는 엄마가 분명했다.
다연은 조각상처럼 몸이 굳었다.
“집에서 당신이랑 이러고 있을때는 우리가 진짜 부부인 거 같아.”
“지금은 심증적으로 우리가 부부인 거 맞아. 서류상 남편은 내연녀랑 여행 갔잖아.”
“하긴, 이젠 숨기지도 않더라.”
“상황에 이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어때서.”
“이런 게 당신 매력이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좋아.”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연에게는 혐오스럽게만 들렸다.
어떤 상황인지 모두 이해되는 순간, 다연은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거 같았다.
다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와 다연은 학원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엄마는 평소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아빠가 없는 집에서 다른 남자와 다정히 있었다. 그것도 아빠의 운전기사와.
그런데 이렇게 감쪽같은 모습이라니.
다연은 엄마의 행동에 강한 거부감이 일었다.
일주일 뒤, 아주 중요한 콩쿠르에서 늘 잘해오던 다연이 갑작스럽게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실수를 반복했다.
결국 준비한 것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도중에 음악을 중단하고 무대를 내려와야 했다.
다음날에도 다연은 최악의 컨디션으로 본선조차 오르지 못했다.
서울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었지만, 지방까지 왔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다는 것에 엄마는 운전하는 내내 다연을 다그쳤다.
“연습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컨디션 조절하라고 학교까지 빼면서 준비했던 대회인데 어쩜 그렇게 성의 없이 할 수가 있어?”
다연은 비가 오는 창밖만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는 생기마저 사라졌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대회인지 너도 알잖아. 예고 입시에 가산점이 붙는 대회였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도 엄마는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은 다연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니 분노를 쏟아냈다.
“나 좋으라고 한 거야? 아니잖아. 다 너를 위해서잖아. 오늘 대회에 그 여자가 왔단 말이야. 발레계의 대모! 하아.”
엄마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푹푹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어디 아프냐는 걱정스러운 말 한마디 정도는 엄마가 제게 할 줄 알았다.
대회는 또 있으니 상심하지 말라는. 아니, 괜찮다. 이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다연은 혼자 묻어 두고 지나갔을 것이다.
다정한 부모님이 실상은 각자의 애인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격이었는데 그 현장을 직접 보았다.
그날부터 시작된 악몽으로 다연은 잠도 들 수 없었다.
“사춘기든 뭐든 대회 끝나고 했어야지. 어쩜 이렇게 무책임하게 대회를 망칠 수 있어!”
“엄마…….”
나직하게 울리는 다연의 목소리에 엄마는 다시 또 분을 풀어냈다.
“이제야 정신이 들어? 네가 뭘 말아 먹었는지?”
“나… 그날… 봤어.”
“뭘!”
엄마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주 금요일……. 집에서…….”
그때였다.
-꽝!
굉음과 함께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쾅 하고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연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조금 긁힌 곳 외에는 다친 곳이 없던 다연을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눈을 뜨자마자 다연은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연은 주연을 처음 만났다.
부인의 장례식에 내연녀와 그 딸을 데리고 온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일주일 전 엄마의 입에서 들었던 부친의 내연녀가 다가와 안아주는 순간, 다연의 몸에는 발진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다연이 무언가 잘못 먹어서 생긴 알레르기라고 가볍게 여겨졌었다.
다연의 발진은 부친의 운전기사인 김 씨를 보고선 절정에 달했다.
온몸으로 퍼지는 발진에 엉망이 된 다연을 본 사람마다 경악했지만, 당사자인 다연은 무감하기만 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다연의 뇌 일부분이 다쳐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결국 아무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발진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연은 그날 이후 발레를 그만두었다.
사람과 접촉이 없는 그림만 그렸다.
엄마의 발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빠와 재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온 새엄마와 주연은 이런 다연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사람 알레르기라는 것이 존재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심심할 때 한 번씩 건들어 보려고.”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뭐 어때? 약 먹으라고 하면 되지.”
주연은 마치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 중 하나를 구경하는 듯한 시선으로 다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처럼 종종 다연을 일부러 건들었다.
발진이 올라오는 다연을 보며 주연은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친구들 앞에 세워두고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옥 같은 날이었고, 다연은 점점 더 병들어 갔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림마저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연은 사람에 대한 믿음마저 완전히 사라졌었다.
다연은 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
다연이 가족에게서 벗어날 방법으로 택한 것이 자혁과의 계약 결혼이었고, 지금 그는 다연에게 사라졌던 믿음을 주었다.
그 믿음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기적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