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76)
  • 36화

    잠깐 통화할 때마다 자혁의 목소리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다.

    “그 사람도 사람인데 잠은 잘 거 아니야.”

    “회사 호텔에서 밤샘 회의하는 날도 많은 거 같아요,”

    “남편 보고 싶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매번 아니라고 부인하는 다연을 보며 지혜가 눈을 슬쩍 흘겼다.

    “연애도 아니다.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뽀뽀는 하고?”

    지혜가 다연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됐네요!”

    다연의 말을 일갈하고 난 뒤 지혜는 다 식은 차를 벌컥 마셨다.

    -툭 투둑 툭툭.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연의 시선이 유리창으로 향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던 거 같은데 갑작스러운 비에 다연이 당황했다.

    “비 오는데 파전 먹으러 갈래?”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지만, 다연은 흔쾌히 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비가 오는데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으로 복잡했다.

    “선배 근무 중이잖아요. 다음에 가요.”

    “이런 날은 회기역 근처 역전 파전집이 딱인데.”

    아쉬운지 지혜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다연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구자혁 씨]

    발신인을 본 지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야야! 구자혁이야, 구자혁. 얼른 받아봐.”

    다연은 지혜의 눈치를 보며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어디야?]

    딱딱한 말투 그대로인데 그에게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출판사예요.”

    [집에 언제 들어갈 건가?]

    그녀의 시선에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지혜가 보였다.

    곧장 집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지혜를 따라 파전집을 갈 것이지 고민되었다.

    지혜가 입 모양으로 ‘파전’을 소리 없이 만드는 것을 보며 다연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실은…… 선배가 파전 먹으러 가자고 하는데 고민 중이었어요.”

    [여자야, 남자야?]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사이로 새어 나온 걸 청력 좋은 지혜가 듣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미치겠다. 하하.”

    지혜의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먼저 말했다.

    [여자인가 보군. 기사 보낼 테니까, 차 열쇠는 건물 경비실에 맡겨두고 가. 그리고 파전집 주소 문자로 보내.]

    “주소는 왜……요?”

    [너 데리러 가야지.]

    다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듣고 이해한 그 말이 맞는지를.

    “누굴…… 데리러 온다고요?”

    [내 와이프. 한다연 데리러 간다고. 그러려면 한 시간 안에 결재 서류 다 봐야 해.]

    지금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졌다.

    왼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눈으로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보고 있을 것이다.

    다연은 입술을 슬쩍 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집에 들어올 수 있어요?”

    [어제 말했던 거 같은데.]

    어제 통화할 때 오늘은 집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결재 서류 많아. 대답.]

    “네, 보낼게요.”

    [나중에 봐.]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지혜의 눈이 기대와 의심으로 반짝였다.

    “그런 게 아니야? 허 참. 귀신을 속여라. 그런 게 맞네! 맞아.”

    “아니라니까요.”

    이제는 그녀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지혜가 믿지 않을 것 같았다.

    “됐고! 정리하고 나올 테니 사모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지혜가 놀리듯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곤 미팅룸을 나갔다.

    * * *

    날이 날인만큼 파전집은 만석이었다.

    운 좋게 마지막 테이블을 차지한 다연과 지혜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좋아했다.

    몇 년 만에 와 본 곳인데도 가게 안은 여전했다.

    옛날 주막처럼 칸칸이 방으로 되어 있어 다른 테이블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있을 수 있었다.

    학생들의 방명록이자 낙서가 즐비한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긴…… 정말 그대로네요.”

    “우리 대학 다닐 때 여기 종종 왔었는데.”

    지혜와 함께 파전집에 앉아 있으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지혜도 마찬가지였었는지 다연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그때로 돌아간 거 같아.”

    다연이 슬며시 웃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두툼한 파전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 파전은 어쩜 그대로니?”

    “여기 파전 한 번씩 생각났었어요.”

    실내 인테리어와 더불어 파전 맛도 예전 그대로였다.

    파전을 먹으면서도 지혜의 눈을 가게 입구를 수시로 살펴보고 있었다.

    “선배, 그만 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강기업 구자혁이 온다잖아.”

    회사에 갑자기 또 일이 생긴다면 그가 못 올 수도 있었다.

    지혜가 너무 기대하는 거 같아 다연은 걱정되었다.

    “기사를 보낼 수도 있어요.”

    “기사는 차였어. 너 데리러 온다고 했던 말 똑똑히 들었어.”

    눈은 가게 입구를 보면서도 지혜는 빈 잔을 들어 보았다.

    다연은 지혜의 잔에 막걸리를 부어주며 말했다.

    “늦게 올 거예요. 자 한잔하시죠, 이 팀장님.”

