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눈앞에 불꽃이 일더니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아픔보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만 같은 가려움이 다연을 더 괴롭혔다.
“이렇게 만나야 세상이 공평하지.”
다시 볼 일 없을 거로 생각했던 새엄마의 딸.
이제는 서류상으로도 가족이 아닌 주연이 서 있었다.
손버릇 안 좋은 건 여전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도.
“대단한 남편을 두셨더라.”
“……!!”
“또박또박 말대꾸 잘도 하더니. 잘 못 한 게 있으니 너도 말 한마디 못 하는구나.”
“그런 거 없어요.”
-짝!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얼굴이 돌아갔다. 한 번은 넘어가 줄 수 있어도 두 번은 아니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네, 몰라요. 그리고 그쪽한테 맞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주연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이미 얼굴이 엉망이었다.
내리치려는 주연의 손목을 잡았다.
“도대체 왜 이래요!”
“왜긴! 빼돌린 재산 내놔!”
“그런 거 없다고 몇 번을 말해요!”
“그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네가 아니면 누구 짓이냐고!”
부친이 돌아가신 날부터 주연과 새엄마에게 시달렸던 내용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집도 어머니 명의로 넘어가 있었어요. 난 집안 재산이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른다고요.”
주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이만 놓지? 그 불치병 그대로잖아, 너.”
주연은 거칠게 다연의 손을 뿌리쳤다.
“남편 믿고 까부는 거 같은데, 너! 내가 야금야금 피 말려 죽일 거야.”
“억지 부려도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있을지 없을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지.”
여전히 다연이 부친의 재산을 빼돌렸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차라리 뭐라도 있었다면 넘겨버리고 편히 살았을 것이다.
“그때 너도 같이 죽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아.”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도 주연은 다연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내가 아버지랑 같이 죽지 않은 게 그렇게 아쉬워요?”
“아니?”
다연의 이마가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빗속 사고에서 너도 같이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아빠랑 우리 힘들게만 하더니…… .”
주연은 빚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오른손을 내보이면 말했다.
“얼른 내놔.”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계속 이렇게 의심받는 것은 억울했다.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방을 잘못 들어온 것 같습니다.”
오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자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연 때문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자혁이 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됐고! 나가.”
자혁의 매서운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제가 누구인 줄 알고.”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 이 실장!”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다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이렇게 무서운 눈빛의 구자혁은 처음이었다.
이어서 들어온 이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 보안을 어떻게 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면 지금 구자혁의 눈빛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았다.
다연은 지금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신경 쓸 수 없었다.
“처리하세요.”
“이것 보세요. 처리라뇨.”
허락 없이 들어와 놓고도 주연은 당당했다.
“지금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안 나가면요.”
“마석 건설 돈줄 막는 데 몇 분이나 걸리는지 보고 싶으면 버텨보든가.”
주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실장은 주연의 옆에 와서 섰다.
“나가시죠. 더 소란을 피우면 더는 정중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발진이 올라와 엉망이 된 다연의 얼굴을 노려본 후 주연은 이 실장과 함께 게스트룸을 나갔다.
잠시 뒤 돌아온 자혁이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연의 심장에 큰 파열음이 들렸다.
“이, 이건…….”
그의 손에는 다연이 차에 두었던 클러치와 생수를 들고 있었다.
다연이 눈을 크게 뜨고 자혁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맞추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벽 사이로 파우더룸의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자기들 봤어?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손이 빨개져서 깜짝 놀랐어!”
조금 전 다연의 반지가 예쁘다며 손을 잡았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라시로 돌던 게 사실이라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다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무엇일지 예상되어 두려웠다.
“그런데 구 사장이랑 손잡고 다닐 때는 괜찮던데 이상하지 않아?”
“오늘 하필 그런 드레스를 입고 올 게 뭐람. 날도 더워지는데 말이야.”
여자들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우리 모임에 한번 나오라고 슬쩍 물어볼까?”
“이제 곧 여름이잖아. 다음에 만날 때 몇 번 더 만져보면 알게 되겠지. 누가 믿겠어. 세상에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니 보고도 안 믿겨.”
다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혁이 클러치를 열어 약을 꺼냈다. 그리고 다연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이 남자…… 알고 있었구나.’
다연은 고개를 들어 자혁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구 사장 보기 좋은 조각품이지, 남자로 쓸모없는데 어느 여자가 붙어 있나 했더니 끼리끼리 만났네.”
“겉모습만 그림이면 뭐하니. 둘 다 정상이 아닌데.”
요란한 웃음소리가 귀를 날카롭게 찢어 놓는 거 같았다.
“천생연분이지. 스킨십하면 안 되는 여자와 못하는 남자.”
“그런데 목에 있는 점은 어떻게 확인해야 해? 구 사장 와이프랑 재산 들고 튄 여자랑 동일 인물인 걸 확인하려면 그걸 확인해야 하잖아.”
