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여린 살에 닿은 감촉에 솜털이 곧추서는 것 같아 다연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괜찮으면 입술에 해도 될 것 같아서.”
“그러려고 테스트하는 거예요?”
“입 맞추고 안고 뒹굴거리고 싶다고 말한 거 같은데.”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이었다.
누가 들을까 봐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힐끔거렸다.
“여기 밖이에요. 그런 말은 좀…….”
“우리밖에 없어.”
“그래도요. 바다가 들어요.”
“리조트 안에 들어가서는 해도 된다는 말이네.”
누가 이 남자 좀 말려줘요.
“구자혁 씨!”
자혁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연의 눈이 커졌다.
“테스트한 곳이 괜찮기에.”
다연이 입술을 말아 물고선 눈을 깜박였다.
“정말 우리밖에 없는데?”
깜박.
“입술도 괜찮은 거 같고.”
눈을 깜박이기도 전에 몸이 돌려지고 그의 입술이 닿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은 입술이 따뜻해지더니 점점 뜨거워졌다.
서두르지 않는 느릿한 키스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장소라고 하더니 리조트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도라면 산책로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올 게 아니라 곧장 올 걸 후회되었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아주 아쉬웠다.
“이 정도 풍경이라면 여기 와서 산책할 걸 그랬어요.”
“내가 고른 곳이라니까.”
“아, 네. 그러시겠죠.”
다연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모으고선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각각 독립된 건물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누구의 방해도 없었다. 탁 트인 시야에 어둠이 내린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이곳에 있는 풀장에서 수영한다면 꼭 바다에서 수영하는 기분일 거 같았다.
언제 왔는지 자혁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연과 나란히 섰다.
“침실 하나라고 분명히 말했었어.”
“잠만 잘 거잖아요, 난 괜찮아요.”
다연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나 일하는 동안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걱정하지 말아요. 혼자서도 잘 놀고 잘 먹어요. 당신이랑 있는 것보다 혼자가 더 익숙하고요.”
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연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나 먼저 씻을게요.”
조금 전 자신이 한 거짓말을 그가 알아차릴까 봐 다연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왔다.
자혁의 굳어진 얼굴이 떠올랐지만, 다연은 머리를 살며시 털어버리고 물을 틀었다.
자혁은 늦은 밤 침실로 들어왔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눕는 그를 다연은 잠든 척하는 것으로 외면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연이 몸을 뒤척이려 고민하는 사이 그의 팔이 목과 배게 사이로 쑥 밀고 들어왔다.
마치 인형을 안듯이 다연을 끌어안고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자혁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을 때 다연이 눈을 살며시 떴다.
“걸렸어.”
너무 놀라 다연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숨 쉬어.”
그의 말에 다연이 티 나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모른 척 좀 해주지…….”
“맞은 사람은 두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잠들기 힘들다더니. 양심은 있네.”
“내가 언제 때렸다고…….”
그가 손으로 다연의 콧등을 톡 하고 쳤다.
“잠은 왜 못 자? 말로 때린 것도 때린 거지.”
“잠자리가 바뀌어서요.”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선 다연은 제 입술을 슬며시 말아 물었다.
“피곤해, 자자.”
그가 다연을 당겨 안고 눈을 감았다.
너무 가까워서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잠들기 어려울 거 같았는데 다연은 거짓말처럼 잠에 빠졌다.
* * *
장소만 집이 아닌 리조트로 바뀌었지, 똑같은 아침이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는 태블릿을, 다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갈 시간인지 그가 태블릿을 챙기며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면 우선 이 실장한테 전화하면 돼. 이 실장은 리조트 안에 있으니까.”
“어린아이 아니라니까요.”
자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나갔다.
집이었다면 잠시 뒤에 출근하는 장 여사가 날씨 이야기를 하며 들어왔겠지만, 리조트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다연은 리조트 안내 책자를 펼쳤다. 산책로와 식당을 확인하고 다연은 파우치를 챙겨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작은 카페가 나왔다.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나무 사이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셨습니까.”
이 실장이 절제 있는 걸음으로 다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들고 온 것을 보니 일하러 나온 것으로 보였다.
“이 실장님 안녕하셨어요?”
“저야 보시다시피 똑같습니다.”
이 실장은 회사와 집에서 볼 때보다 조금 느슨해진 분위기였다.
“여기 앉으세요.”
“여기 편히 계세요. 저는 저쪽에 앉겠습니다.”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게 어색해서요.”
이 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럼, 잠시 앉겠습니다.”
