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제 몸인데도 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호흡도 제멋대로였다. 다연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자혁의 호흡도 다연만큼이나 거칠었다.
자혁은 다연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느릿하면서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맞춤에 호흡이 정리되었다.
“괜찮아?”
그가 입술을 떼고 물었다.
그와의 정사가 괜찮은 것인지 맨살끼리 닿은 곳이 괜찮은지 모호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다연은 두 가지 모두 포함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참을 수 없어 저질렀는데….”
서로의 시선이 맞물린 채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픈 건 싫어.”
세상이 흔들릴 정도로 할 거 다 해놓고선 아픈 건 싫다니.
다연은 곧장 대답해 주지 않고 피식 웃었다.
자혁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나 긴장시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성공했어.”
“계속 대답하지 말아야겠다.”
다연이 몸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자혁을 조금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다연은 곧 후회했다.
“계속 이러고 있어. 난 좋아.”
다연의 위에서 몸을 겹치고 있던 자혁이 몸에서 힘을 뺐다. 그의 무게가 고스란히 다연에게 실렸다.
맞닿은 몸은 작은 움직임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의도했든 아니든 자극적이었다.
“괜찮았는데… 안 괜찮아지려 해요.”
다연의 지친 목소리에 자혁이 낮게 웃으며 몸을 뗐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서늘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집 안을 활보했다.
땀과 끈적이는 몸을 씻고 싶은데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온 자혁이 다연에게 물을 내밀었다.
“물이야.”
다연은 시트를 움켜쥔 채로 상체만 겨우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물컵을 향해 뻗은 다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혁이 남은 손으로 다연의 손을 잡아 내리고 컵을 입에 직접 대주었다.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나자 졸음이 쏟아졌다.
“졸려요.”
“자.”
“씻고… 싶은데….”
다연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다른 사람의 살결이 이토록 오래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등 뒤로 규칙적으로 뛰는 자혁의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안은 팔은 무겁기도 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그의 체온이 전신으로 퍼져 기분 좋은 온기에 다연이 몸을 꼼지락거렸다.
다연의 작은 인기척에 잠결임에도 자혁이 다연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할 거 다 하고 껴안은 채 잠까지 자고 일어난 뒤에 하기에는 아주 늦은 후회였다.
어젯밤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로 부끄러운 일이 참 많았다.
“하아.”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직 자는 줄 알았던 자혁의 입술이 어깨에 닿았다.
“일어나자마자 한숨 쉬어도 소용없어.”
“하아.”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거 아니야.”
그걸 누가 모르냐고요.
그런데도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걸 어쩌라고.
“몸은 괜찮아?”
그의 입술이 어깨에서 목 뒤에 닿더니 척추를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괜찮냐고 물어보질 말든가 아니면 그 입술 좀 가만히 두던가.
다연이 몸을 일으키려 해도 그의 팔이 단단히 감고 있었다.
“어딜.”
자혁이 웃으며 쏟아진 숨결에 솜털이 살랑이는 것까지 예민하게 모두 느끼고 있었다.
“내 몸 좀 확인하게 그만 좀 놔주면 안 돼요?”
“어젯밤 내가 다 확인했어.”
그의 말에 열기가 화르르 얼굴로 몰렸다.
그러고 보니 질척이면서 끈적이는 것이 모두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다연이 잠든 사이 자혁이 무엇을 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가 닿았던 몸 곳곳에 간지러움은 없었다.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곳… 물어본 건데.”
십 년 치 부끄러움을 어제오늘 다 겪은 것만 같았다.
다연은 제발 그가 입을 닫아주기를 바랐다.
“대답.”
걱정스러운 듯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콘돔을 쓰긴 했어도 걱정되는 거 같았다.
뻐근한 둔통이 있었지만, 그가 걱정하는 이상 증상은 없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다행이다.”
“네.”
“매일 괜찮았으면 좋겠다.”
낮게 웃으며 자혁이 하는 말에 다연은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구자혁 씨 말 좀 그만해줄래요?’
고요한 외침을 다연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다연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자혁은 욕실까지 함께 들어왔다.
다연이 적응 기간을 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샤워를 함께했다.
다연이 불만스럽게 툴툴거릴 때마다 자혁은 오만한 목소리로 단 한마디만 했다.
“적응해.”
“그리니까 시간을 좀 달라고요.”
“지금 주고 있잖아.”
결국엔 다연이 지쳐서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 * *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심심하면 미미랑 얘기해도 돼.”
“미미 이야기는 그만해줄래요?”
“모르는 게 없어.”
아, 네 그러시겠죠. AI인데 얼마나 똑똑하겠어요.
그의 입에서 미미가 나오자마자 다연은 자혁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떴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어 다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을 참느라 그의 어깨가 자잘하게 떨리는 것이 다연의 눈에도 보였다.
