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연이 풀어진 단추를 붙잡고 뒤돌아서려 하자 그가 다시 한번 어깨를 꽉 잡았다.
“이것들 혼자 풀 수 있어?”
하필 오늘 입은 옷은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단추가 촘촘히 있었다.
입을 때도 몇 개는 다연이 채웠지만, 나머지는 샵의 실장이 대부분 채워주었다.
“하아…….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어요.”
“당신 건들 생각 없어.”
그는 묵묵히 단추만 툭툭 풀었다.
얇은 천을 두고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가 일정하게 내뱉는 작은 숨결이 닿을 때마다 솜털이 서는 것 같았다.
다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의 옷에 있는 단추를 푸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듯 그는 능숙했다.
매번 서툴기만 한 자신과 비교되었다.
그는 다연의 손이 닿는 중간까지만 단추를 풀고선 다시 문을 닫았다. 단추를 풀어주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사심을 없는 거 같았다.
다연은 뒤늦게 돌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의 얼굴이 어땠을까.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긴장했던 자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겠지.
자신도 아무렇지 않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쯤 하는 거였는데.
오늘의 모든 순간이 후회되었다.
그의 인기척이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참았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다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싫다.”
내가.
다연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연은 게스트룸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지라시로 돌던 게 사실이라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천생연분이지. 스킨십하면 안 되는 여자와 못하는 남자.”
머리를 말리면서도, 잠옷을 입으면서도 다연은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떠올랐다.
지라시의 내용.
거기에는 자신과 자혁에 관한 내용이 제법 자세히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혁에 관한 것이면 자신도 들은 바가 있는 내용일 터.
자신도 그것 때문에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연을 찾으러 온 날, 그의 리조트에서 분명히 느꼈다. 짙은 키스를 나누는 중에 제 엉덩이를 찌르던 감각을.
그런데도 자혁이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과 매일 통화만 하는 미미의 존재.
“설마…… 취향이…… 독특한가?”
한 번 뻗어 나간 생각의 회로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듯 다연은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를 몇 번을 털어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구자혁.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도 다연은 자혁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다연은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그림 도구를 펼쳤지만, 빈 종이에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결국 다연은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다. 자혁에게 가서 사과해야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다연은 베개를 안고 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방문이 가까워질수록 말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통화할 사람은 분명 ‘미미’ 일 것이다.
자신 앞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미미와 통화 자체를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괜찮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다연은 괜히 심술이 올라왔다. 그의 평화를 깨고 싶었다.
다연은 주먹을 쥐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한밤중이었고, 작은 소음도 없는 집이라 노크 소리는 아래층까지 울렸다.
문이 열리고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자혁이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서 있었다.
“한다연.”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방에…… 들어가면 안 돼요?”
“안 돼.”
어렵게 물어봤는데 그는 너무나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다연의 방에 자유롭게 들어왔었다. 그런데 왜 다연에게는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는지 모르겠다.
“약속했던 게 생각나서요.”
자혁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거라면 신경 쓰지 말고, 내려가.”
괜찮다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말라니.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옆에 있어 주기로 했으니까 들어갈게요.”
무슨 오기였는지 다연은 꼭 그의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여긴, 내 공간이야.”
“당신은…….”
내 방에 들어오잖아요.
차마 내뱉지 못하고 다연은 말을 삼켰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차가웠다. 그리고 그 말을 마저 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집 어느 곳에도 다연의 공간은 없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곳은 허용해도 자신의 공간만큼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의 뜻을 알게 되자 다연은 더는 뻔뻔하게 버틸 수 없었다.
베개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 생각이 짧았어요.”
다연은 몸을 돌려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이 잠깐 머무는 방에 들어간 다연은 문을 닫고는 기댄 채 주저앉았다.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결국 다연은 며칠 동안 자혁을 피해 다녔다. 다행히도 그의 귀가는 늦었고, 다연의 방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상담이 있는 날, 다연은 정신의 앞에 앉아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바로 사과할 걸 후회해요.”
다연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는 말도 바로 해야 했고요.”
다연은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한테 사과하세요. 미루다 보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사과입니다.”
정신의 말에 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사람 방으로 올라갔는데…….”
