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6)

33화

일정이 여유롭다는 것은 말한 사람과 듣고 있는 사람의 기준이 많이 달랐다.

이 실장은 노트북을 보며 쉬지 않고 여기저기 통화하며 바빠 보였다.

통화 내용에서 다연은 자혁이 시간 단위로 누군가와 미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실장은 지시를 수행 중인 듯 다연과 함께 식사한 뒤에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다연은 리조트 산책로를 걸으며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워터 브러쉬에 물을 채우며 다연은 쓱쓱 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여행지 일러스트를 그리며 한국 여행지를 그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이 그려두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붓을 스치고 지나간 종이 위에는 ‘연인’ 시리즈에 들어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또 보네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다연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등대 앞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어머.”

“이 리조트에 묵어요?”

“네.”

여자는 다연이 그린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연인이네요. 아니, 부부라고 해야 하나?”

경쾌한 웃음소리에 다연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연이 계속되면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난 주미 에요. 외자고요.”

“한다연입니다.”

주미는 능숙하게 휠체어를 몰아 다연의 옆에 자리 잡고선 물었다.

“합석해도 되죠?”

“그럼요.”

자리 먼저 잡고 물어본 말이지만, 다연은 에너지 넘쳤던 어제의 만남을 떠올리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림 속 남편은 어디에 두고 혼자 있어요? 오늘도 커피 사러 갔어요?”

주미가 농담처럼 말했다.

“일하러 갔어요.”

팔레트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다연이 덧붙였다.

“출장인데 따라왔거든요.”

“한시도 떨어지기 싫을 만큼 좋은가보다.”

다연이 수줍게 웃으며 물감이 마른 그림을 챙겼다.

“남편 올 때까지 리조트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갇혀 있기에는 많이 호화로운 곳 같은데요.”

“하긴, 돈을 처발처발 하긴 했죠.”

“쿡.”

예상 못 한 표현에 다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편분이 웃는 모습에 반했나 보다. 환하게 웃으니까 훨씬 예뻐요.”

“네?”

“감정을 숨기는 거에 익숙한 사람 같아 보여서요. 내가 낯선 사람이긴 해도 잡아먹지 않아요. 안심하세요. 아, 이게 더 무서우려나? 하여튼 어깨에, 배에 힘 빼고 편히 있으라고요.”

겨우 두 번 만난, 그중 한 번은 5분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주미는 다연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어 눈이 슬쩍 커졌다.

“뭘 그리 놀라시나.”

주미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전망은 끝내주네.”

“오늘은 바쁜 일 없으신가 봐요.”

어제 힘들게 등대까지 와서 5분도 머물지 않았었다.

“거긴 지나가다 한번 가본 곳이고 여기가 목적지였으니까요. 여기에 10분 정도 있을 시간은 돼요.”

볼수록 활기찬 사람이었다.

“정말 10분만 있다가 가실 거예요?”

“다음 일정이 있거든요. 혹시 저 때문에 그림 못 그리고 있는 거예요? 다른 데 갈까요?”

한마디 물어봤을 뿐인데 주미한테서 말이 쏟아졌다.

“아, 아니에요. 그냥 여쭤본 거예요. 어제도 5분도 안 계셨잖아요. 힘들게 오셨을 텐데.”

“괜찮아요. 난 레이스를 즐기니까.”

주미는 휠체어 바퀴를 돌리는 척하며 웃어 보였다.

다연은 스케치북을 덮으려다 주미의 시선에 머뭇거렸다.

“아니긴, 숨겨도 소용없어요. 아까 다 봤어요.”

“아…….”

“어제 거기서 둘이 뽀뽀했다는 거 모른 척할게요. 뽀뽀가 아니라 키스 같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 자신도 모르게 날 서 있던 경계가 허물어졌다.

“주변에 감정 불능 인간들로 넘쳐나서 그런가?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니…… 보기 좋네요.”

“고맙습니다.”

“주변에 사랑에 빠진 사람을 못 봐서……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다연이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점이 좋아요? 어떻게 그 사람을 떠올리면 표정이 막 그렇게 예뻐지는 거예요?

아,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는 사람에는 저도 포함돼요.”

다연이 다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 좀 진지하거든요.”

진지하다는 사람을 두고 계속 웃을 수 없어 다연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혁이 떠올랐다.

오늘 자혁에 대해 다시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서류상 결혼이라 기간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과 달리 그는 모든 책임을 혼자서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생색 한 번 내지 않은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안아주고 싶은 거요.”

“쉽네요.”

“어쩌면요.”

다연은 엽서지에 그린 그림 중 하나를 골라 주미에게 건넸다.

“인연이라고 하셨으니까.”