“그냥 웃죠.”
“그래도 돼?”
“하아…….”
다연의 한숨 뒤에 자혁이 소리 내 웃었다.
그래요, 마음껏 웃어요. 오늘까지만 봐줄 테니까.
“자선 파티에서 만났던 경수 씨는 미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 다연이 물었다.
“경수가 개발자거든.”
“아…….”
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고 아날로그적 감정으로 살던 다연에게는 AI가 생소했다.
“집 안 통제 시스템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개발 중이야. 더구나 1인 가정도 늘어 나는 추세라 명령어 하나로 쉽게 집을 관리 할 수 있도록.”
“1인 가구 하나 알아듣겠네….”
자혁의 일 이야기가 재미없었는지 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마셨다.
“고령화 시대잖아. 어르신 혼자 집에 있는데 넘어지거나 했을 때. 쉽게 누군가를 부를 수 있겠지. 그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도.”
이해됐는지 다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허공에 대고 미미한테 말했다면 이런 오해도 안 했잖아요.”
다연이 입술을 비죽였다.
“테스트한 것을 녹음해서 매일 경수한테 보내주는 게 내 숙제야. 이렇게 집 안 전체에 울리면 녹음을 할 수 없어.”
“아…….”
단순히 녹화 품질을 위해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한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해가 깊어졌다.
“나 또 궁금한 거 있어요.”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연을 바라보며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말해.”
“내가 당신 방에 올라갔을 때요. 그때 왜 화냈어요?”
그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컵을 내려놓았다.
“그날… 진짜 미웠어요.”
그가 뭔가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슬쩍 구겼다.
“그날 당신 단추 풀어주면서 내가 어땠을 거 같아?”
“그야…….”
다연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얼버무렸다.
“당신 안고 뒹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올라왔어. 우리 그날 같이 자기로 했었고.”
“그랬…죠.”
“이 집에서 유일하게 당신 향이 나지 않는 곳이 내 방인데. 나름 안전 구역에 있는 사람을 자극하면 나더러 짐승 되라는 거지.”
그런 줄도 모르고 베개까지 들고서 그의 방에 들어가려 했으니 다연은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짙은 우드 향이 배어 있었다.
따로 쓰는 향수도 없는데 자혁은 다연의 향을 의식하고 있다. 자신만 그의 향을 의식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당신 방에 올라가 봐도 돼요?”
“언제든.”
다연이 입술을 말아 물면서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가 볼까?”
그가 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연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좋아요.”
희미하게 웃는 그의 손을 잡고 다연은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다연은 그의 방을 둘러보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혁의 생각은 달랐다. 다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다연이 상체를 뒤로 뺄수록 그의 몸은 점점 앞으로 기울였다.
다연이 고개를 돌리자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뭐예요?”
“뭐긴… 여기서 당신이랑 하고 싶었던 거 하는 거지.”
한 번 선을 넘은 남자와 여자의 거침없는 스킵십에 온도는 금방 타올랐다.
짙은 네이비 색 시트가 덮인 침대 위로 다연과 함께 몸을 포갠 채 누웠다.
“출근해야죠.”
“할 거야.”
자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할 거 좀 하고.”
입술과 입술이 겹쳤다.
그의 키스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몰려들었다.
자혁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이며 서로의 입술이 맞물렸다.
들숨과 날숨이 섞이고 점막이 비벼지는 척척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다리 사이를 벌린 자혁의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옷 사이로 느껴지는 열기에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었다.
입술을 뗀 자혁이 거친 숨을 내쉬며 이마를 맞댔다.
“재택 근무할까?”
억눌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면 진심으로 보였다.
“농담, 그만하고 얼른 출근해요.”
“진담이야.”
다연이 눈을 크게 뜨자 자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집에서 당신만 안고 있을 거 같아서. 출근… 할 거야.”
자혁이 아쉬운 듯 몸을 일으키며 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돈 벌어야지. 먹여 살릴 식구가 많아서.”
자혁의 입술 끝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 * *
자혁이 출근하고 다연은 다음 온라인 클래스에 그릴 그림을 연습해보았다.
출간했던 일러스트집에서 반응이 좋았던 그림 중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구도 골랐다.
초반 지혜에게 보냈던 강의 계획서에서 두 개를 변경하기로 했다.
일러스트집에서 보았던 것이 아닌 새로운 일러스트를 넣기로 했다.
예전 여행 중 그렸던 그림과 사진을 보며 다연은 적당한 것을 고르고선 다연은 워터브러쉬를 들었다.
장 여사 가져다준 간식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다연은 그림에 열중했다.
“사모님, 식사하세요.”
장 여사의 목소리에 다연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허기지면 손에 힘이 달려서 그림 그리기 힘들어요. 얼른 식사하세요.”
“네.”
다연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 여사가 자연스럽게 다연의 손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