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76)
  • 22화

    서울 외곽의 한적한 곳에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도 선글라스를 낀 주연의 시선에 회색 점퍼에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보였다. 그녀와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박 기자였다.

    잠시 뒤, 주연의 차에 탄 박 기자가 앓는 소리부터 했다.

    “사모님, 이거 확실한 겁니까? 나도 나름 이 바닥에서 구른 세월이 있는데……. 영…… 촉이 안 와요, 촉이.”

    “의사는 만나보셨어요?”

    “한강 병원 정신과 확실합니까?”

    주연이 기억에는 한강병원이 확실했다. 나이 지긋한 의사라고 했던 것도.

    “네, 맞아요.”

    “예전에 담당했던 의사는 안식년이라 대신해서 환자 맡고 있다는 의사를 만나봤죠.”

    “뭐라던가요?”

    박 기자는 선한 눈매지만 눈빛이 날카롭던 의사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기자로서 이제껏 취재를 해왔던 사람으로 촉이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맡은 환자 중에는 그런 경우가 없다고 딱 잡아떼죠. 의료법이 있는데 쉽게 말하겠습니까?

    국내에 보고된 사례가 없고, 외국 사례가 있는지 찾아봐 주겠다는데. 일단 알겠다고 철수했는데 잠복했다 몇 번 더 찔러봐야죠.”

    주연도 담당 의사가 쉽사리 말해 줄 거라는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최근 들어 자주 병원에 온다는 다연이 진짜 한다연인지 확인만 되어도 반은 성공이었다.

    “사진은요?”

    “사진이야, 기가 막힙니다. 제가 사진으로는 어디 가서 기 안 죽어요.”

    허풍이 심한 타입이라 주연이 한마디 하면 박 기자는 두 마디를 했다.

    “자 보세요. 정면에 똭! 숨어서 이렇게 찍기 힘들어요.”

    자신의 휴대폰으로 옮겨 담은 사진을 주연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을 몇 장 넘겨보지 않아도 주연은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찾던 한다연이 맞았다. 청초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보다 더 성숙한 여인의 느낌이 더해지니 그림같이 예뻤다.

    “한다연이 확실해요.”

    “그렇다면 한강 기업 구자혁 사장이 그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아내 한다연과 사모님이 찾는 한다연이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인데…….”

    박 기자가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만나고 있는 마석건설 안주인인 주연은 드물게 박 기자에게 먼저 연락해 온 사람이었다.

    한강 기업 구자혁을 캐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주연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조사해 본 바로 그녀는 대외적으로는 조용히 내조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야망이 큰 여자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 박 기자는 주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주연은 다연과 가족으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드라마 한번 짜 봅시다. 구 사장 쪽이야 옛날부터 자자했던 소문이라 꿈쩍도 안 할거고. 게다가 한 번도 팩트로 증명된 적이 없어서 그저 찌라시 취급할 거예요. 그렇다면 한다연 쪽으로 짜 봅시다.”

    “걱정 말아요, 이미 밑밥 좀 던져놨으니까요.”

    볼수록 대단한 여자였다. 확신이 있으니 벌써 밑밥까지 던져 놓았겠지.

    “역시, 마석건설 사모님입니다. 대단해요.”

    주연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요. 눈앞에서 밥그릇 빼앗겼는데. 이정도 칼은 갈아줘야죠.”

    주연은 명품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가방에서 제법 두툼한 봉투를 박 기자에게 건넸다.

    “앞으로 큰 거 잡아야 하는데 식사 든든히 하고 다니시라고 조금 넣었어요.”

    “아유 뭘 이런 걸 다.”

    박 기자는 주변을 살피며 얼른 봉투를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사진 실시간으로 보내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용건이 끝났는지 박 기자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모자를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주연은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찾으려 애쓴 다연이 나타난 것이 반가웠다.

    아무리 반가워도 곧바로 덥석 물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강 기업 구자혁의 아내라니 더욱 신중하게 잡아야 했다.

    ‘기다려, 한다연. 넌 내가 꼭, 잡아먹고 말테니까.’

    * * *

    자혁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한 팔을 들어 가로로 눈 위에 올려두었다.

    자혁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동작이었지만, 최근 상담에서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 정신은 자혁의 심리 변화를 감지했다.

    “후회되는 일이야? 아니면 골치 아픈 일이야?”

    “둘 다.”

    “회사 일이야? 아니면…….”

    “묻지 마.”

    자혁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물어볼 줄 알고 묻지 말라는 건데?”

    “뭐든. 묻지 마.”

    근래 들어 그가 이렇게 까칠한 적이 없었기에 의사로서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구나.’

    자혁에게 난제라고 불릴 만한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회사는 최근 기사들만 보아도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쪽이라면 그를 하루 이틀 건들었던 것이 아니라 이골이 나 있으니 패스.

    ‘그렇다면 설마…… 아내?’

    정신은 아직도 눈을 가리고 있는 자혁을 바라보았다.

    “아내와는 어때?”

    짧은 질문에도 자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 있어?”

    다시 또 크게 한숨을 내쉬기만 하고 자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싸웠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로써 정신은 지금 자혁을 괴롭히는 문제가 ‘아내’와 관련된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자혁은 아무리 의사로 물어보고 또 물어보아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었다.

