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76)
  • 26화

    인형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연은 다시 인형이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번 자선 파티 이후에는 드레스 같은 옷을 입을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다연의 착각이었다.

    일성 건설의 딸로 살 때도 이런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런 자리를 즐겼던 주연이 대신 지금 다연이 치장을 받는 샵에서 자신을 꾸미는 것을 즐겼었다.

    다른 자리였으면 그가 물어보았을 때 안 가겠다고 했을 텐데.

    오늘 참석하는 진성 호텔은 다연도 친분이 있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자혁이 직접 골랐다고 한 드레스는 지난번처럼 홀터넥 디자인이었다.

    평소와 달리 드레스는 스카프 같은 것을 목에 두르기 어려웠다. 목에 있는 점을 늘 가리고 다니는 다연을 배려한 디자인이었다.

    이럴 때 보면 구자혁은 정말 세심한 사람 같았다.

    “이번 드레스도 잘 어울리세요.”

    손에 흰색 면장갑을 낀 이 실장이 다연의 드레스를 세심하게 정리해주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네.”

    하늘하늘한 얇은 레이스가 팔목까지 내려오는 디자인이라 다연은 안심이 되었다.

    목 뒤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많은 단추만 아니면 정말 좋겠지만, 모든 것을 다 만족할 수는 없었다.

    야외였던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행사장이 실내라 사람과 부딪히기 쉬워 고민했었는데 해결되었다.

    이 실장이 들어왔다.

    “사장님 의상은 챙겨가겠습니다.”

    “호텔로 바로 가시는군요.”

    “네.”

    이 실장은 자혁의 의상을 챙기며 다연에게 설명했다.

    “사장님은 호텔로 바로 오실 겁니다.”

    “네, 연락이 왔었어요.”

    이 실장은 다연이 불편하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챙겼다. 보이지 않는 배려가 나중에 다연이 이곳을 떠나도 생각이 많이 날 거 같았다.

    “모시겠습니다.”

    다연은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진성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다연은 조금씩 긴장되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이 실장은 자혁이 있다는 게스트룸으로 앞장서서 걸었고 다연은 조용히 따라갔다.

    -똑똑.

    노크하고 잠시 기다린 후 이 실장은 문을 열고 다연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주었다.

    룸 안으로 들어가자 자혁은 피곤한지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있었다.

    다연이 들어 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대로 오른팔을 들어 눈을 가린 상태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사장님, 의상 준비되었습니다.”

    “네.”

    이 실장이 한쪽에 자혁이 입을 의상을 걸어두고 나갔다.

    “저 왔어요.”

    “알아.”

    다연이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잡아서 내렸다. 나른한 그의 눈과 마주쳤다.

    자혁은 다연의 손을 잡고 놔주지도 잡아당기지도 않고 그대로 잡고 있었다.

    자혁은 다연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문질러 만졌다.

    “오늘도 예쁘네.”

    다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식탁…… 예쁘더라구요.”

    “다행이군.”

    “피곤해 보여요.”

    “잠을 못 잤을 뿐이야.”

    지난번 비가 온 날부터 시작된 그의 불면증이 제법 심각해 보였다.

    “오늘은 약을 먹어보는 건 어때요?”

    다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같이 자면.”

    다연의 방에서 함께 잘 때 그는 정말 얌전히 누워만 있었다.

    오히려 긴장하는 쪽은 다연이었다.

    “오늘만요.”

    자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긴 팔로 다연을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열나는지 체크해 본 거야.”

    자혁의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의 입술은 이상했다. 이마에 닿을 때는 차가운데 입술에 닿을 때는 뜨거웠다.

    “안고 있는 건요?”

    “안고 싶어서.”

    “시간 다 되어 가요.”

    “알아.”

    대답하고도 그는 한참 뒤에 다연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하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그는 재킷을 벗어서 소파 팔걸이에 툭 던지고 바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다연은 몸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릴게요.”

    다연은 서둘러 자혁과 둘만 있는 공간을 벗어났다.

    게스트룸과 가벽 하나를 두고 여자들을 위한 파우더룸이라서 그런지 요란한 말소리가 들렸는데 대부분 오늘 입은 의상과 액세서리에 관한 수다가 대부분이었다.

    자혁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보타이를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갔다.

    다연은 예상대로 이 실장과 함께 있었다.

    다연의 앞에 보타이를 내밀고 고개를 숙였다.

    “매줘야지.”

    이 실장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자 다연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보는 눈이 많아요.”

    “보라고.”

    진짜 부부처럼 보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다연이 매주기를 원하는지 헷갈렸다.

    다연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있던 보타이를 들고 지난번처럼 매주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다연의 표정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자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민망해진 다연이 헛기침했다.

    “그만 봐요.”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안 봐. 방법 있으면 알려줘.”

    그의 시선 때문인지 보타이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 보고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는데.”

    다연이 인상을 찌푸리자 콧등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눈 좀 감아요.”

    그의 숱 많은 긴 속눈썹이 차분히 내려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다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착하게 타이 매는 것을 마무리했다.

    “다 됐어요.”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자혁을 툭 하고 밀었다.

    다연이 부딪쳐 넘어질까 봐 자혁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아무리 와이프가 예뻐도 그렇지. 적당히 좀 해라, 이 녀석아.”