주미는 그림을 받아들고 유심히 보았다.

“나름 예술 하는 사람인데도 그림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거나 그런 거 몰랐는데…… 마음이 차가워질 때 이 그림을 봐야겠어요. 따뜻해지네요. 고마워요.”

“과찬이세요.”

그림에 대한 평가를 직접 받는 것이 처음이라 느낌이 생소했다.

그림을 보는 주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다연은 그 진심이 고마웠다.

“10분 됐네요. 인연이면 나중에 또 보겠죠? 예쁜 사랑 오래오래 하세요.”

“조심히 가세요.”

주미는 올 때처럼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 * *

다연이 그림을 정리하고 있을 때 탁자 위로 컵이 놓였다.

고개를 들자 언제 들어왔는지 자혁이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그는 양손으로 탁자를 짚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종일 그림만 그린 건가?”

“아니요. 카페도 가고 산책도 했어요.”

커다란 손이 다연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누구 덕분에 일정이 여유로워서.”

그가 말한 여유와 다연이 생각한 여유에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같은 말을 어제 들었을 때와 오늘 들었을 때가 다른 것처럼.

“직원들이 좋아해.”

여유롭지 않은 일정은 직원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연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방해될까 봐 걱정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김 대리가 다음 출장 가는 곳도 당신이 좋아할 거래.”

한 번 맛본 여유로운 일정이 달콤했을 것이다. 다연이 보기에는 그것보다 열 배는 더 여유로워야 할 텐데.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다음 출장은 어디에요?”

“당분간 출장은 없어.”

그가 출장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 반가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연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올해는 꼭 필요한 출장 아니면 안 잡기로 했어.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 외에는 안 갈 거야.”

“나 데리고 가는 것도 싫어요?”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투덜거렸던 다연이 조금 속도를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연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하얀 피부에 파란 핏줄이 투명하게 보이는 안쪽에 느릿하면서 오랫동안 입술을 맞췄다.

숨결이 모두 느껴질 정도로 입술을 뗀 그가 나른한 목소리가 말했다.

“내가 피부 테스트하는 곳 한군데 더 알고 있어.”

그의 말 한마디에 긴장감이 올라갔다. 다연이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푸른색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자혁만 보였다.

“거기도 허락하면 출장 갈 때 데리고 갈게.”

그의 눈빛이 ‘어때?’ 하고 묻고 있었다.

다연이 생각하는 곳이 맞는다면 그가 말한 곳은 귀밑일 것이다.

그곳에 입술이 닿는 것은 피부 테스트를 넘어 성적인 의미가 더 컸다.

다연을 바라보는 자혁의 눈빛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어이없게도 그 떨림이 유혹적이었다.

다연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볼을 스치며 겹쳐지는 순간 다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밑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막힌 것도 아니건만 다연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앉아 있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랫배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열기가 강렬해서 소용없었다.

찍어 누르듯 입술을 묻은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거친 숨소리가 고막이 아닌 전신의 세포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어떤 짐승이 냄새를 맡기 위해 내는 소리로 착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소리였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찌릿한 감각에 다연은 자혁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아.”

탄성 섞인 숨이 짧게 다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 실장이 지라시를 보여주었을 때 다연은 자혁을 안아주고 싶었다.

계약 결혼이라는 것이 서로 필요충분조건을 따지는, 말 그대로 계약이었다.

계약에 대한 책임감을 혼자서 감내해온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래서 자혁이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바랐다.

“오늘처럼 당신을 기다린 적이 없던 거 같아요.”

“기다렸다니 기분이 좋네. 이유는?”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상체를 조금 더 숙여 주었다.

“사양 말고 안아봐.”

오만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다연은 양팔을 벌려 자혁을 안았다.

“조금 더 세게.”

다연은 힘을 주어 꼭 안았다.

그가 다연을 안아 들었다. 허공에 뜬 다연의 다리가 자혁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서 이마를 맞대고 마주 보았다.

“테스트 결과는 아직인가?”

돌려서 하는 말이어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짜릿했지만, 발진과는 달랐다.

“괜찮은 거 같아요.”

보기 좋게 휘어진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마치 선전포고 같았다.

이내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들숨과 날숨이 뜨겁게 섞여들었다.

등 뒤로 침대 시트가 닿았다. 다연이 눈을 떠 자혁을 오려다 보았다.

입술을 떼고 커다란 손이 다연의 머리를 쓸어넘긴 뒤 뺨을 감쌌다. 다연도 자혁이 지금 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어쩌려고.”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예쁜 짓을 할까?”

당신이 좋아서.

매일 다정하게 통화하는 미미에게 미안해서 멈출까도 했지만.

당신이 자꾸 더 좋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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