신나게 떠들어대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커다란 손이 다연의 양쪽 귀를 막았다. 시선을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의 귀를 막고 있는 손은 자혁밖에 없었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자선행사에서 악수를 청하던 친구의 손을 쳐냈던 것도 샵에서 실장이 다연을 챙길 때마다 매번 장갑을 끼고 있었던 이유도.
그의 집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일부러 다연에게 악수를 했던 거였다.
잠깐이지만 손목을 잡은 것도.
지난번 키스 후 괜찮냐고 물은 것도 모두 다 같은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연이 발진이 올라오는지 직접 확인해보려 한 것이었다.
자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작게 벌어진 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왔다.
-꿀꺽.
넘기지 못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약이 물과 함께 넘어갔다.
자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다연의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뜨거웠다. 다시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열기가 밀고 들어왔다. 어르고 달래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괴로운 기억을 지우는 인형의 키스처럼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던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눈물을 멎게 하는 정령의 키스처럼 다연의 눈물이 멈추었다.
귀를 가렸던 손이 다연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다연의 단단하게 채워진 문을 열었다.
버리지 못해서 고집스럽게 담고 있던 기억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 * *
다연은 자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쓰러질 듯 천천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약을 먹어서 집으로 오는 동안 발진은 가라앉았지만, 다연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다연에게 그는 물을 가져다주었다.
“마셔.”
다연은 말없이 물이 든 컵을 받아서 마셨다. 그녀의 기분처럼 몸이 축축 늘어졌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오늘은 그냥 자.”
자혁이 재킷을 벗어 소파에 툭 던져 놓았다.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고 나서야 소매에 있는 단추마저 풀어버렸다. 물 흐르듯 모든 동작이 자연스러운 그는 여전히 선이 굵은 그림 같았다.
엉망진창인 다연과 달리 그는 빈틈조차 없었다.
그게 왜 이렇게 약이 오르는지 모르겠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그에게 화가 났다.
“언제…… 알았어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처받은 못난 자존심에 그거라도 확인하고 싶은 거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깊은 눈으로 다연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말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다연은 지난번 태안에서 듣지 못한 그의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이런 결혼을 하고도 뒤탈이 없을 만큼 큰 결점이 있는 사람이니까.
“나와 결혼 한 이유가 그럼…….”
“나에게 흠이 있어서 결혼했다고 했었지, 아마.”
그의 조부가 내내 했던 말이었다. 흠이 있다고 했던 것은.
“그건 할아버지께서…….”
“나도 할아버지께 들었어.”
이 결혼을 제안한 조부가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가 모를 거로 생각한 게 어리석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 같지?”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
다연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나름 자기 밥벌이하면서 제 일도 즐기면서 멋있게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짙은 눈이 집요하게 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태안에 있는 식당 주소 찍어줄 때는 제 할 말 하는 사람인 줄 알았고. 그런데 억울하게 따귀를 맞고도 왜 한마디를 못 해. 그래놓고 왜 화는 나한테 내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
눈에 둔통이 일었다.
“계속 피하면 될 거라는 건 당신 착각이야. 똑바로 대처하지 않으니까 더러워서 피하는 건데 무서워서 피하는 건 줄 알잖아. 그것들이.”
엄마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말라붙었던 눈물이 요즘은 툭하면 터져 나오려 했다.
“같이 때리지는 못하고 맞고만 와서 울기는 왜 울어. 뭘 잘했다고.”
한국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다연이 살면서 했던 많은 실수 중 가장 뼈아픈 실수였다.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주연을 다시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이없는 이유로 따귀를 맞을 일도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오만한 구자혁과 이런 식으로 엮이지 않았겠지.
이혼할 때 법원에서 마주쳤거나 그의 변호사를 만나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이 휘청이는 다연과 달리 약을 먹어서 감쪽같이 사라진 발진처럼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다연은 더는 그 앞에 있는 게 힘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다연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요.”
-탁.
커다란 손이 다연의 가는 손목을 잡아당겼다. 우드 향이 짙게 느껴졌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구자혁의 품이었다.
커다란 손이 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울고 가.”
뭘 잘했다고 우냐고 구박할 때는 언제고, 제 품에 서 울다 가라는 건 무슨 심보인지.
“진짜…… 싫어요.”
당신이.
“그 말 벌써 두 번째야.”
“…….”
“세 번은 안 봐준다.”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팔이 아래로 내려와 다연을 꼭 안아주었다.
그게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지.
“옆에 있어 줘?”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그의 과한 친절에 다연은 덩달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들켜버린 모든 것이 다연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다연은 괜찮지 않았다.
“아니요. 혼자 있고 싶어요.”
다연은 조금 과하다 싶게 단호히 대답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문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어두운 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기 왜 있는지, 자신은 누구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똑똑.
혼자 있고 싶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그는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다연이 뒤돌아보기 전에 그의 양손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그에게 어깨를 잡힌 채 다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그대로 있어.”
잠시 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목 뒤에 있던 단추가 풀어졌다.
“저기, 구자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