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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76)
  • 35화

    어떻게 피해 가야 하나 고민을 덜어서 다연은 지난 한 달간 자혁과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어떤…… 사실 말입니까?”

    다연은 어떤 것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다 사실 그가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먼저 이야기하기로 했다.

    “남편이 제 병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라고요.”

    “그랬군요.”

    정신은 형식적인 반응만 보였다. 평소 다연의 말에 화를 내기도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몰랐는데…… 그동안 혼자서 많은 책임을 지고 있었더라고요.”

    “책임요?”

    “네. 결혼하면 따르는 책임이요.”

    명확하게 상황을 말하지 않아서인지 이렇게 말하면 정신은 다시 또 질문을 했었다. 전부 말할 수 없는 거라 다연은 애매한 단어로 피해 가려 했었다.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런지 정신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안아줬어요.”

    “발진은 어땠습니까?”

    “괜찮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요.”

    정신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지는 거 같았다.

    다연은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런 거로 생각했다.

    “괜찮을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의 차이점이 있었습니까?”

    “…….”

    알면서도 다연은 침묵했다.

    다연은 양손을 맞잡고 자혁이 매일 입을 맞추는 손목 안쪽을 내려다보며 정신의 시선을 피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거군요.”

    정신은 다연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피하기만 하는 것은 한다연 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 번쯤은 정면으로 맞서보는 건 어떠세요?”

    “…….”

    다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연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괜찮을 수 있습니다.”

    “안 괜찮을 수도 있잖아요.”

    “네, 맞아요.”

    다연은 내리뜬 눈을 들어 정신을 바라보았다.

    “부딪쳐보지 않으면 괜찮을지 아닐지 모르는 거니까요.”

    정신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꼭 제가 아니어도 됩니다. 한다연 씨가 조금이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 *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자혁이 상담실로 들어오자 정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에 다연이 다녀갔으니 오후에 자혁이 오는 것은 몇 달 동안 고정된 상담 일정이었다.

    전에는 상담 날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었는데 오늘은 둘 다 보기 싫었다.

    자혁이 알아챌 정도로 티가 났다.

    “주치의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지.”

    자혁은 예리한 눈은 이미 정신의 상태를 완벽히 분석하고 하는 말이었다.

    “한다연은?”

    이제는 대놓고 물어보는 자혁이 기가 막혀 정신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주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묻는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연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정신은 잠시 갈등하다 대답해 주었다.

    “왔다 갔어.”

    자혁은 정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 했는지는 의료법상 유출할 수 없다는 거 알지?”

    “그거 물어보려고 했던 거 아니야. 어때 보였는지 그것만 말해줘.”

    “왜? 다시 표정이 안 보여?”

    정신은 어느새 의사로 돌아와 자혁을 살피고 있었다.

    “아니야. 얼굴도 못 봤어.”

    “왜?”

    “일주일 동안 죽을 맛이었어. 집에 갈 시간도 없었으니까.”

    “피곤해 죽겠다는 말이었구나.”

    “그것보다…….”

    자혁이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주물렀다.

    “작은아버지가 또 일 터트렸어?”

    “그게 어떻게 죽을 맛이야. 귀찮은 일이지.”

    “……?”

    다연과 대화할 때 생기는 물음표가 이제는 자혁에게도 전염된 듯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정말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이었다.

    “일주일 동안 혼자 저녁 먹었을 텐데…….”

    “뭐?”

    “잠은 잘 잤나 모르겠네…….”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자혁이 누구를 걱정하는지는 알 것만 같았다.

    “너 지금 다연 씨 걱정하는 거야?”

    “이렇게 불쑥불쑥 걱정돼. 뭔지는 모르겠어. 그냥 종일 이래.”

    “일주일 동안 죽을 맛이었다는 게…… 설마…….”

    “한다연을 못 봐서.”

    정신이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한심하다는 눈빛까지 더해서.

    “그런데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뭘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는 건데?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주미 봤어.”

    자혁은 뜬금없이 주미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하게 말하기 싫을 때 말 돌리는 수법도 부부가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주미 만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게 왜?”

    “거제도 출장이 잡혀서 갔는데 주미도 거기에 있었어.”

    정신은 말이 없어졌다.

    “다연을 데려갔었는데……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어떤 마음이었는데?”

    “모르겠어. 그냥 주미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하루 더 있고 싶다는 사람을 기어이 데리고 왔어.”

    정신은 자혁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건 두려움이야.”

    “…….”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두려움.”

    자혁은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빗속에서 다연을 찾아 헤맬 때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었다.

