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76)

18화

[몰라.]

노코멘트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른다고 하는 걸 보니 그 여자가 원인인 게 확실했다.

“형도 모르는 게 있어?”

[아직 못 만났어.]

정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연락도 없이 안 오네.]

정신의 이렇게 솔직한 한숨 소리를 듣는 게 오랜만이었다. 매번 티 내지 않으려 숨죽여서 조용히 내쉬는 것을 자혁은 알고 있었다.

[전화 왜 했는데? 목소리는 괜찮아 보이는 걸 봐선 문제 있는 거 같지 않고.]

자혁은 다연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열이 나는지 체크하려면…….”

[체온계로 재봐.]

그게 있으면 전화할 리가 없지.

[이마에 손대봐.]

체온계가 있었다면 자혁이 전화를 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는지 정신이 곧이어 대답했다.

“내 손이 더 뜨거워서 모르겠어.”

다시 한번 정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이마에 대봐.]

“뭐?”

[손보다 더 정확할 거야. 나 바쁘다 끊어.]

자혁은 전화를 몇 분째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볼 수 없으니 거친 숨소리만으로 열이 나는지 알 수 없다는 건 핑계일 수 있었다.

자혁은 그녀가 잠든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다연의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입술에 닿은 이마가 아주 뜨거웠고 자혁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다시 한번 확인.

자혁은 다연의 이마에 다시 입술을 붙였다. 정말 뜨거웠다.

상체를 세운 자혁은 물수건을 다연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미지근해진 수건을 다시 차가운 물에 넣어 식힌 후 다시 다연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흐음…….”

다연의 눈이 작게 떠지며 자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열에 취한 것인지 잠에 취한 것인지 다연의 시야가 느릿하게 보였다.

“졸려요.”

“자.”

이상했다. 자혁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건 미미한테만 해주던 말투였는데.

“자꾸 졸려요.”

“자꾸 자.”

말을 잘 듣는 착실한 아이처럼 다연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소리 없이 웃으며 눈을 감는 게 아쉬워 자혁은 다시 흔들어 깨우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다.

열이 내렸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로 한 번 더 입술을 다연의 이마에 꾹 눌러보았다.

한다연은 아직도 많이 뜨거웠다.

* * *

다연은 늦은 밤에 눈을 떴다.

이마가 간질거려서 올려다보니 자혁의 입술이 닿아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니 이불 위에 나란히 누운 자혁이 보였다.

‘오늘은 예쁜 얼굴로 자네.’

다연은 다시 잠에 취해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자혁의 입술이 다시 닿을 수 있게.

굳이 그의 입술이 시원해서라는 핑계를 붙였다.

* * *

토요일도 일요일도 아닌데 자혁의 옷차림이 가벼웠다. 자혁은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을 보며 심각한 얼굴이었다.

“안 좋은 뉴스예요?”

“숫자.”

다연이 질색이라는 듯 고래를 가로 저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침마다 마시는 스모키한 커피는 정말 구자혁스러웠다.

“오늘은 회사 안 가요?”

“안 가.”

다연은 자혁에게 하는 질문이 많아졌다.

“왜요?”

“전문 용어로 땡땡이.”

다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처럼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고 싶어 자혁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요즘은 다연의 표정이 안 보일 때가 거의 없었다.

“사장님이 땡땡이치면 어떻게 해요? 회사는 누가 먹여 살려요?”

“직원들이.”

유머 감각이 점점 퇴행하고 있었다. 다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 잘해. 내가 뽑았거든.”

며칠 다정한 모습에 깜박했었다. 구자혁이 오만함의 표본이었다는 것을.

자혁이 다 마신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다연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창립 기념일이야.”

2층으로 올라가는 자혁을 보며 다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 남자가 자꾸 이상해지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요즘 너무 자주 웃었다.

“맥주 떨어졌더라.”

냉장고 깊숙이 넣어 뒀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같이 사러 가줄 거예요?”

기대 없이 해본 말이었다. 바쁜 사람이니까. 창립 기념일이라 회사엔 가지 않아도 서재에서 종일 일할 게 뻔하니까.

“30분.”

툭.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와서 큰일이다. 다연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다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자혁은 거실 소파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소파 팔걸이에 앉아 있었다.

드레스룸에 가득 찬 옷이 아닌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나온 다연은 자혁도 청바지에 니트 티를 입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가자.”

먼저 앞장서서 걷는 자혁의 속도를 맞추느라 다연의 걸음이 빨라졌다.

자혁은 태어나 처음으로 카트 운전을 하고 있었다. 다연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하는 거라 어렵지 않았다.

맥주 한 묶음을 카트 안에 넣는 다연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한 묶음 가지고 되겠어?”

다연이 얼른 한 묶음 더 집어넣었다.

계산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자선행사에서 만났던 주 여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게 누구야. 구 사장을 이런데서 다 만나고 말이야.”

“안녕하셨어요.”

다연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자 목에 둘렀던 스카프가 풀어졌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얇은 아사로 된 것을 했더니 자주 풀어졌다.

다연의 목에 있는 점을 본 주 여사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굳어졌다 풀어졌다.

“보기 좋네. 다음에 또 봐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주 여사는 휴대폰을 꺼냈다.

