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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76)

25화

두 사람의 결혼처럼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하는 사이라는 것이 새삼 와 닿았다.

“정말…… 잠만 자는 거죠?”

그는 오만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였다. 굵직한 선으로 그린 그림처럼.

무슨 오기였을까.

“네. 그렇게 해요.”

당연하다는 듯 그는 이번에도 고개만 슬쩍 끄덕여 보였다.

“대신, 비 오는 날만요.”

“좋아.”

다연이 호기롭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자혁이 피식 웃었다.

계약서를 주고받으면 사인만 안 했다 뿐이지 그녀가 진짜 계약을 체결하는 것 사업가처럼 굴었다.

하얗고 작은 손을 커다란 손이 감싸 쥐고 작게 흔들었다.

“악수도 했겠다, 이제 잘까?”

그냥 자는 거 맞는데.

그와 함께 침대에서 잠든 게 처음도 아니면서 다연의 심장이 주책맞게 요동쳤다.

마치 자신의 방처럼 먼저 침대에 누운 그는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할 텐데, 누워.”

다연이 쭈뼛거리며 이불 속으로 눕자, 그가 취침 등만 남겨두고 불을 껐다.

옆에 누운 사람이 신경 쓰여 잠들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다연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그의 말대로 오늘은 일이 많았으니까. 다연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자혁은 옆으로 누워 잠든 다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있다는 게 불편하다고 티를 팍팍 내며 눕더니 그녀는 뒤척임 한 번 없이 잠들었다.

하얗게 드러난 목에 불긋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혁은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었다.

제 손길에 발진이 올라온다면 다연이 깰 테니까.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 * *

자혁의 퇴근 시간이 매일 조금씩 빨라졌다.

전에는 이 실장과 같이 퇴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거의 혼자 퇴근했다. 그리고 다연이 먹을 만한 것을 직접 사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도 퇴근하는 자혁의 손에든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안에는 레몬 케이크가 있었다.

-딩동딩동.

다연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현관 앞에서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자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옅게 웃었다.

“나 왔어.”

“고생했어요.”

다연은 배시시 웃었다.

“뭐 하고 있었어?”

“책 보고 있었어요.”

거의 변하지 않는 대답이었다.

“당신은 오늘 어땠어요?”

다연이 자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는 손에 닿지 않는 가슴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돈 벌었지.”

다연의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전에는 그녀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이면 속이 울렁거렸었다.

적응되어서일까. 이제는 선명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자혁은 식탁 위에 쇼핑백을 올려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다연과 식사 준비를 하며 그가 물었다.

“그림 그리러 언제 나갈 건가?”

다연은 그릇을 꺼내며 무심한 척 말했다.

“이번에 그렸던 거 마무리 먼저 하고요.”

“이번 주말은 안 되겠고, 다음 주말쯤에 같이 가.”

다연은 아직 그에게 온라인 수업을 말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중에라도 그가 자신의 행적을 아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같이 가겠다는 그의 말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럴 필요 없…….”

“가.”

고압적인 말도 아닌데 다연은 거절할 수 없었다.

“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어디 가요? 아니면 일이 많아요?”

“어디 가야 해, 당신도.”

이번에도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야 하는 일인 듯했다.

“진성 호텔 창립 기념 파티 겸 진 회장님 생신이야. 당신 불편하면 안 가도 돼.”

“아니요. 갈래요.”

싫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다연은 그의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반가운 기색까지 보였다.

실내이고, 진 회장님의 인정 많은 품성에 참석 인원이 많을 것이다.

“괜찮겠어?”

“그럼요.”

정말 괜찮은지 다연은 싱긋 웃으며 와인 잔을 챙겼다.

다연이 온 후로 장 여사가 해놓고 가는 음식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아니면 다연이 직접 요리를 하는 날도 많았다.

오늘 메뉴는 홍합찜이었다. 다연의 손에는 와인 병이 들려있었다.

“당신 술 창고 좀 뒤졌어요.”

다연이 가져온 것은 화이트 와인이었다. 술 고르는 센스가 수준급이었다.

“술 참 좋아해.”

다연이 쿡쿡 웃었다.

“당신 오고 나서 우리 집에 빈 술병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그의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정말 언론에 해명했던 거처럼 다연이 잠시 유학을 다녀온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혁은 와인을 잔에 부어 다연의 앞에 놔주었다.

“돈 많이 벌어야겠다. 와이프 술 사주려면.”

이럴 때는 진짜 부부가 된 거 같았다.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했지만,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게 됐다.

