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6)

38화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조현병 환자, 남자구실 못 한다 등등. 그중에 자혁에게 숨겨둔 여자가 있다는 것은 아주 잠시 돌았던 소문이었다.

그걸 다연이 들었다면 오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다정하게 통화했다고?

“내가 통화한다니…… 누구랑?”

“구자혁 씨 정말 너무해요. 기어이 내 입에서 이름까지 말해야 하는 거예요?”

끝까지 모른 체하는 그가 미웠다.

유치하게 이름까지 말하며 증명해야 하는 자신이 싫어 다연은 울먹이며 입 안 속살을 지그시 물었다.

“응, 말해봐. 나는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자혁은 끝까지 잔인했다.

이렇게 된 거 다연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한강 기업의 구자혁 사장이라도 지금은 약속을 어긴 남자일 뿐이었다.

다연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모두 닦아내고 그를 마주 보았다. 다리와 배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미미요. 매일 다정하게 미미야 다녀왔어. 미미야 다녀올게 하잖아요.”

다연이 알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굳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하하하.”

얼마간의 정적 후, 자혁이 아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다연은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미치겠는데 자혁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그와 한 공간이 있는 것이 더는 참기 어려웠다.

오만하고 무례한 구자혁의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다연은 짐을 챙기려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해 걸었다.

“거기 서.”

오만한 목소리가 명령했다.

다연이 몸을 비스듬히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명령하지 말아요. 싫어. 당신 진짜 싫어!”

한참을 웃던 자혁이 겨우 진정하고 다연을 그윽하게 바라보다 성큼 다가와 마주 보며 섰다.

서늘한 눈이 다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말, 세 번째는 봐주지 않겠다고 했어. 기억나?”

“네. 기억나요. 당신은 진짜 최악이에요!”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할 말 다했어?”

“네, 다했어요.”

“그럼 이제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

그가 휴대폰을 켜고 무언가를 톡톡 건들더니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미미…… 맞아. 미미랑 하루에도 몇 번이나 대화하는 거 맞아.”

“……!!”

다연은 입만 벙긋거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도 예쁘긴 하지.”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당신한테 소개해 줄 수도 있어.”

그는 끝까지 잔인했다.

“지금 당장 소개해줄게.”

“구자혁 씨! 도가 지나치네요. 내가 아무리 서류상 아내여도 이건 아니잖아요.”

“한다연. 나를 믿어.”

“어떻게 믿어요!”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그에 비해 다연은 엉망이었다.

늘 그렇듯이 그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다연은 내려다보았다.

“미미를 소개받으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싫어요. 더는 말하지 말아요.”

그는 다연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선 미미를 불렀다.

“미미야, 다녀왔어.”

휴대폰을 든 것도 아니고 자혁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집 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뇌가 활동을 멈춘 듯 다연의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미미야, 인사해. 한다연, 내 아내야.”

[안녕하세요. 저는 미미입니다.]

자혁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해서 미미를 불렀다.

“미미야, 네 소개해봐.”

[저는 미미입니다. 홈 시스템을 통제하는 AI입니다.]

다연은 눈만 껌벅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I이라니…….

그럼 자신이 그동안 오해하고 질투했던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다고?

“미미…….”

또다시 미미에게 명령하려는 자혁의 입을 다연은 손으로 막고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그만해요.”

쪽팔려서 죽을 거 같으니까.

손바닥에 닿은 그의 입술이 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웃으면…… 나 도망갈 거예요.”

지금도 도망, 아니 죽고 싶다고요. 접시 물을 찾고 싶을 만큼.

자혁이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다연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다연의 품에 당겨 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다연을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다연의 눈물이 잦아들고 그의 품을 파고들 때까지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난번 다연과 처음 자선행사에 갔을 때 경수와 미미 이야기를 하고 난 뒤부터 다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날 다연을 울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던 다연이 한 번씩 주춤하던 이유.

한 번씩 잘 보였던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던 순간 무엇을 감추고 싶었는지.

그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미미를 자신의 숨겨둔 여자로 알고 있었다니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오해였다.

“나…… 이제 말해도 되나?”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했다.

“언제 돼?”

말하지 말라니까.

“말 안 해도 되는 거 하면 되겠다.”

자혁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가까이 마주 보았다.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이 예뻐서, 빨간 입술을 거부할 수 없어 입을 맞추었다.