    혹시라도 주미가 다연을 만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그래서 다연이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알면서 왜 외면해? 부딪쳐야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두려워하는 것도 다연과 자혁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자혁에게 다연의 표정이 다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손만 잡고 자는 게 정말 힘든데 그것보다 더 힘든 건 그렇게 잡고 있을 손조차 없는 거였어.”

    “옆에 없어서 죽을 맛이었다는 말이잖아. 그런데도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자혁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 할 말 아직 남았어.”

    “다음에 해.”

    “주치의 말 좀 들어.”

    정신의 말에도 자혁은 어느새 상담실 문 앞에 서서 뒤돌아보았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 걱정되는 게 나야? 한다연이야?”

    정신은 유치한 질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둘 다지.”

    정신의 대답을 듣고 난 자혁은 미련 없이 상담실을 나갔다.

    “저 자식이 진짜…….”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상담 기록지를 던지려던 정신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조금 전 자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 * *

    오전에 상담 때 정신이 했던 말이 마음에 내내 걸려서였을까?

    다연은 평소와 달리 녹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실수를 몇 번이나 했었다.

    “긴장 풀어. 처음 하는 거 아니잖아. 그동안 했던 거처럼만 해. 잘해왔잖아.”

    지혜가 격려해주어도 다연은 몇 번이나 실수를 연발했다.

    “원래 계획은 강의 세 개 녹화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 오늘 두 개만 하자.”

    “미안해요. 선배.”

    “이상하게 말이 꼬이는 날 있어. 네가 방송이 전문인 것도 아니잖아.”

    지혜는 긴장한 다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려주었다.

    무사히 강의 녹화를 마치고 지혜는 다연에게 차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번 그림이요.”

    다연은 며칠 동안 그린 그림을 지혜에게 주었다.

    “너 한국에 있으니까 너무 좋다. 그린 그림을 실시간으로 받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때요?”

    지혜는 다연의 그림을 보고 양손을 흔들며 격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이 등대 그림 완전 좋아. 정말 설레어. 남편이랑 여행 갔었어?”

    “여행은 아니고요.”

    “그럼?”

    다연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지혜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말을 못 하고 눈치만 봐?”

    “선배 한 번씩 정말 귀신 같아요.”

    다연의 말에 지혜가 피식 웃었다.

    “넌, 좀 거울 같은 면이 있거든.”

    거울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다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상대방이 널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똑같아지거든.”

    다연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를테면 나처럼 솔직한 사람 앞에서는 너도 솔직해져. 뾰족한 사람 앞에서는 뾰족해지고. 그러니 솔직한 내 앞에서 뭘 숨길 생각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혜의 말에 다연은 김이 샜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쓰는 게 아닌가?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에요?”

    “뭐야… 심리전에도 안 넘어오는 거 보니 도대체 뭘 감추고 싶은 거야?”

    지혜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다연은 문득, 한 사람에게는 솔직해지라는 정신의 말이 떠올랐다.

    자혁과 여행을 가던 출장에 따라가던 숨길 일은 아닌데 지혜에게까지 너무 벽을 세우는 거 같았다.

    다연은 최대한 무감한 척 말했다.

    “그 사람 출장 가는데 같이 갔었어요.”

    “모야? 이 분위기?”

    지혜의 반응은 즉각 나왔다.

    지혜는 다연의 그림을 손에 들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림은 바닷가 등대에서 키스하는 연인이었다.

    또 하나의 그림은 남녀가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지혜는 다연이 그린 ‘연인’의 다른 그림을 떠올려 보았다.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던 그림이 떠올랐다.

    “너…… 괜찮아진 거야?”

    지혜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다연은 바로 알아들었다.

    다연은 며칠 전 발진이 올라왔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다른 사람과는 발진이 올라오는데…… 한 사람은 괜찮기도 하고 안 괜찮기도 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다연은 자혁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날, 악수를 했는데 괜찮았어요. 이 병이 발병하고 난 후, 처음이었어요. 피부에 닿아도 괜찮았던 사람이요.”

    지혜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정말이야?”

    다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칠 방법도 곧 알게 되는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요.”

    다연의 대답에 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여자 있는 남자에게 발진이 올라오지 않았는지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다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거 같아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최악과 최선이 공존하다니 참 가혹하긴 하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속상한지 지혜는 씁쓸히 웃었다.

    “자주 스킨십해 봐. 그걸로 고쳐질지 모르잖아.”

    “바쁜 사람이잖아요. 얼굴 못 본 지 일주일도 넘었어요.”

    “아직도 출장 중이야?”

    “그런 건 아니고……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웬만해선 잠깐이라도 집에 들렀었는데 거제도에서 돌아온 이후 집에 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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