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자혁이 의자에 기대었다.
들어 보지 않아도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알 거 같았다.
“그 사람 데려오라 셨군요.”
“네.”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심하게 구겨졌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이 실장이 빈틈없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간 뒤에도 자혁은 몇 분째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어젯밤부터 지끈지끈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아침까지 이어진 이유가 비가 오려고 그랬나 보다.
비가 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히 신경이 곤두서서 일부러 일에만 매달린 적도 있었다.
원인을 모르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다연이 생각났다.
비가 오면 힘들다고 했던 그녀다. 혹시라도 운전 중에 비를 만나지는 않았을까. 쓸데없는 노파심이 일었다.
다연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어제 일이 떠오르면 신경질이 났다. 그동안 진심을 이야기했는데 모두 거짓된 연기 취급해버린 것이 참을 수 없어 거칠게 몰아세웠다.
고작 키스에 매달릴 정도로 육체적으로 끌려 온 사람이 누구인데 발정이 난 짐승 취급당한 거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왜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건지.
그런데 자혁을 괴롭히던 복잡한 감정이 비가 내리므로 씻기듯 사라지고 한 가지만 남았다.
다연이 안전하게 집에 있는지 확인해야 일이 손에 잡힐 거 같고, 이 지긋지긋한 두통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자혁은 휴대폰을 켜고 익숙하게 앱을 켰다.
“미미야, 한다연 어디 있어?”
[현재 외출 중입니다.]
“한다연 차는?”
[현재 외출 중입니다.]
다연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 *
시원하게 흐르는 강을 보며 다연은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한국 여행지 중 한 곳을 온라인 수업에 한 군데 넣고 싶다고 했더니 지혜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다연은 어제의 거친 키스로 조금 부어오른 입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나쁜 놈.”
툭 던지듯 그의 욕을 한 것을 의식하곤 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 생각은 그만. 일하자, 한다연. 그림 그리자, 그림.”
다연은 큰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고체 물감과 워터브러쉬를 세팅하고는 수채화용 A5 스케치북을 꺼냈다.
구도를 잡고 다연은 사진 먼저 찍었다. 그리곤 워터브러쉬를 손에 들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스케치북 위에 색이 내려앉았다.
잠시 물감이 마를 동안 다연은 엽서지에 똑같은 듯 다른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과 엽서지를 번갈아 가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느라 다연은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툭툭.
스케치북 위에 맑은 물방울이 두 번 떨어졌다.
“어?”
다연이 손바닥을 하늘로 펼쳐 들자, 커다란 빗방울이 여기저기에 떨어지고 있었다.
-투투둑투툭.
곧이어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다연은 재빨리 도구들을 챙겨 들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뛰었다.
무사히 차 안으로 들어왔지만, 비를 맞은 몰골이 엉망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린 그림이 엉망이 되었을까 봐 다연은 스케치북 먼저 살펴보았다.
비를 맞은 스케치북 귀퉁이가 벌써 얼룩이 지고 있었다.
“하아.”
순간, 참을 수 없는 짜증이 폭발했다.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그만이었지만,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것도.
다연은 뒷좌석에 스케치북을 던지곤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다연은 한참 만에 얼굴을 들고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었고, 이제는 집에 어떻게 갈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대리기사를 불러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다연은 조수석에 던져둔 짐을 뒤졌다. 비를 맞으며 챙긴 거라 한꺼번에 모아 품에 안고 왔더니 엉망이었다.
하나씩 챙기며 휴대폰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뛰어오면서 어딘가 떨어트린 것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어 대는 빗속을 바라보며 다연은 절망했다. 몸이 젖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는 벌써 한 시간이 넘게 내리고 있었다. 저 빗속에서 휴대폰을 찾는다고 해도 작동이 될까 싶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다연은 다시 운전석에 얼굴을 파묻었다.
“구자혁 씨…… 나 어떻게 해요?”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연이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비에 젖은 유리 사이로 물에 흠뻑 젖은 구자혁이 어른거렸다.
“이제 헛것도 보이나 봐.”
“문 열어.”
헛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말도 안 돼…….”
다연은 떨리는 손으로 잠금 버튼을 눌렀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흙냄새 섞인 비 냄새와 함께 짙은 우드 향이 훅 풍겼다.
“괜찮아?”
“…….”
그건 다연이 그에게 물어야 할 말 같았다. 비를 얼마나 맞은 것인지 그의 몸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다연이 대답이 없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한다연. 괜찮냐고.”
“진짜…… 구자혁 씨에요?”
그의 큰 손이 다연의 젖은 머리 위에 얹혀졌다.