다연은 이 실장을 만난 게 반가웠다.
“저…… 이 실장님께 여쭤볼 말이 있었어요.”
이 실장은 비서 실장답게 다연의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 진성 호텔에서 일이 좀 있었어요.”
“보고 받았습니다.”
그가 모를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이 맞았다.
“거기서 지라시에 돌던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요.”
이 실장은 태연한 척했지만, 조금 난감한 눈빛이었다.
“구자혁 씨와 저에 관한 내용을 알고 싶어요.”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고 있습니다. 굳이 아실 필요가…….”
“알아야겠어요.”
다연이 이 실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 이야기잖아요. 나중에 그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대응이라도 할 수 있도록 알려주세요.”
다연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자혁에게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가 말해줄 리 없었다.
다연은 자연스럽게 이 실장을 떠올렸다.
“알고 나면 많이 속상하실 겁니다.”
“그래도 알아야겠어요. 자혁 씨에 관한 소문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도 알려주시고요.”
이 실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노트북을 펼쳤다.
전에 자혁에게 보고했던 파일을 열어 다연에게 보여 주었다.
“사장님께 보고했던 내용입니다.”
다연은 노트북 화면 속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얼마 전 아내가 유학에서 돌아온 A 기업 사장 부부. 알고 보니 끼리끼리 만남이었다. 성불구 남편과 타인의 손이 닿으면 발진이 올라오는 피부병 아내. 세상에 이보다 더 천생연분 커플은 없을 듯.]
[세상에 이런 일이. 돌아가신 부친의 전 재산을 들고 도주한 H 산업 차녀. 알고 보니 A 기업 안주인으로 그동안 외국에 숨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든든한 뒷배 덕분에 신분 세탁에는 성공했지만, 목에 있는 빨간색 나비 모양 점 때문에 신분이 들통 났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에 대해 돌고 있다는 말을 막상 읽고 나니 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장님에 관해서 세상에 도는 소문은 모두 거짓입니다.”
“조현병이니… 숨겨 둔 여자에 관한 것도요?”
“네.”
이 실장의 간결한 대답에 다연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런 소문……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군요.”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이 실장의 행동만으로 이미 충분한 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연은 자혁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려 보았다.
“구자혁 씨가 말한 위장 결혼 기사 찾아봤어요. 단 한 건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 기사를 그냥 나가게 뒀을 거 같아?”
말로 들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불쑥 다가왔다.
그가 이 결혼의 모든 수고스러움을 혼자 감내하고 있었다는 것.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난 뒤에 따라붙을 무수한 말들이 있을 거라는 걸.
한강 기업처럼 재벌은 아니었어도 다연은 일성 건설 딸이었다.
부친 덕분에 익숙한 세상이지만, 이렇게 지라시에 오르내릴 정도로 주목받는 기업은 아니었다.
다연은 자혁의 세상에 있음에도 이방인처럼 낯설었다.
“처음이라 충격이 크실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이 실장이 건네는 위로에도 다연은 억지로라도 괜찮다며 웃어줄 수 없었다.
왜 이런 소문을 퍼트리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구자혁 씨는 왜 매번 이런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 거예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응하기보다는 잠재우는 쪽이 훨씬 편합니다.”
이 실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유가…… 경영권이나 주식, 이런 것들과 연관되어 있겠군요.”
이 실장은 이번에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장님께는 오늘 일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간결한 대답 뒤에 이 실장은 마침 벨이 울리는 휴대폰을 가지고 일어났다.
그가 다연과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는 사이 다연은 노트북 화면을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연은 자신에 관한 내용이 있는 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다.
부친의 전 재산을 들고 도망갔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세상은 믿고 있을 것이다. 주연이 그랬듯이.
처음 읽었을 때 이런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어쩌면 주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들었다.
부친의 발인 이후 다연이 도망치듯 한국을 떠난 이유가 새엄마와 주연의 말도 안 되는 압박이 있었다.
서류상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그들은 다연에게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부친의 사업에 관한 위임장에 사인만 해주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진성 호텔에서 다시 만난 주연은 여전히 다연이 빼돌린 재산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간 거처럼 구는 태도도 그때와 같았다.
주연이 혹은 의도가 있는 어떤 사람이 이런 소문을 쉬지 않고 퍼트리면 자혁은 계속 잠재워 줄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다연이 부인하며 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이 일도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다연은 통화를 마치고 다가온 이 실장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실장님, 저 부탁이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새로운 이야기가 돌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이 실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