정신 차려, 한다연.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다는 아니어도 나중에 채워놓고 갈게요.”

자혁의 손이 멈추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이럴 때 다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데 표정을 모르니 그녀가 연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듣고 분석해보려 해도 다연의 말이 분석되지 않았다.

지금도 다연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다연은 나란히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식사하고 있었다. 자혁의 접시에 음식을 놔주기까지 하면서.

아무래도 식탁을 바꿔야 할 거 같았다.

나란히 앉아서 먹는 바 형이 아닌 마주 보며 앉는 식탁으로.

* * *

날씨가 좋아서 다연은 집 안이 아닌 마당에 나와 그림을 그렸다. 지난번 비에 젖어 엉망이 된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온라인 수업에서 그릴 그림을 선별해 놓고 다연은 다시 연습해보았다.

평소와 달리 집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커피도 내려 올 겸 다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 그래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사모님, 식탁 어디에 둘까요?”

장 여사의 말에 다연이 되물었다.

“식탁이라뇨?”

원래 쓰던 바 형의 식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모던한 집안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프로방스풍 식탁이 배달되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연이 스페인에서 쓰던 가구와 닮아 있었다.

최근 자혁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식탁이었다. 그는 그 공간을 완벽히 다연의 취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데 자혁이 방해를 했다.

장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모님, 아무래도 동서로 길게 두는 게 낫겠지요?”

어떻게 둘지 결정이 나지 않으니 설치하러 온 사람들도 멀뚱한 눈으로 다연만 쳐다보고 있었다.

배달 온 사람들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게 좋겠네요.”

배달 기사들은 다연의 말에 반색하며 금방 설치를 마무리하고 돌아갔다.

철거된 식탁은 4인용이라 마음만 먹으면 자혁과 거리를 두고 앉을 수 있었는데 배달된 식탁은 2인용이었다.

이제는 자혁과 마주 보며 앉아야만 했다.

다연은 식탁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대리석의 차가운 식탁보다 따뜻한 촉감이 좋았다.

‘이러지 마, 구자혁 씨. 미미가 알면 울겠다.’

한편으로는 자혁과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식사도 하며 술도 마실 일상이 기대되기도 했다.

* * *

다연은 계속 입이 마르는 것 같아 물을 마셨다.

카메라 세팅을 하던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또 마시니?”

입 안에 머금고 있는 물을 삼키며 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긴장해. 손이랑 목소리만 나올 텐데.”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요.”

다연은 다시 물을 마셨다.

온라인 클래스를 몇 번 더 진행해봐서인지 지혜는 카메라를 능숙하게 다뤘다.

“카메라 세팅 끝났어. 이리 와 봐, 테스트 좀 해보자.”

다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카메라가 세팅된 곳으로 다가갔다.

지혜는 프레임 안에 잡힌 화면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자 봐. 여기 이 프레임만 벗어나지 않으면 돼. 알았지?”

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클래스에 포함된 재료를 설명하는 것과 기초적인 것을 녹화하기로 했다.

평소 다연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라 익숙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건 낯선 일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버벅거리기 싫어서 대본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연은 간략한 설명을 정리해둔 노트를 펼쳤다.

“편집하면 되니까 중간에 말 꼬여도 다시 말하면 돼.”

“네.”

“자, 그럼 시작한다.”

지혜의 말에 다연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행 일러스트를 그리는 이경주입니다. 온라인 클래스를 처음 해보는 거라 많이 낯선데요.

쉽고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풍경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제가 잘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재료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듣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다연은 오히려 더 긴장되었다.

표정이나 눈빛을 보아야 대화가 조금 더 쉬울 텐데 알 수 없으니 다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음 말을 이어야 할 때 난감했다.

첫 번째 촬영이 끝나고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혼자 말하려니 어색하지?”

“반응을 모르니까 너무 어려워요. 이렇게 설명해도 알아들을까요?”

“설명만 잘하더니 갑자기 엄살은.”

지혜는 녹화된 것을 다시 확인하며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오늘 3강까지 촬영하기로 했는데 이제 고작 하나를 마쳤다. 다연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아 물을 마셨다.

“아, 기운 달려.”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지금은 이거밖에 없다.”

지혜는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며 웃었다.

“초콜릿 줄 테니, 말 잘 들으라고 꼬시는 거 같아요.”

지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먹을 걸로 넘어올 사람이었으면 쉽지.”

산채 정식으로 유혹하는 자혁에게 넘어간 걸 지혜가 알면 엄청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2강도 한 번에 가자.”

“네.”

지혜의 사인에 다연은 심호흡을 한 뒤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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