    “하여튼 말 돌리는 데는 선수야.”

    지혜가 다연이 얄밉다는 듯 슬쩍 흘겨보며 막걸리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면이 있죠?”

    오만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언제 왔는지 자혁이 방 입구에 서 있었다.

    너무 놀라 지혜는 입 안에 있던 막걸리를 내 뿜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캑캑. 흠흠.”

    “언제 왔어요?”

    “방금.”

    자혁의 출현으로 가게 안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특유의 압도적인 눈빛과 예술품처럼 빚어 놓은 듯은 외모는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쏟아졌었다.

    몇몇 사람들은 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강 기업의 구자혁 사장이라는 것을 알아보곤 여기저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혁은 그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을 벗고 다연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리곤 느릿하게 자리에 앉는 지혜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다연 남편, 구자혁입니다.”

    지혜는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부크 출판사 편집팀장 이지혜입니다.”

    무슨 거래처 담당자를 만난 거처럼 딱딱한 인사가 오갔다.

    한 시간 동안 결재 서류를 봐야 한다고 하더니 다연이 생각한 거보다 일찍 온 것이 놀라웠다.

    지혜와 인사를 나눈 자혁이 시선을 돌려 다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만.”

    “일찍 왔네요?”

    그가 손을 들어 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그 모습에 지혜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아니라고 하더니…… 뭐가 이렇게 달달해?’

    늘 그렇듯이 이런 상황에서도 자상한 남편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는 자혁을 보며 다연은 주변 눈치가 보였다.

    “약속.”

    약속……? 설마 비 오는 날 같이 자는 걸 말하는 건가?

    “사업가에게 약속은 칼 같이 지켜야 하는 거라 배워서.”

    설마 했는데 그 약속을 말하는 게 맞았다. 다연은 온몸에 화르르 불길이 이는 것만 같았다.

    “두 분은 약속 있는데, 제가 눈치 없게 파전 먹자고 한 건가 봐요.”

    지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디서든 분위기 자타공인 분위기 메이커인 지혜였지만, 아무리 분위기를 편안하게 해보려 해도 그의 존재 자체가 절대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에 미세한 떨림을 지혜는 느낄 수 있었다.

    다연이 그리는 ‘연인’ 시리즈의 주인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 참 좋아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죠!”

    “맨날 아닌 게 뭐가 그리 많은지.”

    지혜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아까부터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주인이 막걸리 잔을 하나 더 가져다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가실 때 사진…… 아니 사인이라도…….”

    말을 더듬는 주인의 말에 자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진 찍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보이곤 돌아갔다.

    “사진 찍어도 돼요?”

    “자의든 타의든 사진 찍히는 거 익숙해.”

    자혁과의 만남을 잔뜩 기대했던 지혜의 눈빛은 어느새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혁은 지혜의 잔이 빈 것을 보고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들었다.

    “한잔 받으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지혜는 양손으로 잔을 들었다. 잔에 채워지는 막걸리와 자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지혜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한잔 드릴게요.”

    채워진 잔을 내려놓자마자 이번에는 지혜가 주전자를 들었다.

    “네.”

    자혁은 뽀얀 색의 막걸리가 채워진 잔을 들었다.

    “와이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걸요. 우리 다연이 잘 부탁드려요.”

    “내 부탁을 왜 두 사람이 해요?”

    뒤늦게 잔을 든 다연이 싫지 않으면서도 투덜거렸다.

    입만 축이는 다연과 달리 지혜와 자혁은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두툼한 파전을 먹으며 자혁이 다연을 살폈다.

    “이걸로 되겠어?”

    “그럼요.”

    자혁의 목소리와 말투는 다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다정한 거처럼 느껴졌다.

    잠시 뒤, 사장이 모둠전이 든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거 주문 안 했는데요?”

    “제가 했습니다.”

    다연은 상에 놓인 것을 보곤 자혁을 바라보았다.

    “모둠전도 맛있다고 해서.”

    “누가요?”

    “직원이.”

    다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일 잘하는 직원이 알려줬군요.”

    “칭찬해줬어. 어른 칭찬 말고 그냥 칭찬.”

    그냥 칭찬은 뭐고 어른 칭찬은 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좋아서 지혜는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자연스럽게 다연이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아니라고 했지만, 다연이 그린 ‘연인’은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진짜 그림 같네요.”

    “별명이 조각품이긴 합니다만.”

    본인 별명을 스스로 말하는 자혁 때문에 다연은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고, 지혜는 크게 웃었다.

    “맨날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만 한다고 하더니 이런 농담도 잘하시네요.”

    “진담입니다만.”

    진짜 진담인데 지혜는 이 말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선 박장대소했다.

    이번에도 민망함은 다연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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