“그랬는데요?”
다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거부했어요.”
다연은 그날의 모든 것이 아직도 후회되었다.
“사과도 못 하고 거부만 당하고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혹시, 울었습니까?”
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해요. 엄마가 돌아가신 날부터 눈물이 마른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요?”
“그 사람 앞에서 몇 년 만에 눈물이 터져 나오더니,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와요.”
다연은 고개를 들어 정신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나 봐요. 안전하다는 믿음. 그래서 한편으로는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의지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까?”
다연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지 못한 이유를 다연은 마주했다.
정신의 말대로 두려움이었다.
그에게는 미미가 있었고, 계약이 끝나면 다연과는 이혼할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가는 그에게 마음을 많이 줄 테니까.
다연은 오늘도 그 마음을 외면하고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연이 서둘러 얼어서는 바람에 목에 둘렀던 스카프가 풀어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잡아 대충 두르고 다연은 인사를 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다연의 목에 있는 점을 보고 정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색과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신은 그 점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자혁의 아내.
한다연이 구자혁의 아내였다니.
정신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그거 하나로 모두 이해되었다. 왜 몰라봤을까!
잠시 뒤면 자혁의 상담 시간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이 용케도 마주치지 않았었다.
“하아.”
정신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병원 로비를 지나갈 때 수많은 표정 없는 사람들 사이로 다연을 본 거 같았다.
짧은 순간이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자혁에게 선명한 표정이 보이는 사람은 다연이 유일했다.
다연이 맞는지, 맞는다면 한강병원에 왜 왔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이 실장님.”
“네, 사장님.”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다연의 어디를 가는지 일일이 보고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먼 거리에서 지켜볼 사람을 두긴 했지만, 크게 보고할 만한 일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놓쳤습니다.”
자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담하러 온 날은 예민해지기 때문에 그는 말을 아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실장이라면 상담이 끝나면 즉각 보고 할 것이다.
자혁은 정신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왔어.”
편안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정신이 아무 말이 없었다.
정신은 책상 위에 두 개의 서류를 꺼내 놓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나는 자혁의 것이고, 하나는 지난번에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연락도 없이 안 왔다고 했던 환자였던가?
“오늘도 연락 없이 안 왔어?”
정신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내 상담 시간인데 그 환자 거 꺼내 놓고 한숨 쉬잖아.”
“자혁아.”
정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한다연.”
자혁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형이 한다연을 어떻게 알아?”
“하아, 내 환자야.”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연의 짧은 외출이 이곳, 병원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자신과 같은 정신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자혁을 맡은 정신의 환자로 왔었다면 어떤 상담을 했을까?
“지난번 그 기자. 네가 타깃인 거 같다.”
“무슨 말이야?”
“내가 맡은 환자를 콕 집어서 말했다고 했잖아. 그게…….”
“한다연이 가진 증상에 관해 물어봤겠군.”
정신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남편은 모른다고 했었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정신은 검지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자혁의 앞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남편이 터치하는 건 괜찮다고 했었어.”
“안 그럴 때도 있었어. 내가 만진 곳에 발진이 올라온 적이 있었으니까.”
“하아.”
정신이 한숨을 내쉬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혁이 그동안 느낀 바로는 정신이 보기 드물게 사심을 품고 대한 환자가 다연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경계의 날이 섰다.
“계약이 끝나면 이혼할 사람한테 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트레이닝 파트너이자, 아내잖아.”
“구자혁!”
“형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건데? 형이 부르라고 해서 부른 거고. 트레이닝 파트너로 이용하자고 한 것도 형이야.”
모두 사실이라 정신은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혁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정신에게 모두 이야기해 줬어야 할 일이었다.
“마음속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조금도 내보이지 않아서 그게 그런 몹쓸 병을 가지게 된 사람이야. 그걸 말했어야지.”
“말했다고 대답이 달라졌을까?”
“당연하지.”
“아니, 알았어도 형은 한다연 불러들이라고 했을 거야. 그때와 지금, 한다연을 보는 형이 달라졌으니까.”
“무슨 소리야?”
“형은 지금 한다연을 환자가 아닌 여자로 보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