    진 회장이 타박하듯 말하며 짓궂게 웃었다.

    자혁은 진 회장보다 다연이 더 걱정되었다.

    “괜찮아?”

    “이 녀석아. 나는 안 보이냐?”

    다연이 괜찮을 것을 눈으로 확인한 자혁이 몸을 획 돌렸다.

    “어르신은 어떻게 점점 힘이 넘치세요. 넘어질 뻔했잖습니까.”

    이토록 경계 없이 편한 모습의 그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기껏 아는 척했더니 이번에는 진 회장이 자혁을 무시했다.

    진 회장은 자혁을 한쪽으로 밀쳐내고 다연에게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다연 양, 우린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회장님도 그간 안녕하셨어요?”

    진 회장은 다연에게 손을 내밀다 말고 거두었다. 자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보시다시피.”

    다연이 아무런 경계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진 회장이 직접 다연을 데리고 오라고 했던 이유가 첫 인사가 아니었던 거 같았다.

    “이 사람 알고 계셨어요?”

    진 회장과 다연, 두 사람 모두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늦었다, 들어가지.”

    “네.”

    다연은 자혁의 팔이 아닌 진 회장의 팔짱을 꼈다.

    자혁의 인상이 구겨지자 다연은 나머지 팔로 자혁의 팔짱을 꼈다.

    “늦었어요.”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창립기념식이 먼저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나중에 물어보아도 되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홀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진 회장이 다연의 손목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네.”

    “긴장하지 말고 저 녀석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돼.”

    긴장으로 굳었던 다연의 어깨가 편안하게 내려앉았다.

    “와이프 잃어버리지 말고 잘 데리고 다녀.”

    진 회장이 기념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가면 자혁에게 당부했다.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다연은 지난번처럼 자혁의 옆에 서 있었다.

    첫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난번 자선행사에서 만난 사람도 있었다.

    자혁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주 여사가 여러 무리의 여자들을 이끌고 다연에게 다가왔다.

    “어머, 우리 또 보네요.”

    “안녕하셨어요?”

    “그럼. 여기 우리 모임 사람들인데. 가만있어 봐. 내가 소개해줄게요. 여긴 한강 기업 와이프.”

    “처음 뵙겠습니다.”

    “여기는 일진 산업 와이프. 어,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다른 데 갔는가 보네.”

    주 여사가 소개해주면 다연은 적당한 미소를 지으면 인사를 했다. 문제는 주 여사를 포함해서 모두 스스럼없이 다연에게 터치를 해왔다.

    어깨를 살짝 두드린다든가 격려의 의미로 팔을 두드려주는 터치가 많았다. 얇긴 해도 천으로 가려져 있어 다행이었지만, 다연은 점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꽃장식 샤인에서 했다더라.”

    “역시 우리 꽃꽂이 거기로 바꾸기 잘한 거 같아요.”

    “그렇지? 조 선생 젊어서 그런가 확실히 세련됐어.”

    “젊은 감각이라 가게 이름처럼 반짝반짝하네요.”

    이런저런 소모성 대화가 오가고 주 여사가 다연의 팔을 슬쩍 터치해왔다.

    “우리 매주 목요일에 꽃꽂이같이 하는데, 다연 씨도 와요. 예쁜 꽃도 보고 우리끼리 대화도 나누면 빨리 친해지잖아. 안 그래?”

    “그러면 좋겠다. 우리 멤버 중에 한 명이 꽃가루 알레르기라서 한 자리 비거든요.”

    “이 주에 한 번 스파 모임도 있어요. 그게 우리 코스야. 공은 좀 쳐요?”

    무엇 하나 다연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적당히 웃으며 얼버무리는 것도 한계였다.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서요.”

    “그런데 한 여사는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네.”

    주 여사가 시선을 들어 이리저리 둘러볼 때 다연도 고개를 들어 자혁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없는 것을 보고 다연은 반대쪽으로 시선으로 돌렸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성 호텔 창립기념회에 와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사회자의 인사말이 시작되면서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연이 더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 결혼반지예요? 심플한 게 예뻐요.”

    방심한 틈을 타 일신 산업이라고 소개받았던 여자가 갑자기 다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다연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손을 빼려 했지만, 여자는 쉽게 놔주지 않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브랜드 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주얼리샵에서 못 본 거 같아서요.”

    다연의 몸이 점점 굳었다.

    계속 이렇게 손이 잡혀 있다가는 발진이 일어나는 것을 모두가 볼 것이다.

    그때 커다란 손이 여자에게 잡힌 다연의 손을 감쌌다.

    “아내 좀 데리고 가겠습니다.”

    깊은 눈매로 차갑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압도되어 여자는 다연의 손을 놔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여자를 노려본 후, 정말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홀을 나왔다.

    자혁은 그녀를 드레스룸으로 데려갔다.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한 다연을 소파에 앉혀 두고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여기 있어. 금방 와.”

    그는 다연만 남겨두고 다시 게스트룸을 나갔다.

    다시 열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당연히 자혁이 들어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각또각.

    자혁의 발걸음 소리는 묵직하고 보폭도 느긋했다. 이렇게 가볍고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발진이 올라온 손을 내려다보던 다연의 고개가 저절로 올려졌다.

    “여길…… 어떻게…….”

    전혀 뜻밖의 사람을 만나서 다연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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