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운 걸 먹어서인지 붉어진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저 입술을 삼키면 어떤 맛인지 아는데 이건 자혁에게 고문이었다.
다시 강한 충동이 일었다.
“또! 또 그 눈빛.”
다연이 손가락 두 개를 펴서 자신의 눈과 자혁의 눈을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처음 봤을 때도 이랬어요.”
그때는 분명 떨고 있던 여자가 이제는 맞먹으려 들었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꼭 잡아먹을 것처럼.”
자혁이 다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떨고 있는 그녀를 한번 깨물어 보고 싶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그녀의 말을 들으니 정말 한번 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다연이 순진하지만 진지하게 말했다.
“나 부탁이 있어요.”
자혁이 고개를 슬쩍 끄떡이자 다연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식탁 위에 올려둔 블루투스 이어폰을 손으로 톡톡 건들었다.
“내 앞에서 이거 안 끼면 안 돼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졌다.
다연은 그의 표정만 보고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걸 끼지 말라는 것은 미미와 통화하지 말라는 것이니까.
자혁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내려다본 후, 시선을 옮겨 다연을 바라보았다.
어렵게 하는 부탁이 고작 이거라니.
그런데도 부탁이니까 들어줘야겠지. 그런데 맨입으로?
이것도 계약이라면 계약, 쉽게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들어주면.”
다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혁은 그녀가 했던 것처럼 검지로 이어폰을 톡톡 쳤다.
“네 앞에서 이거 안 낀다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해서인지 다연이 환하게 웃으며 안겼다.
“고마워요.”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한다연이 이렇게 안겨 오는 거라면 이제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자혁은 다연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당신은 뭘 해줄 건가?”
다연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거 같아 자혁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한다연.”
자혁의 귓가에 다연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자꾸 미친놈처럼 웃음이 튀어나왔다.
자혁은 다연을 안아 들었다. 저번에 안아보았을 때도 생각했지만, 다연은 너무 가벼웠다. 손도 작으면서.
그녀를 조심히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고 자혁은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웠다.
다연이 온기를 찾아 자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미야, 술에 취한 여자 안고 자면 혼나겠지?”
[제가 잘 이해 못 했어요.]
이어폰이 아닌 집 안에 설치된 스피커로 미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아, 내가 너한테 별걸 다 묻는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내 방에 가야겠지?”
[제가 잘 이해 못 했어요.]
“미미도 모르는 게 있네.”
[더 노력하겠습니다.]
* * *
다연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주치의와 병원 앞 야외 정원으로 나왔다. 다연은 따뜻한 커피를 정신은 아이스커피를 손에 들고 여유롭게 걸었다.
“요즘 많이 편안해 보여요.”
다연이 걷는 속도만큼이나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연이 잘 지낸다니 다행스러우면서도 그는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들기도 했다.
“남편과는 어때요?”
잔잔하던 다연이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파도가 이는 것처럼 반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느껴졌다.
“남편과 키스를 했어요.”
스스로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다연은 다른 곳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부부 사이에 키스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다연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땅히 축하해 줘야 하는데 정신은 조금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제가 이상한 병이 있는지 몰라요.”
“그럼 그동안 이야기 안 했었다는 말인가요?”
다연이 이번에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다연이 어떤 사람과 어떻게 결혼했는지 궁금했다.
좋은 감정으로 만나다 결혼을 했다면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스킨십이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 과정 없이 결혼을 먼저 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만약, 집안끼리 이어진 정략결혼이라면? 이라는 물음표가 정신의 머릿속에 하나 생겼다.
정신은 다연이 요리조리 피하는 과거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남편과 연애 할 때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니나 다를까. 연애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다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점점 다연의 결혼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 결혼한 게 맞을까?
“할 이야기가 없거든요.”
속내를 감추느라 이야기를 안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할 이야기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정말 어려운 환자라 정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략결혼이 맞는다면 지난번 남편의 연인에 대한 것이 이해되었다.
“지난번 남편에게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다연은 손에 든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내 앞에 데려오지 않는 이상은 상관하지 않으려 해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거든요.”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결국, 다연 씨만 상처받을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걸 모를 정도로 정신은 감정 조절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연은 옅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떠날 사람은 그쪽이 아니라 나니까요.”
다연의 상담을 하고 있다 보면 답답해지는 사람은 의사인 정신이었다. 오늘도 해결하지 못한 물음표만 가득했다.
정말, 어려운 여자였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때 또 선생님께 상담받으면 되잖아요.”
