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76)

37화

자혁은 약속대로 사장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미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인지 다녀간 유명인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조만간 오늘 찍은 자혁의 사진도 그 옆에 걸릴 것이다.

지혜를 먼저 보내고 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그와 이렇게 나란히 뒷좌석에 있었던 적이 없어 다연은 어색했다.

반면, 자혁은 늘 그렇듯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다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좌석에 편히 기댄 채 다연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눈이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루에 한 번 전화 통화할 때마다 물어보았으면서 그는 다시 확인하려 했다.

“잘 지냈어요.”

다연은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정말 잘 지냈다니까요. 장 여사님한테 물어봐도 돼요.”

“마음에 안 들어.”

도대체 어떤 게?

“내가 없는데.”

“…….”

“잘 지냈다니.”

“……!!”

“마음에 안 들어.”

다연은 그의 말에 놀라면서도 운전하는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단둘이 있을 때 들어도 민망할 법한 말인데 차 안에는 기사도 있다는 걸 그가 제발 의식하길 바랐다.

“그래도 해줄게.”

“뭘……요?”

“어른 칭찬.”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줄래요?

다연은 지금 더운 것은 반 잔만 마신 막걸리 때문이라며 그의 말을 외면하려 했다.

“한다연.”

그렇게 온몸이 저릿하게 부르지 말아줘요, 제발.

“제발…… 조용히 가면 안 돼요?”

그가 얄밉게 웃었다.

* * *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다연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두 사람은 약속한 거처럼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만이야.”

다연을 빤히 바라보며 자혁이 말했다.

파전집에서도 그는 다연을 보자마자 오랜만이라고 인사했었다.

“아까도 인사했잖아요.”

“여긴 집이잖아.”

집에서 그를 본 것도 일주일만이었다.

잘 지낸다고 했었지만, 그의 빈자리는 그 어떤 때보다 컸었다.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는 종종 집에 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날이 많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다연은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는 거죠?”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자혁이 다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자꾸 그렇게 봐요?”

다연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늘 희미하게 웃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웃음이 짙어지고 있었다.

“오만한 목소리로 맨날 명령만 한다고…? 내가?”

예민하시기는… 지혜가 웃으며 한 말을 지나치지 않는 쪼잔함도 있었다니.

생각하지 못했던 자혁의 새로운 면모에 다연은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 실장님이 비서실 통틀어 애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해.”

잠깐씩 마주친 이 실장은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될 정도로 적당한 사람이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사람을 배려했다.

“매운 거 안 드시면서도 비서실 여직원에게 맞춰서 떡볶이를 드셔. 대세를 따르는 게 평화롭다고.”

“이 실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거 같아요.”

“출장이 길어지거나 지난 일주일처럼 비상사태면 집에 소홀해지는 게 걱정되어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어.”

이 실장이라며 괜찮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연은 다음 나올 말이 궁금했다.

“이 실장님이 사적인 말씀 거의 안 하시는데. 한 번씩 불만인 듯 웃으며 말할 때가 있어.”

“뭔데요?”

“간혹 와이프가 친구한테 흉볼 거리도 만들어 주는 것도 좋다고.”

당신은 흉볼 게 좀 많았어요.

다연은 그동안 지혜에게 했던 말을 슬쩍 떠올려 보았다.

“은근 승부욕을 자극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있어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다.”

“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주 잠깐이요. 대부분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일 수도 있을 거 같은 얼굴이고요.”

“놀아달래요.”

“무슨 애도 아니고….”

그때 지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그의 여자 문제까지 말했었다.

“그 사람에 대한 소문, 선배도 들어서 알잖아요.”

“그게 뭐? 그중에 사실 확인된 게 있기는 해? 조현병은 말도 안 되는 거였고, 뭐? 숨겨둔 여자?”

“있어요…… 여자.”

“네 서류상 남편. 여자 취향이 그토록 저렴할 줄은 몰랐네. 사업적 감각과 여자 취향이 아주 극과 극이야.”

지혜는 자신보다 더 열을 올렸었다.

“나쁜 놈은 누구인데 이렇게 열거해 놓으셨나?”

“어마무시한 남편이 거기에 적힌 나쁜 놈인가 본데… 싸웠어?”

구자혁 씨, 흉보기 맛집이었네.

절대 ‘간혹’ 흉볼 거리를 제공할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는.

