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정신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닫혔다.
“한다연이 울고 간 날부터 형…… 계속 신경 쓰고 있었잖아.”
정신은 급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트레이닝 파트너로만 대해야지. 너 지금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정신이 다연을 트레이닝 파트너가 아닌 ‘여자’라고 말했다. 자혁의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지금이라도 놔줘. 더 상처받기 전에.”
“왜 한다연 생각만 하는 거야? 나도 형 환자잖아.”
“누가 더 상처받을지 보이니까!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멈춰.”
왜냐면, 한다연은 구자혁을 믿고 있으니까. 그것도 많이.
그리고 좋아하고 있으니까.
정신은 두 사람의 어쩌다 이성적으로 끌리는 사이가 되었는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자 쪽은 몰라도 자신이 아는 구자혁이라면 여자에게 마음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은 자신이 자혁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금 형 말은 책임질 거면 끝까지 가도 된다는 말이네.”
“구자혁!”
“안 그래도 답이 안 나와서 미칠 거 같았는데.”
상담은 하지도 않았는데 자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답을 주네.”
“너 설마…….”
자혁은 그대로 상담실 문을 열고 나갔다.
* *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혼자 설명하며 그림 시범을 보이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연은 여전히 혼자 말하는 게 어려웠다.
반응을 모르니 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게 점점 어려웠다. 말 그대로 혼자 떠들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졌다.
“오늘도 고생했어.”
지혜는 녹화된 영상이 잘 저장됐는지 확인하며 다연에게 말했다. 그리곤 노트북을 다연에게 쓱 밀어주었다.
“지난번 촬영한 거 편집 마쳤으니까 확인해봐.”
“네.”
다연은 저장된 영상을 재생한 뒤 강의 노트와 함께 확인했다.
“꼼꼼하게도 본다.”
“수업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실수한 것도 없더라. 네 강의 노트랑 비교하며 편집하는데 깜짝 놀랐어. 어쩜 이렇게 잘해?”
지혜는 다연의 노트를 가져가 넘겨보며 혀를 내둘렀다.
“나쁜 놈은 누구인데 이렇게 열거해 놓으셨나?”
영상을 보고 있던 다연이 깜짝 놀라 노트를 가져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부분 그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걸 모르나?”
다연의 지혜의 탐색하는 듯한 눈을 애써 피하며 노트를 덮었다.
“부부싸움 하셨나 보네.”
그 사람과는 부부싸움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서류상으로만 부부이지 진짜 부부가 아니니까.
“어마무시한 남편이 거기에 적힌 나쁜 놈인가 본데……. 싸웠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아까도 말했지? 아니라고 해도 아닌 게 아니라고.”
지혜는 무심한 척 커피를 마시며 다연의 반응을 세세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달달함이 넘쳐서 사랑싸움이라도 하셨나?”
“선배!”
다연이 발끈하는 모습에 지혜가 피식 웃었다.
늘 잔잔한 호수 같은 다연이 지금처럼 격하게 반응하는 게 반가웠다.
“요즘 우리 팀 막내가 목하 열애 중이신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더라.”
갑자기 팀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뜬금없어서 다연은 시선을 들어 지혜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재고 따지는지.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지치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싶더라고.”
다연은 지혜의 눈치를 슬쩍 보며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지치는데……. 그 연애가 오래갈까 싶더라.”
“연애하는 당사자들 문제잖아요.”
메마른 듯한 다연의 말에 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고 따지며 연애하는 커플을 보니까. 그냥 좋아서 물불 안 가리고 막 덤벼드는 사랑을 한 번쯤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다연의 지혜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좋아서 막 덤비는 사랑은 딱 한 번이었다고 했다.
“아침에 보고 점심에 보고… 종일 붙어 있다 헤어져도 뒤돌아서면 또 보고 싶어서 달려가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미쳤던 거 같아.”
동조의 의미로 다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쳐 있다가도 사랑이 끝나는 건 딱 한순간이더라. 정말 신기하지 않니?”
“후회 안 해요?”
지혜가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알기에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열렬히 했던 사랑이 끝났는데 작은 후회도 없었는지.
“후회 없이 사랑해서 그런가. 너도 알다시피 헤어지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았어.”
옆에서 보았던 사람도 허무할 정도로 지혜의 이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후회를 남길 거면 뭐하러 연애를 하니?”
지혜의 말에 다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일상에서도 후회가 남는 법인데 지나간 연애에 후회가 없다는 말이 참 부러웠다.
“지난번에 길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다음 말이 궁금해 다연의 시선이 지혜에게 고정되었다.
“어쩜 그렇게 편하니.”
“그게…… 돼요?”
지혜는 다이어리에 꽂힌 만년필을 손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그뿐인 줄 아니? 이거 그 사람이 선물해준 거야. 여기 내 이니셜 보이지?”
다연은 지혜의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은색 펜 끝에 지혜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이걸 몇 년째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더라고, 내가. 후회가 없어서 그런지 확실히 마음이 편해.”
지혜는 만년필에 새겨진 이니셜을 검지로 한 번 문질러 보았다.
