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거짓말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보탠 거 같은데요.”
“그만큼 네 마음의 짐이 얼마큼인지 다 안다는 뜻이지.”
다연과 지혜는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얼굴 보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어쩐 일로 친히 방문 하셨을까?”
“온라인 강의 한번 해볼게요.”
다연의 말에 지혜는 의자에 기댔던 등을 곧추세웠다.
“정말?”
다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 구자혁의 아내로만 살 수는 없었다. 본래 다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한 곳에만 머물려는 안일함을 그나마 일깨우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지혜가 보여 주었던 독자 메일이 결정적이었다. 다연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으니까.
“여행 일러스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쉬지만, 꾸준히 뭔가를 해야 잊혀지지 않을 거 같아서요.”
“설마! 이경주 작가가 잊혀질까. 그렇지만 잘 생각했어.”
“아, 그리고 손이랑 목소리만 나오는 걸로 하고 싶어요.”
이경주라는 일러스트 작가가 다연이라는 것은 지혜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했다. 아무리 새엄마와 주연이 그림에는 취미가 없어도 얼굴이 노출되는 것 자체가 그들도 볼 가능성이 있었다.
“내 생각에도 그게 안전할 거 같아. 너 어디 있는지 알면 그것들이 가만히 있겠냐고. 욕도 아까운 것들이야.”
지혜는 더 한 욕을 해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쓴 커피와 함께 삼켜버렸다.
“그나저나 지난번 보여 준 그림.”
다연이 시선을 들어 다시 또 눈을 반짝이는 지혜와 마주쳤다.
“어쩌자고 그리 달달하게 그린 거야? 모야, 뭔데? 응?”
마치 자신이 일러 속 주인공인 된 거처럼 지혜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나는 그게 가장 좋더라.”
“어떤 거요?”
지혜에게 보내준 일러는 지금까지 스무 장 정도였다.
“흰색 개가 나오는 거.”
“아, 메리요?”
“메리?”
다연이 싱긋 웃으면 말했다.
“그 흰색 개 이름이 메리예요.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 장면 말이야. 음…… 뭐랄까…… 든든한 애인의 정석이라고 해야 하나? 무서워하는 애인을 보호하는 남자! 멋있잖아.”
다연도 자주 떠올리는 장면 중 하나였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서 나온 말 그대로 돌발행동이었다. 서류상 아내인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그의 허리에 매달린 채 빙빙 돌았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날 그의 얼굴이 굳은 것은 당연했다.
“너 좀 수상해. 연애하니? 그런 거야?”
“연애는 무슨!”
“네 그림을 보면 남자는 딱 봐도 구자혁이던데 뭘. 여자는 딱 봐도 한다연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다연이 부인했음에도 지혜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남녀가 한집에 있어. 별일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별일 있었던 다연은 괜히 커피만 홀짝였다.
“막말로 불륜도 아니잖아.”
지혜의 말대로 불륜은 아니었다. 서류상으로 부부는 자혁과 다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미미를 생각하면 외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누군가 다연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데 자혁은 자신과 키스를 하고도 미미와 통화할 때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그 사람에 대한 소문, 선배도 들어서 알잖아요.”
“그게 뭐? 그중에 사실 확인된 게 있기는 해? 조현병은 말도 안 되는 거였고, 뭐? 숨겨둔 여자?”
다연의 고개가 미세하게 아래로 꺾였다.
“있어요…… 여자.”
“뭐?”
“아침저녁으로 다정하게 통화해요. 회사에서도 하는지 모르겠고요.”
지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숨겨둔 여자가 있는데 너와 이런 결혼 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그 여자랑 했어야지.”
“이름도 알아요. 미미.”
이름을 듣자마자 지혜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뭐야? 그 이름은? 꼭…… 업소 여자 같잖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지혜의 말에 다연은 컵을 빙빙 돌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연도 처음에 이름을 들었을 때 참 유치하다 싶었다.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왜 미미를 두고 자신과 이런 결혼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니 답은 쉽게 나왔다.
혹시나 미미가 출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면 그가 다연과 위장 결혼을 선택한 것 모두 설명이 되었다.
“형식상 결혼한 이유가 이혼이 목적이었나? 너와 이혼하면 누구랑 재혼할지 알 만하다.”
지혜가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놓고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나에겐 고마운 일이에요. 이 결혼 아니었으면 지금껏 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수도 없었어요.”
“짜증 나지만, 인정.”
지혜는 빠르게 수긍했다.
“구자혁 정도 되니까 널 꼭꼭 숨겨둘 수 있었던 건 맞아. 24시간도 안 돼서 널 출국 시킨 사람인데 뭔들 못 할까.”
다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못 할 거 없는 대단한 사람도 결혼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싶긴 하다.”
“결혼이요?”