다연은 배시시 웃자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사람은 한결같아야 하니까.”

그가 다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만 하려고. 잡아.”

“……!!”

“뭘 그렇게 놀라? 이리 와. 안아보게.”

다연이 옅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기가 무섭게 그가 당겨 안았다.

다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허벅지 위에 앉고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테스트.”

그의 목을 끌어안느라 다연의 팔이 그의 입술 가까이 있었다. 그가 고개만 숙이면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다연의 안쪽 팔에 그의 입술이 거침없이 닿았다.

뜨겁고 조금은 간지러운 촉감에 다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적응해.”

다연이 또 배시시 웃자 그가 다연의 허리를 꽉 안았다.

다연은 옆구리에 닿은 그의 팔이 간지러워 몸을 흔들며 웃었다.

“간지러워요.”

“자, 다시 물을게.”

다연이 가장 간지러워하는 곳을 알아차린 그가 손을 대며 말했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흉볼 거리가 안 그래도 넘치는데 또 하나 생겼다. 뒤끝 작렬이라는 것.

“어떤 대답을 원해요?”

“진실.”

그의 눈을 다연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결 되게 명령만 할 거라고 했었다. 오만한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명령이 아닌 애원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선.

그 눈이 불쑥 솔직한 마음을 내밀게 했다.

“보고 싶었어요.”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많이요.”

자신이 말해놓고도 다연은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는 진실이.

자혁의 커다란 손이 다연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볼을 감쌌다.

“잘했어.”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해줘요. 어른 칭찬.”

자혁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맞췄다.

다연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Rrrrrrrr.

식탁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의 입맞춤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벨이 끊어지고 한 번 더 울려도 그는 다연의 옷 사이로 손을 넣으며 짙은 키스를 했다.

벨이 세 번이나 다시 울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메시지 수신음이 연속해서 다섯 번쯤 들렸을 때 다연이 그의 가슴을 슬쩍 밀며 입술을 뗐다.

“전화 먼저 해결하는 게 어때요?”

“저거 보고 내가 또 나가야 하면 어떻게 하려고?”

“따라갈까요?”

그가 기분 좋게 웃었어.

“하는 짓이 갈수록 용감해지네. 칭찬 많이 해줘야겠다.”

자혁은 키스로 붉어진 다연의 입술을 엄지로 쓱 분질렀다.

“그럼, 한번 확인해볼까? 나를 따라 나가야 할지 아니면 하던 거 계속해도 될지.”

그가 긴 팔을 뻗어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그가 메시지를 확인할 동안 다연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실시간으로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흠.”

“나가봐야 해요?”

그가 다연을 바라보았다.

“하던 거 계속해도 되는데….”

“안 나가도 돼요?”

그가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다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매일 해야 하는 숙제 해달래.”

결재가 아닌 숙제라니, 그에게 숙제를 종용하는 간 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잠깐만.”

자혁은 휴대폰 옆에 놓아두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설마… 미미는 아니겠지.

다연과 약속한 이후 그는 다연이 보는 앞에서 미미와 통화하지 않았으니까.

다연은 자신의 허벅지에 앉혀 둔 채로 미미와 통화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겠지.

그러니까 지금 자혁이 통화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간절한 다연의 믿음은 그의 첫 마디에서 철저히 부서졌다.

“미미야….”

자혁의 귀에 꽂힌 블루투스 이어폰은 빼고선 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한다연?”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일그러졌다.

다연은 강렬한 그의 눈빛에 주눅 들지 않고 차갑게 바라보았다.

다연은 손에 든 블루투스 이어폰을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약속했잖아요. 이거 안 끼기로.”

“한다연.”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거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거 아니잖아요. 내 앞에서 당신 여자랑 통화하지 말라는 거였잖아요. 잘 지켜주더니 어떻게 나를 안은 채 통화를 할 수 있어요?”

그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 여자?”

“네! 아침저녁으로 다정하게 통화하는 사람이요.”

자혁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바뀌었다.

뭔가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람? 내가?”

다연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다연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 있다는 거 옛날부터 들었어요. 다 알았는데…… 그래도 양다리는 싫어요.”

자혁이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날 안을 때마다 그 사람이랑 통화할 때 다정한 당신 목소리가 떠올라요.”

“잠깐……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자혁은 다연이 하는 말과 자신의 소문을 곱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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