그녀가 상담받으러 온 이래 가장 밝게 웃었다. 하지만 정신은 같이 웃어 줄 수 없었다.
웃고 있는 다연이 그의 눈에서는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 * *
다연과의 상담이 끝나고 상담실로 자문을 구한다는 기자가 찾아왔다.
이런 경우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경우보다 병원 홍보팀에 협조를 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정신은 제일 일보 기자라는 사람의 명함을 받으며 특유의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자문이 필요하시다고요?”
“네. 정신과 상담은 아직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 칼럼을 쓸까 합니다.”
정신은 좋은 의도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어떤 걸 쓰실 예정입니까?”
“좀 특이한 경우 없습니까? 흔히 보는 우울증이나 그런 거 말고요. 표정을 못 읽는 사람이라던가.”
정신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제가 외국 기사에서 본 건데요. 다른 사람의 손이 닿으면 거부 반응으로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경우를 봤는데. 국내에도 이런 환자가 있었습니까?”
정신은 확신했다.
지금 자신을 찾아온 기자의 의도는 단순히 칼럼이 아니라는 것을.
상담 기록은 의료법상 철저히 비밀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말한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의 환자였다. 구자혁과 한다연.
눈앞에 있는 기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글쎄요. 제 환자 중에는 없어서 제가 말씀드릴 수 없겠는데요. 대신 논문을 찾아봐 드리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보고된 사례가 있는지도요.”
“그래요?”
기자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다음 상담이 있습니다. 논문은 명함에 있는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자가 나가고 정신은 자혁이 오면 앉는 소파에 편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 * *
출판사 미팅룸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동안 다연은 그림 재료가 든 파우치를 꺼냈다.
엽서지를 펼쳐두고 무엇을 그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담하며 걸었던 병원 산책로를 그렸다. 어쩌다 보니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초창기 주치의였던 진 교수, 자혁의 조부인 구 회장과 자주 걸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신과 산책로를 자주 걷고 있었다.
상담을 한 날은 대화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되었다. 오늘 가장 힘들었던 말은 떠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거였다.
자신이 한 말이었고, 듣고 있던 정신조차도 그녀가 힘들어질 거라고 했었다. 알면서도 심장 한구석이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꽃이 가득 핀 산책로를 그려 놓고도 다연은 울적한 기분이었다.
“왔구나.”
양손에 컵을 든 지혜가 등으로 미팅룸 문을 밀고 들어왔다. 급하게 왔는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쁜 숨이 섞여 있었다.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할 거 다 하고 온 거야.”
들고 있던 컵 중 하나를 다연의 앞에 내려놓으며 그녀의 시선은 그림에 고정되었다.
“이번 ‘연인’에 들어가는 그림이니?”
“아니, 그냥 심심해서요.”
다연은 마무리하며 물감이 잘 마르도록 한쪽에 놔주었다.
“엽서지구나.”
“가볍게 그리기 좋아요. 뒤에 편지도 쓸 수도 있고요.”
국제 우편으로 다연의 그림을 받을 때 지혜도 그런 엽서를 받아 본 적 있었다.
다연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 그녀의 책상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이 붙여 두었었다.
지혜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다.
“편지? 누구한테?”
“그냥. 인사해야 하는 사람 있잖아요. 나중에 출국할 때…….”
“뭘 떠날 준비를 벌써 해?”
뭘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혜는 김이 샌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꼭 떠나고야 말겠다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결혼 기간은 아직 많이 남았었고, 자혁과의 이혼을 잘 마무리한 뒤 곧장 출국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다연은 꾸역꾸역 떠나야 한다고 매일 자신의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왜? 구자혁 때문에?’
가장 안전한 사람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은 본능이라서 그런 거라고 우겨보려는 자신이 참 바보 같아 다연은 쓴웃음이 올라왔다.
“전에 너무 급하게 떠나서 그런가 봐요.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준비하게 돼요.”
지혜도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2년 전 다연은 유학 준비 중이라고 했었다. 그랬던 다연이 갑작스럽게 도망치듯 출국해야만 했었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부친의 발인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때는 도망친 거였지. 그 무시무시한 새엄마와 그 딸한테서.”
다연이 출국한 것을 몰랐던 그들은 지혜에게 쫓아와 어디다 숨겼는지 말하라며 한동안 괴롭혔었다.
표독스러운 계모와 의붓언니한테서 다연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한 달 넘게 시달리면서 지혜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선배가 정말 고생 많았었죠.”
“미안하다고 말하려면 멈춰. 화낼 거야. 그동안 들은 것만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만 번은 될 거다.”
다연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