“그래, 나 맞아.”
정말 구자혁이 맞았다.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다연은 운전석에서 일어나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단단한 팔이 다연을 감싸 안았다.
한 시간 반 동안 자혁은 지독한 악몽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다연이 전화를 받지 않는 순간부터 자혁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시 그녀를 볼 수 없다면…….
그 순간부터는 미친놈처럼 다연을 찾는 거에 매달렸다.
위치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확인된 장소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과속 카메라 따위는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오로지 빨리 다연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여행지 명소였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다연의 휴대폰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순간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사라졌다.
“한다연! 다연아!”
미친 듯이 다연의 이름을 부르며 빗속을 뛰어다녔다.
저 멀리 다연의 차가 보이는 순간 숨이 멎을 만큼 반가웠다. 단숨에 달려와 보니 다연이 운전석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심장에 일었던 고통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독한 두통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지금, 어제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발정이 난 개 취급을 한다 해도, 그저 물주 정도로 이용한다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사하면 그걸로 족했다.
* * *
그녀를 조수석에 앉혀 두고 자혁은 운전석에 앉았다. 둘 다 온몸이 젖어 엉망이었다.
자혁은 근처 한강 리조트로 향했다. 사장 전용 객실은 본관과는 뚝 떨어진 숲속에 있었다.
자혁은 욕실에 다연을 밀어 넣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으며 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
비를 맞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구자혁 씨는요?”
“거실에 욕실 하나 더 있어.”
다연이 우물쭈물 서 있자, 그가 카디건 단추를 풀어주었다.
“제가…… 해요.”
“덜덜 떠는 손으로?”
물을 흠뻑 먹어서인지 단추를 푸는데 뻑뻑했다.
“티셔츠까지 벗겨줘?”
“아, 아니요.”
자혁이 희미하게 웃으며 욕실 밖으로 나가자 다연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젖은 옷은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다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제와 달리 그가 손을 잡았는데도 발진이 올라오지 않았다.
정신의 말대로 그에 대한 믿음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거 같았다. 그 믿음이 깨졌을 때 어김없이 발진이 올라왔었다.
그리고 자신을 찾으러 온 그를 보는 순간, 다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자신을 지켜 줄 가장 안전한 사람은 구자혁밖에 없었다.
-똑똑.
“한다연, 괜찮아?”
노크와 함께 그의 목소리에 다연이 깜짝 놀랐다.
“네.”
“아니야. 시간이 오래 걸려서 혹시나 했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오만했는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스며 있는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 착각이 정말 다연 혼자만의 착각이어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자혁이 자신을 싸구려 여자 취급한다 해도 자신이 믿는 구자혁임은 변함없을 테니까.
‘이혼할 때까지만…….’
젖은 옷을 대충 헹궈서 옷걸이에 걸어놓고 다연은 샤워 가운을 입었다.
남자용만 있어서 다연이 입으니 옷이 다연을 삼킨 거 같이 파묻혔다. 남은 천을 둘둘 감아서 끈으로 묶으니 몸이 둔해졌다.
“하아.”
한숨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대충 머리를 멀리고 밖으로 나가자 다연과 똑같은 샤워 가운을 입은 자혁이 주방에 있었다.
반쯤 마른 머리가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고 있어서 인상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금방 내렸는지 커피 향이 진했다.
“커피밖에 없어.”
그가 컵 하나를 다연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다연이 컵을 받아 들자 그의 식탁에 앉았다. 자혁도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자신은 샤워 가운을 거의 두 번 감을 정도였는데 자혁에게는 샤워 가운이 작아 보였다.
꽁꽁 싸맨 다연과 달리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가운 사이가 벌어져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보였다.
다연이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팔이 길어서인지 가운 소매 사이로 그의 손목까지 길게 나와 있는 반면, 다연은 소매를 대충 접었는데도 가운이 그녀의 손을 완전히 덮었다.
“팔 내밀어 봐.”
그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말했다. 다연이 어색하게 오른팔을 내밀자 흘러내리지 않게 그거 접어 주었다.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컵을 오른손으로 넘기고 다연은 왼팔도 내밀었다. 그가 접어준 부분이 두툼해서 마치 큰 링을 하나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옷 금방 올 거야.”
“아…….”
두 사람 모두 샤워 가운만 입고 있다는 게 새삼 깨달았다. 다연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제는…… 미안했어.”
다연은 집요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순간, 화를 참지 못했어.”
다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화나게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결혼이 거짓이라고 당신을 거짓으로 대한 적은 없었어.”
“…….”
“예뻐 보였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어.”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