“너희 집안도 한강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준재벌 정도는 됐으니까. 그래서 제안한 게 아닌가 싶다.”
결혼 기사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정보는 한 모 씨가 다였다. 그것도 구자혁의 능력이겠지. 새삼 그가 굉장히 먼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네 서류상 남편. 여자 취향이 그토록 저렴할 줄은 몰랐네. 사업적 감각과 여자 취향이 아주 극과 극이야.”
지혜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다연이 이번에 그린 가슴 몽글몽글해지는 그림이 다연과 자혁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그래서 다연이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오래 사귄 여자가 있는 남자가 들이댈 때는 이유는 하나야.”
“그게…… 뭔데요?”
“육체적 본능이지 뭐겠어.”
지혜의 말에 다연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강한 충동을 느낀다고 했었던 게 결국, 감정적인 게 아닌 본능적인 욕망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연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본 지혜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담은 여기까지. 메일로 온라인 강의 자료 보내줄게. 커리큘럼 짜서 보내줘.”
“네.”
* * *
집으로 돌아온 다연은 지혜가 보내준 자료를 보며 수업 커리큘럼을 짜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낸 일러스트집은 외국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온라인 강의였지만, 다연은 외국 풍경이 아닌 한국 여행지를 한 번이라도 꼭 넣고 싶었다.
-딩동딩동.
그의 차가 정문을 통과하면 거실의 비디오폰에 알람이 울렸다.
며칠 전 자혁이 온줄 모르고 책에 빠져 있던 다연이 놀란 것을 보고 해제해 두었던 알람을 다시 켜두었다.
자혁이 퇴근해도 늘 빈집이었기 때문에 알람을 켜 둘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다연이 있었다.
다연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던 것을 대충 한쪽으로 밀어 넣고 다연은 현관문 앞으로 나갔다.
자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옅게 웃었다.
“나 왔어.”
“고생했어요.”
다연은 배시시 웃었다.
“뭐 하고 있었어?”
“책 보고 있었어요.”
다연의 하루는 굉장히 단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마당을 산책하고 책을 읽거나 춤을 추었다.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하는 게 다인데 그것도 간단하게 장 봐서 집에 오는 게 자혁이 아는 그녀의 일과였다.
“오늘 외출했었나?”
“어떻게 알았어요?”
그의 손이 다연의 입술에 닿았다.
“립스틱 바른 거 같아서.”
느슨했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처럼 둘 사이의 긴장감이 흘렀다.
“본래 입술 색이 더 예뻐.”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다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짙은 우드 계열 향이 훅하고 밀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자혁이 어느새 그녀의 뺨에 손으로 감쌌다.
“오늘도 돈 많이 벌었는데.”
“……그런데요?”
그가 볼을 감싸고 있어 다연의 대답이 느릿하게 나왔다.
“칭찬해줘야지.”
“……!!”
“어른 칭찬.”
깊은 눈매로 잡아먹을 듯 다연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연기 잘하는 사람인 거는 알겠는데. 점점 뻔뻔해지는 거 알아요?”
그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연기?”
“네. 연기요.”
얼마나 참고 있는데 연기라니. 참지 말 걸 그랬나?
“아내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남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건 대외적일 때만 하면 되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부드럽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오만하게 바뀌었다.
“그저 육체적으로 끌리는 거라면…….”
다연의 다음 말은 그의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말하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고 그의 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벗어날 테면 벗어나 보라는 듯 그는 처음부터 거칠게 밀어붙였다.
단단한 팔로 다연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천과 천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숨결을 훔치는 그의 숨결이 뜨거워 다연은 온몸이 녹는 것만 같았다.
으응 하는 신음도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놓아 달라며 버둥거릴수록 그의 팔은 더 단단해졌다.
어느새 다연은 조금 더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다연이 매달았다. 아랫배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은 감각에 알 수 없는 갈증이 일어 그에게 더 매달았다.
다연의 몸이 자잘한 떨림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댔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다연과 달리 그는 평온하기만 했다.
짙은 눈이 차갑게 다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거면.”
그가 다연의 목을 끌어당겼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
강하게 끌어당기던 그의 팔에 힘이 한 번에 풀렸다.
“당신이…… 싫어요.”
그는 잠시 멈칫하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던 다연은 몸은 자유로워졌지만, 마음에는 큰 생채기가 생겼다. 뭔가 저렴한 사람 취급당한 거 같았다.
돈이라면 그와의 위장 결혼도 서슴지 않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연을 만지는 것에 거침없었겠지.
그런 줄도 모르고 자혁을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갑자기 그의 손이 닿았던 모든 곳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이 시작되었다.
타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다연을 괴롭히던 그 감각이었다.
다연은 방으로 달려가 약을 꺼냈다. 새끼손톱만 한 하얀색 알약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다연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른 약 효과가 돌아서 이 고통에서 편안해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