    정신에게는 자혁은 친동생과 같은 존재였지만, 참 어려운 환자였다.

    “너한테 물어볼 게 하나 더 있어.”

    “묻지 마.”

    “제일 일보의 박이영 기자라고 알아?”

    기자라는 말에 자혁이 눈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정신과 시선을 맞추었다.

    “기자는 왜?”

    “예전에 아내 영상 찍어서 너한테 보낸 기자랑 동일 인물이야?”

    자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쪽은 정리했어. 그런데 갑자기 기자는 왜 물어봐?”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는데……. 칼럼을 쓰고 싶다며 찾아와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물어보더라고.”

    자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리고…… 아, 이건 다른 환자 이야기니까 내버려 두고. 하여간 너와 내가 맡은 다른 환자의 사례를 정확히 알고 물어봤었어.”

    자혁이 어금니를 꽉 물었는지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국내에 보고가 된 사례가 있는지, 논문이랑 찾아서 보내준다고 돌려보내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연이 아닌 거 같아서.”

    “다른 환자는 어떤 경우야? 나랑 비슷한 건가?”

    자혁이 아무리 친동생과 같은 존재여도 의사로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의료법상 본인이 아닌 이상은 상담 내용 유출은 금지입니다.”

    “이럴 때만 선 지키지.”

    “다른 환자 일이니까.”

    어제부터 신경에 거슬리는 일만 생기는 거 같아 자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자혁이 안락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 실장한테 한번 조사해보라고 할게.”

    “타깃이 너인지 아니면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알아, 뭔 말인지.”

    자혁은 한쪽에 던져두었던 재킷을 걸친 뒤 상담실을 나왔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캐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 짜증 나는 많은 것 중 밑바닥에 깔린 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다연. 그녀였다.

    * * *

    이 실장의 보고를 듣고 있던 자혁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한강 기업과 관련된 루머 중 다연에 대한 루머를 퍼트린 기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제일 일보의 박이영 기자가 소문의 근원지 같습니다.”

    조금 전 주치의인 정신에게 들었던 이름과 똑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루머라고는 하지만, 다연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혁은 또 다른 지라시를 읽어 보았다.

    [얼마 전 아내가 유학에서 돌아온 A 기업 사장 부부. 알고 보니 끼리끼리 만남이었다. 성불구 남편과 타인의 손이 닿으면 발진이 올라오는 피부병 아내. 세상에 이보다 더 천생연분 커플은 없을 듯.]

    [세상에 이런 일이. 돌아가신 부친의 전 재산을 들고 도주한 H 산업 차녀. 알고 보니 A 기업 안주인으로 그동안 외국에 숨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든든한 뒷배 덕분에 신분 세탁에는 성공했지만, 목에 있는 빨간색 나비 모양 점 때문에 신분이 들통 났다.]

    이니셜로 되어 있었지만, 어느 기업인지 쉽게 연상될 정도로 내용이 구체적이었다.

    그를 성불구로 만드는 건 지겹지도 않은지 잠잠해진 거 같다가도 한 번씩 고개를 들었다. 그에 관련된 근거 없는 소문 모두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는 거라 무시하면 그만인데.

    문제는 그의 아내, 다연에 관한 것들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한다연 주변 조사 다시 해야겠습니다.”

    다연에 대한 보고는 종종 받았었다. 그 보고에서 그녀가 가진 재산은 본인이 일해서 번 돈과 자혁이 생활비로 보내준 돈이 전부였다.

    지라시 내용처럼 다연이 전 재산을 가지고 숨었다면 뭐라도 나와야 했었다.

    그녀의 부친이 남긴 재산이라곤 부도 직전의 회사가 전부였다. 그것마저 다연의 의붓언니가 결혼한 마석건설에서 헐값에 사들였었다.

    그녀의 부친이 사고로 죽기 전 살았던 집도 재혼한 아내에게 명의 변경이 되어 있었다.

    비단 집뿐만 아니라 작은 상가 건물도 포함해서 모든 재산이 다연의 새엄마 명의로 이전되었었다. 그리고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접수된 이혼 서류. 마치, 부도나기 전 전 재산을 빼돌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특히, 한다연 부친 회사가 마석건설로 넘어갔던 당시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세요.”

    “네.”

    “그리고 아내한테 믿을 만한 사람 붙여 놓으세요.”

    “수행비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다연이 불편해할 게 뻔했다. 아이 취급하지 말라고 하겠지.

    “자유롭게 두되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사람으로요. 들키지 않게.”

    “네.”

    이 실장은 흔들림 없이 대답하고 다음 보고를 했다.

    “다음 주 진성 호텔 창립 기념 파티는 어떻게 할까요? 기념회 겸 진 회장님 생신 파티라 참석 인원이 많을 겁니다.”

    한강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돌아가신 조부와 가장 친한 분이라 자혁이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자리는 그에게도 힘든 자리였다. 더구나 실내라면 사람과 스치듯 부딪힐 수도 있었다.

    “혼자 참석하는 걸로 하세요.”

    웬만해서는 바로 대답했을 이 실장이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진 회장님이 손수 전화를 주셨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