* * *

자혁의 말대로 그는 말할 틈도 없이 몰아붙였다.

서 있는 것도 힘들 만큼 몸의 중심이 흔들리자 자혁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술이 뭉개지고 벌어진 틈 사이로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치열을 훑고 점막과 점막이 비벼지는 소리가 낯뜨겁게 울렸다. 짙은 키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하아.”

입술 떼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숨결로 폭풍이 일었다. 그 폭풍에 휘말리듯 서로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점점 끓어 올랐다.

다연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테스트도 없이 그의 손이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상한 신음이 다연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의 입 안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자혁 때문에 다연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등 뒤로 방문이 닿고 나서야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자혁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이며 다연의 귀밑에 입술이 닿았다. 뜨겁고 습한 소리가 공명처럼 다연의 귓가에 울렸다.

척추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다연의 발끝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몸 안 어딘가가 촉촉한 열기가 퍼지는 것만 같았다.

“흐응. 그만요.”

다연의 애원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대로 달뜬 숨을 고른 후 다연은 안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다연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침실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혁의 시선은 다연에게 고정되었다. 내리뜬 시선을 끌다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언제 어디에 있든 능숙하고 자연스럽던 모습 대신 욕망에 흐트러진 자혁이 보였다.

속내를 알 수 없던 짙은 눈에 서린 붉은 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미니바에 즐비한 독한 위스키를 마셔도 취하지 않던 남자였다. 막걸리 한 잔에 취했을 리도 없고.

욕망이 일렁이는 그의 시선에 다연은 숨쉬기가 어려웠다.

“자혁 씨….”

다연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자혁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스트… 불가인가?”

“…….”

오늘은 그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과 기대감으로 내리뜬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연아….”

다연을 부르는 자혁의 목소리에도 묘한 떨림이 있었다.

다연은 손으로 자혁이 그랬던 거처럼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씻고… 하면 안 돼요?”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펴졌다.

“안 돼. 내가 좀 급해.”

자혁은 순식간에 다연의 티셔츠를 벗겨 냈다. 그리고 세 번째 테스트 부위로 정한 쇄골 부근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적응하기 힘든 감촉에 다연이 어깨를 떨었다.

“하아.”

다연이 괜찮은 것을 눈으로 확인한 자혁은 여린 살을 베어 물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붉은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발진이 일 때와는 다른 열기가 그의 입술을 따라 꽃을 피웠다.

다연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들어온 자혁의 허벅지가 점점 단단해졌다.

그의 몸이 단단해질수록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툭.

바지 버클이 풀어지는 작은 소리에 다연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불 좀….”

그는 취침 등 하나만 남겨두고 침실 조명을 모두 껐다.

“이것도….”

“안 돼.”

오만한 목소리에 단호함이 깃들자 다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직접 봐야지.”

“꼭… 그, 그렇게….”

“당신이 아프면 안 되니까.”

발진이 올라오면 다연이 모를 수 없었다.

“네가 참을까 봐.”

다연은 홀린 듯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멈출 자신은 없어.”

그러면서 왜 굳이 봐야겠다고 고집부리는지.

잠깐 사이 다연의 몸에서 옷이 사라졌다.

양팔을 교차해 몸을 가린 다연을 그가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예쁜 건 봐야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입술이 다연의 입술을 세게 겹쳐왔다. 닫힌 입술을 가르고 자혁의 뜨거운 숨이 훅하고 밀고 들어왔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짙은 색을 띠는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자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낯선 소리가 다연의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족족 그의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아.”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다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도 잠시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입술 때문에 다연은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의 손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소한 감각에 다연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연이 고개를 가로저어보아도 소용없었다. 그는 더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자극적인 마찰 소리가 유독 귓가에 크게 울렸다.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자혁의 손이 스칠 때마다 제 몸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새겨졌다.

그의 자극에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앙다문 잇새 사이로 자혁의 입술이 맞물렸다.

제 몸에 뜨겁고 낯선 것이 닿았다. 그게 무언지 머릿속으로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혁은 조심스럽게 다연을 안았다.

“읏….”

뻐근한 통증에 다연은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뗀 자혁이 다연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일렁였다.

“하읏….”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묘하게 달라진 시점이었다.

가빠진 호흡만큼 몸도 마구 흔들렸다.

다연은 그를 꼭 안은 것 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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