“자기야, 나야. 지난번에 마석건설 와이프가 했던 말 그것 좀 자세히 해봐.”

[무슨 말?]

“목에 나비 모양 붉은 점이 있다는 여자 말이야.”

[아! 다른 사람이랑 닿으면 발진이 올라온다고 했던 그 여자? 맞아. 그 여자 목에 나비 모양 붉은색 점이 있다고 했었어. 우리가 그 몸으로 결혼은 그렇고 연애나 할 수 있겠냐고 했었잖아.]

주 여사는 점점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조금 전 인사를 했던 다연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점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은 더 있겠지.’

* * *

이 주 만에 상담하러 온 다연의 얼굴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많이 편안해 보였다.

“지난주에는 무슨 일 있었어요?”

“감기에 걸렸었어요.”

정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운 게 아니라 감기를 앓았다는 게.

“그 사람이 간호해줬어요.”

놀라움에 정신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는 남편이 간호해줬다고 말하는 다연의 표정이 밝았다.

“간호해주는 남편이 어때 보였습니까?”

질문을 해놓고 정신은 아차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이었다.

다행히도 다연은 모르는 거 같았다. 턱을 괴고 생각을 하던 다연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음…… 입술이 시원했어요.”

다연이 다녀가는 날이면 상담 기록지에 물음표가 늘었는데, 오늘도 정신은 물음표를 그렸다.

* * *

새로운 루머가 등장했다.

자혁과 다연의 이름이 이니셜로 표시된 채 기자들 사이에 돌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니셜의 주인공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자혁에 관한 것은 변한 게 없었다. 조현병과 대인기피증은 옛날부터 따라다니던 것이었다.

다연이 한국에 오기 전에는 신부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했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사진을 공개하니 스페인에 있는 그녀의 영상을 보내와 협박했다.

유학 중이었다는 걸로 해명을 하고 다연을 불러들였는데 이번에 도는 이야기는 심상치 않았다.

다른 사람의 피부가 닿으면 발진이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자혁의 눈빛이 무섭게 바뀌었다.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입니까?”

“파악 중입니다.”

지난번 다연의 사진과 영상을 보냈던 기자는 아닌 거 같았다. 방법이 달랐다.

“어떻게든 알아내세요.”

“네.”

자혁은 책상 한쪽에 두었던 슬라임을 꺼냈다.

처음에는 만지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자꾸 만지다 보니 스트레스가 진정되는 효과는 있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비서실 보고회가 있는 날이었다. 업무 특성상 보좌하는 상관들이 퇴근 후에 모이다 보니 비서실 정기 야근 날이 되어 버렸다.

“오늘 비서실 보고회인가요?”

“네, 식사 당번이 벌써 간식 사러 갔습니다.”

“오늘도 떡볶이인가 보군요.”

“여직원들이 좋아합니다. 대세를 따라야 평화롭니다.”

이 실장이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거기 위치가 어디입니까?”

* * *

저녁 메뉴를 사 갈 거라며 자혁이 전화했었다. 그가 들어오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걸릴 거 같아 다연은 마당으로 나갔다.

몸이 찌뿌둥한 거 같아 스트레칭을 하며 춤출 준비를 했다. 자혁의 집 마당이 외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으니 춤 연습을 하기에 좋았다.

블랙 레깅스에 몸에 꼭 붙는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다연은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지난번 장 여사가 한 많은 거 말고 사랑스러운 음악에 춤을 추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 다른 날보다 선곡에 시간이 걸렸다.

플레이리스트를 보던 다연의 눈에 익숙한 음악 하나가 보였다.

처음 스페인 거리에서 이 음악을 들었을 때 익숙한 선율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었다. 한국에서 번안곡으로 발표된 적도 있는 곡이라 이 음악이 흐를 때면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흥얼거렸다.

멕시코 음악인데 가사는 스페인어라는 것과 제목의 뜻도 스페인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키스해주세요’라니.

음악을 틀어 놓고 다연은 집중했다. 스페인 작은 마을에 자유롭던 한다연처럼.

다연은 잔잔하게 시작되는 기타 소리에 몸을 맡겼다. 애절한 사랑이 느껴졌다.

발레를 그만두고 난 뒤에도 다연은 무용실을 찾아가 종종 춤을 추었었다.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음악에 맞추어 그때그때 감정을 거친 호흡과 함께 흘려보내고 나면 정신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마당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자혁은 음식이 든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마당으로 향했다.

숨이 턱 막혔다. 늦은 오후의 주홍색 햇빛을 받으며 춤을 추는 다연은 눈이 부셨다.

기자가 협박으로 보내온 영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생동감이 있었고 매혹적이었다.

몸에 꼭 붙은 티셔츠는 그녀의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움직일 때마다 고운 선을 그려냈다. 올 블랙이라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빛나게 했다.

몸을 움직여서인지 아니면 저녁 노을빛을 받아서인지 그녀의 볼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가늘고 긴 목선을 따라 슴슴이 배어 있는 땀까지 모두 아름다웠다.

눈을 가렸던 가면이 없어서인지 지금 다연의 표정이 더 잘 보였다.

풍부한 성량의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Bésame, bésame mu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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