“다른 사람과 했던 연애에서는 작은 열쇠고리조차 보기 싫어서 돌려주거나 버렸는데……. 참 이상해.”
해맑은 미소를 짓는 지혜를 보며 다연도 덩달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면서도 다연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며칠째 얼굴조차 보지 못한 자혁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마주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기도 했다.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운했고, 그가 늦은 귀가를 하며 사다 놓은 간식을 보며 아이처럼 좋았다.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던 적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 평온한 직선을 유지했었는데 구자혁을 만난 이후 너울성 파도처럼 예상 못 한 파도가 그려졌다.
그를 만난 이후 후회하는 일이 늘어났다.
심지어 한국에 온 것도 후회되었다.
이러려고 새엄마와 주연에게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는데.
다연은 팔레트와 스케치북을 들고 방을 나왔다. 식탁 위에 도구를 펼쳐두고 다연은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혜가 ‘연인’이라고 제목을 붙인 그림 중 하나를 그렸다.
블랙, 그레이, 화이트의 무채색 계열의 집 안에 체크무늬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 마주 앉은 연인의 모습이었다.
* * *
며칠 동안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예정되었던 일정이 아니라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틀어진 일정이었다.
중국과 일본 출장을 하루에 마치는 걸로 조정하다 보니 비서실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오전까지는 비워 두었습니다. 오후 세 시에 댁에서 곧장 거제도로 출발할 수 있도록 전자 결재로 처리했습니다.”
출장을 다녀왔는데 또 출장이었다.
정신을 만나고 와서 아직 다연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오늘도 자고 있을 텐데 내일 오전이라도 얼굴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쩐 일인지 주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주방으로 가 보니 다연이 식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팽팽하기 당겨 쥐기만 했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다연의 손에서 떨어진 붓을 한쪽으로 밀어두자 그녀가 그린 그림이 보였다.
지난번 보았던 풍경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그린 거 같았다.
다른 그림이 있으면 더 보고 싶을 만큼 궁금했다.
브리프 케이스를 내려놓고 자혁은 잠든 다연을 안아 들었다. 잠에 취한 채 다연이 웅얼거렸다.
“미안……해요.”
사과라면 자신이 해야 했다. 그날 밤 다연의 드레스 단추를 풀어주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과 본능이 격렬하게 싸우던 중에 그나마 다연의 향기로부터 안전한 자신의 방에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미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려놓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했는데 문을 여니 다연이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으로 베개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본능이 날뛰었다.
약을 먹고 겨우 발진이 가라앉은 사람에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들어오겠다는 다연을 허락할 수 없었다.
다연을 침대에 눕히고 비도 오지 않는데 뻔뻔하게 그 옆에 누웠다.
제 품에 파고드는 다연을 안고선 양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도망가지만 마.”
* * *
깜박깜박.
다연은 눈을 깜박여 보았다.
눈을 뜨기 전 짙은 우드 향과 자신을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을 느끼곤 그가 침대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정말 그가 맞는지 다연은 확인했다.
그림을 그리며 자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이 집에 온 이후 다연은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혁의 잠을 자신이 다 빼앗아 온 것도 아닐 텐데.
다연은 곤히 잠든 자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깨우는 방법치곤 좀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들어?”
잠에 취한 듯 가라앉은 자혁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다연은 고개를 들어 자혁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깼어요?”
“깨우려고 일부러 그런 줄 알았지.”
며칠 동안 일이 힘들었는지 그의 얼굴은 많이 까칠해 보였다.
다연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자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이에요.”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많이…… 바빴어요?”
“한국, 중국, 일본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지.”
어쩐지 그가 사놓은 거 같은 간식거리가 다국적이라 의아했었다.
그가 얼마나 바빴을지 알 거 같았다. 그렇게 바쁜데도 그는 늦게라도 집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꼭 집에 들렀다 가야 하는 게 법으로 정해진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 만난 날 다연에게 말했던 한강 그룹 사옥 옆에 있는 그의 호텔 전용 룸으로 가도 될 텐데.
“바쁜 거 이제 다 끝났어요?”
“아니.”
그가 눈을 떠 다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을 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여기서 얼마나 더 바빠야 하는지.
아직 경영승계가 완벽히 마무리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날 무렵이면 그것도 마무리되겠지.
“며칠 사이 살이 빠진 건가?”
굉장히 세심한 시선이었다.
“고뇌의 시간이 있었죠.”
그의 미간이 슬쩍 일그러졌다.
“당신 말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려고요.”
그의 짙은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연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침이었고 그가 출근해야 한다는 계산도 했는데 그의 단단한 팔이 다연을 끌어당겨 안았다.
“출근해야죠.”
“오후에 나가.”
그렇다고 해도 계속 이렇게 침대에 있는 건 불편했다. 다연이 몸을 뒤로 뺄수록 그의 팔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왜 이러는데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려고.”
다연이 손으로 그의 입을 가렸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며 다연이 슬며시 웃었다.
“당분간 밀접 접촉은 자제해줬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